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54화 (154/354)

154. 매경 오픈

필상은 대답 대신 씩 웃고 말았다.

하지만 동의한다는 의미는 정확히 전달되었다. 어차피 첫 홀 티샷을 하면 알게 될 일,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5월을 시작하는 첫날, 이젠 메이저 대회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총상금 18억 원의 매경오픈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계 해설을 맡은 최 프로는 코리안 투어가 이렇게 성황리에 열리게 된 것이 감개무량한지 시종일관 눈가가 촉촉했다.

함께 뛰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 이런 추세라면 일본이 부럽지 않고 KLPGA처럼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타앙!

아너로 나선 타이거의 티샷 소리는 좀 특이했다.

하지만 필상은 임팩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굉장히 좋은 스윙을 했고 결과 또한 나쁘지 않다는 것을.

1번 홀은 368m의 오르막 홀이다.

200m 부근에서 시작된 좌측의 벙커가 255m까지 줄줄이 3개나 이어져 굉장히 위협적이다. 게다가 랜딩 지역의 페어웨이는 좁아지고 우측에도 기다란 벙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우즈 같은 장타자에게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오르막이 제법 있어 벙커 구역을 넘기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하지만 보란 듯이 그의 타구는 위험지역을 넘었다.

“휴우! 순수한 캐리가 263m네요.”

“오르막을 감안하면 300야드를 넘긴 거지.”

방향성도 아주 좋아 페어웨이 좌측에 떨어졌다. 그린을 공략하기 아주 용이한 방향까지 선점한 것이다.

“나이스 샷!”

“뭘 이 정도 가지고. 흐흐흐.”

필상이 내민 하이파이브를 마주친 타이거는 의기양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샷 감각이 최고였기 때문이다. 평소 경기 중에 미소를 띠는 일이 없지만 오늘은 굉장히 밝았다.

이번 한국 방문을 통해 필상과 한층 가까워진 것이 만족스러운 듯, 격의 없는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

“와우! 굉장히 정확하군!”

두 번째로 나선 김경태의 티샷은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앞서서 타이거가, 또 뒤에는 장타 괴물 필상이 기다리지만 그는 차분하게 자신만의 스윙을 가져갔다. 그동안 쌓은 경험과 연륜이 어떤지 유감없이 보여 준 안정적인 샷이었다.

필상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타이거는 연습 라운드보다 더 침착한 김 프로의 정교한 샷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필상도 한 가지 고백을 추가했다.

“제가 골프를 처음 배울 때 가장 흉내 내고 싶었던 스윙이 바로 경태 형의 저 간결한 스윙이었습니다.”

“내 스윙도 꽤 괜찮지 않던가? 다들 따라 했다고 하던데.”

“따라 해 봤더니 제게는 잘 맞지 않더라고요.”

타이거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당장은 필상이 티샷을 위해 티 그라운드로 향하는 바람에 대화가 끊어졌지만 추후 확인이 필요했다.

왜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게 혹시 연이은 부상의 원인은 아닌지 분석할 필요를 느꼈다. 일전에 필상이 비슷한 언급을 했던 적도 있기에 좋은 화두라고 생각했다.

함께 연습 라운드까지 했지만 타이거와 김 프로는 아직 서먹서먹했다. 언어의 문제도 있지만 둘 다 사교적인 성격은 아닌 탓이다.

그러나 첫 홀 티샷이고 자신의 뒤에 나서고도 좁은 페어웨이를 정확히 관통해 255m에 세운 티샷을 보며 박수를 쳤다.

-음. 드디어 공 프로의 샷을 보게 되나요?

-2주 전 JGTO 개막전 우승 당시, 공 프로의 스윙에 대해서 최 프로님은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아! 저 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같이 투어를 뛰고 계신 현역이시니 저희들의 시각과는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허 위원은 전문가의 의견을 구한 것에 불과했지만 실은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누가 뭐래도 최 프로는 한국 남자 골프를 전 세계에 알린 선구자다.

또한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도전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많은 골프팬들이 그를 사랑하고 지지한다. 게다가 지대한 영향력도 지닌 한국 골프의 기둥이라는 인식이 크다.

하지만 필상 또한 떠오르는 신성으로 추대받는 상황이라서 혹시 부정적인 의견이라도 나오면 바람직하지 않은 논쟁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저는 그의 도전이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굉장히 높게 평가를 하시는군요.

-만약 공 프로가 특유의 간결한 스윙을 버렸다면 저는 크게 우려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최종 라운드에서 당당히 보여 줬잖습니까!

