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찜질
“이 대표님. 그만 일어나시죠.”
“눈에 보이는 뻔한 수작을 부리잖아요!”
“상대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까울 뿐이죠.”
이 대표는 최 회장의 얄팍한 수작을 간파했는지 상당히 흥분이 고조된 상태였지만 필상은 의외로 차분했다.
물론 이곳을 인수할 의사는 분명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 대리에게 철석같이 약속했다.
하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했다. 이 대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최 회장의 화살은 돌연 필상에게로 향했다.
“이보시오. 공 프로. 지금 나와 장난합니까?”
“장난은 당신들이나 하는 것이고. 우린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에나 이곳을 고려해 볼 생각이니까 더는 서로 인상 구기지 맙시다.”
“젊은 친구가 보자보자 하니까!”
벌떡 일어난 최득현은 당장이라도 폭력을 행사할 듯 성큼 다가왔다. 평생 그렇게 살아온 듯, 하지만 가소롭다는 태도로 자신을 직시하는 필상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움찔했다.
교활한 놈은 적당한 거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필상에게서 발산되는 기운에 큰 위협을 느꼈고 본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적을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필상은 이 상황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왜? 양아치 짓을 한 번 해 보시지?”
“이러지 말고 이성적으로 대화를 합시다. 대화!”
“대화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고.”
의도적 도발인 양, 필상의 입에서는 거침없는 말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기가 한 번 꺾인 최득현은 참고 있을 뿐이었다.
그사이 필상은 이 대표를 데리고 놈의 방을 나왔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고 대리에게 씩 웃어 보인 필상은 손을 들어 전화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광경을 확인한 이 대표의 의미심장한 표정은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파악한 것 같았다.
“물 제대로 먹인 것 같은데요?”
“전 여기가 마음에 듭니다.”
“그래요? 하지만 전 저런 양아치들한테는 한 푼도 주기 싫어요.”
“저도 그놈들한테 보태 줄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직원들이 꽤 많더라고요.”
“직원이요?”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싶던 이 대표는 잠시 필상의 생각을 읽기 위해 뜸을 들였다. 그리고 진의를 파악했다.
골프장이 법정 관리에 들어가고 파산 절차를 밟으면 당장 일터를 잃을 직원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필상은 그걸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감정적으로 접근할 사안은 아니지만 어차피 인수하면 직원은 다시 채용하면 되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필상의 입이 먼저 열렸다.
“고 대리가 정확한 자료를 보내 줄 거예요. 상황을 파악하고 자료를 근거로 약간의 권리금을 지불하고 인수하죠.”
“경영 공백을 막겠다는 건가요?”
“네. 좋게, 좋게 일을 처리하고 싶습니다.”
처음 도착할 때와는 달라진 심경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차가 골프장을 벗어나는 찰나,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는 구급차가 엇갈려 들어가는 것을 봤다.
이 대표는 그 순간 필상의 입가에 맺힌 희미한 미소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구급차는 도 이사란 인간을 병원으로 실어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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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프로!”
“어서 오십시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멀긴 머네.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도 하도 지루해 영화를 두 편이나 봤다는 거 아닌가!”
“한국에서는 지루할 틈이 없을 겁니다. 하하하.”
타이거 우즈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평소와 달리 수다스러운 그의 얼굴에 기대와 흥분이 엇갈린 것을 느끼며 필상은 나란히 준비된 인터뷰 룸으로 향했다.
아직 기자들을 만나는 자리가 어색한 필상과 달리 타이거는 시종일관 여유롭게 기자들과의 만남을 즐겼다.
평소 신비주의를 표방한 그의 달라진 태도에 한국 기자들은 굉장히 만족했으며 열렬한 환영의 뜻을 밝혔다.
“많은 분들이 제게 ‘골프의 황제’라는 과분한 칭호를 붙여 주셨지만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하건데,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선수는 바로 여기 앉은 공 프로입니다.”
“그와 함께 골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연습할 때가 가장 보람찬 순간입니다. 저는 그가 최근 자신만의 골프를 만들어 가는 것을 적극 지지하며 정말 부럽습니다.”
“TPK는 골프를 사랑하시는 팬들을 위한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 보스, 공 프로가 그 이상을 실현하도록 최대한 도울 것이며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도착하기 전에 미리 인터뷰 내용을 준비한 것 같았다.
TPK 사업에 관련된 상당히 전략적인 발언과 필상에 대한 애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게 곧 한국 골프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운동선수도 머리가 좋아야 큰 성공을 일굴 수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최소한 준비성이라도 좋든지.
여하튼 타이거는 대회가 열리는 남서울 CC에서 가까운 특급 호텔을 거부하고 필상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그의 마이애미 저택을 방문해 본 적이 있는 필상은 좀 쑥스러웠지만 타이거는 한국의 시골 풍경에 굉장히 만족했다.
“아이고. 흑인 양반이 우리 집에 다 왔네.”
동네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온 광경도 흥미로웠지만 타이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시는 엄마의 반응도 꽤 재미있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식구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이 어색할 만도 한데 바닥에 양반 자세로 앉아 엄마가 차려 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광경도 아주 이채로웠다.
조카들이 타이거를 보게 해 주겠다고 친구들을 잔뜩 데려왔지만 그 아이들과 일일이 인사하고 셀카까지 찍어 주는 타이거의 배려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고도 남았다.
“잔디가 아직 제 빛깔을 찾지 못해 좀 아쉽죠?”
“아니야. 이 잔디가 한국형 잔디인 건가?”
“네. 그래도 그린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5월이 다가오며 잔디가 푸른빛을 띠고 있지만 사시사철 최고의 잔디에서만 플레이하던 타이거는 비교적 정리가 잘된 페럼 CC에서도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잔디의 상태나 결보다는 느낌이 생소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분석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즐기는 자세를 보고 필상은 프로의 자세가 어때야하는지 한 수 배웠다.
그런데 연습 라운드를 마치고 들어오는데 그가 자꾸 허리를 만지는 모습을 확인한 필상은 배려가 필요함을 느꼈다.
“찜질하러 가시죠.”
“찜질?”
“네. 외국에 나가면 항상 아쉬웠던 한국에만 있는 아주 좋은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타이거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라커룸에 들어가 샤워를 마친 필상은 그를 데리고 뜨끈뜨끈한 온수가 담긴 대형 욕조에 먼저 몸을 담갔다.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에 자청해서 들어가는 필상을 본 그는 기겁했다. 대체 왜 그런 고난을 자청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허리 부상에 효과