-그렇죠. 저도 그의 변화를 응원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그날 꿋꿋하게 안정된 경기를 운영하는 걸 보고 난 뒤에는 안심을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늘 이상적인 스윙에 다가가려고 노력했을 뿐, 제게 맞는 스윙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되겠거니 했지만 늘 그런 기회를 잡지 못해 아쉬웠는데, 공 프로는 그걸 해내더군요. 그렇기 때문에 공 프로는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훌륭한 골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엄청난 호평이었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대선배님에게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해야 할 칭찬이었다.

골프는 일관성과의 싸움이다.

본인에게 맞는 최적의 스윙을 찾아 눈부신 결과를 만들지만 그걸 유지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유지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미처 인지하지 못한 변화가 스스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최고의 샷을 만들 수 있는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최 프로의 말처럼 그걸 지키는 것만도 벅차다.

하지만 필상은 일관성을 유지할뿐더러 아직 스윙 메커니즘이 무너지지 않았음에도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꾀한다는 것을 아주 높게 평가한 것이다.

까앙!

빈 스윙을 할 때부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실제 스윙은 더도 말고 정확한 풀 스윙이었다.

클럽헤드가 270도 돌았다. 누구나 쉽게 다가가는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길고 커다란 아쉬움과 싸워 왔던가!

그러나 노력과 인내의 결실은 달고 풍성했다.

스위트 스팟에 정확히 강타당한 타구는 창공을 꿰뚫을 듯 높이 치솟았고 주변을 감싼 갤러리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을 향했다.

아직 결과가 추론되기도 전이지만 뜨거운 환호성이 터졌다.

“굿 샷!”

“홀 인!”

터무니없는 소망의 외침도 터졌다.

그린의 높이를 고려하면 387m 파 4홀이다. 그린 앞이 오르막 경사이고 포대 그린이기 때문에 런도 짧을 것이다.

아무리 필상이 탁월한 장타자라도 420야드를 그린에 올리겠다고 칠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그건 보통 사람의 생각일 뿐, 필상은 우측 그린에 꽂힌 핀을 보고 때렸다.

“아! 짧겠는데?”

“뭐가요? 설마?”

“런이 문제야. 탄도가 높아서 런이 없겠어. 런이.”

실제 타구는 필상의 예상보다 훨씬 짧아 캐리 314m를 찍고 말았다. 조금 구른 타구가 멈춘 곳이 331m 언저리였다.

90% 이상의 힘을 들였다면 가능했을 것이나 실제 필상이 주입한 힘은 85% 안팎에 불과했다. 즉, 바람과 실제 스윙이 달랐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짧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다. 뒤에서 기다리던 타이거와 김 프로의 어이없는 표정, 바로 그걸 유도한 것이다.

성호까지 속아 넘어간 것이 좀 아이러니했지만 그만큼 필상의 장타력은 모두에게 위협적인 무기였던 것이다.

“어디서 구라야?”

“어?”

“타이거는 정말 믿는 거 같더라. 하지만 날 속일 수는 없지. 이 흉악한 인간아!”

“왜 이러십니까! 정말 그린에 올리려고 쐈다니까요.”

“그런데 러프도 아닌 페어웨이 끝에 정확히 멈추냐?”

“어제 힘을 너무 뺐나?”

“에라 이! 제수씨가 오지 않은 걸 뻔히 아는데!”

김경태 프로는 정확히 봤다.

있는 힘껏 때려도 혹시 짧으면 러프에 들어가는 것을 고려해 힘을 조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이스 샤앗!”

“조금 더 길었어야 하는데!”

김 프로의 세컨 샷은 114m, 오르막을 감안하면 120m가 남았다. 때문에 피칭을 잡아 부드럽게 컨트롤 샷을 했다.

그린 뒤쪽으로 내리막 경사라서 까딱하면 그린을 오버할 수 있기 때문에 김 프로는 그린 앞부분을 노리고 샷을 했다.

그런데 조금 짧기도 했고 생각만큼 구르지도 않아 내리막 5m 퍼팅을 남긴 것이다.

나쁜 결과는 아니지만 그다지 좋은 결과도 아니건만 필상은 짓궂게 ‘나이스 샤앗’을 외쳤던 것이다.

그 탓에 99m를 남긴 타이거의 세컨샷은 그린을 오버했다. 차마 거기에 대고 나이스 샷을 부를 수는 없었다.

“40m는 봐야 합니다.”

“띄우자. 60도 웨지.”

공의 라이도 스탠스도 편해 공격적인 공략을 시도했다.

부드럽게 당겨진 활시위가 공의 밑에 깊이 푹 박히는 순간, 하얀 포물선이 멋들어지게 그려졌다.

필상이 선 자리에서는 그린에 떨어진 공이 보이지 않지만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미칠 듯 터진 함성 뒤에 긴 한숨.

타구는 깃대 주변에 떨어져 버디 기회는 충분하지만 홀컵에 빨려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백스핀이 먹었어요.”

“방향은 빗나갔나 보네.”

“네. 한 10cm 정도 우측으로 흘렀어요.”

실제 그린에 올라 확인해 보니 1m 남짓한 버디 기회였다. 일단 마크를 한 필상이 물러선 뒤, 타이거의 그린 밖에서 시도한 퍼팅이 환상적이었다.

칩샷을 해도 되지만 그는 한국 코스의 그린 주변에 대한 적응이 아직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름 강하게 밀었으나 정확한 방향으로 구른 타구가 홀컵 15cm 앞에서 멈추는 광경에 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표했다.

가볍게 밀어 파를 기록한 그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결과였다. 그런데 까다로운 내리막 퍼팅을 김경태가 성공했다.

“우와아아! 김경태! 김경태!”

사실 세 명 중에 가장 좋은 성적이 기대되는 선수는 그다. 이미 매경오픈에서 2번이나 우승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조합에서는 언더독으로 인식되었다. 한일 통산 20승에 빛나는 최고의 프로 골퍼에게 어울리지 않는 시각이었다.

타이거는 그렇다 쳐도 필상은 감히 견주기 힘든 이력인데. 그런 서글픈 인식이 그의 집중력을 더 높이는 결과를 낳은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필상도 버디를 놓치지는 않았다.

그런 경기 양상은 2번 홀도 마찬가지였다. 티샷 비거리는 필상이 1등, 김 프로가 가장 짧았으나 먼저 그린에 올려 귀신같은 퍼팅 솜씨로 버디를 낚아 냈다. 필상과 비슷한 4m 거리였는데 그는 넣었고 필상의 공은 떨어지지 않았다.

“공 프로. 이 코스가 쉬운 세팅은 아니잖아?”

“네. 오래전에는 우승 스코어가 20언더도 나왔지만 최근에는 두 자릿수 우승이 없었으니까 난해한 코스라고 봐야죠.”

“그런데 대체 왜 이런 거야?”

1라운드 첫 두 홀에서 파를 기록한 타이거의 플레이가 좋지 못한 것은 절대 아니다. 먼저 출발한 9명의 선수 중에 언더 파를 기록한 선수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김경태는 -2, 필상은 -1, 자신이 꼴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불평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171m의 숏 홀인 3번 홀 아너로 나선 김경태의 티샷이 너무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홀인원이 될 뻔했다.

-와아! 정말 아깝네요.

-저도 들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조금만 약했더라면 라이를 타고 흘렀을 텐데 한 클럽 길게 잡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 이 홀의 공략 요령이 그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무난해 보이지만 실제 그린의 높이는 티 박스보다 5m가량 높습니다. 게다가 우측과 앞에 놓인 벙커에 빠지는 경우가 많고 좌측에 있던 벙커는 글라스 벙커로 대치했기 때문에 길게 공략하는 것이 파를 잡기 더 무난합니다.

-그린은 뒤쪽이 더 높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린 앞을 노리려다 벙커에 빠지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경험이 많은 선수들은 지금 김 프로처럼 길게 칩니다. 못해도 파는 보장되니까요.

필상도 그런 정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찍어서 먹어 봐야 아는 것인지, 7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의 샷은 하마터면 그린 앞쪽 가드 벙커에 빠질 뻔했다.

벙커 턱을 맞고 떨어지지 않은 공이 앞으로 튀어 에이프런에 멈춘 것은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앞선 두 선수의 샷을 참조한 타이거는 과감한 샷을 선보였다. 길게 치되 탄도를 높여 그린에 공을 세우는 시도였다.

타이거 특유의 빠르고 거침없는 스윙이 작렬하자 팬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결과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타구는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드로우가 먹었네요!”

“글라스 벙커.”

거리는 안성맞춤이었으나 필상의 예상대로 그린 좌측에 떨어진 공이 스핀을 먹으며 튄 결과 잔디 구덩이에 빠졌다.

타이거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표정이 스쳐 갔다.

분명 샷 감각은 아주 좋은데 동반자들이 앞서 나가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감는 샷이 나온 것이다.

그에게 지금 가장 불안한 요소는 러프에서의 샷이다. 그걸 스스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린 적중률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가장 난해한 러프 구덩이에 들어갔으니 난감할 수밖에.

그걸 잘 아는 필상은 그를 기다렸다가 함께 그린으로 이동했다.

“다르지 않아요.”

“다르던데?”

“다르다고 생각하는 게 다른 거죠. 그냥 편하게 치십시오.”

“하하하. 오케이!”

기분 나쁠 수도 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누가 감히 타이거 우즈에게 조언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경기 중에.

하지만 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필상의 조언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또한 다음 샷도 필상이 먼저 시행했다.

남은 거리가 비슷할 경우, 통상적으로 퍼팅하는 선수보다는 칩샷을 하는 선수가 먼저 샷을 하지만 그에게 보다 많은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서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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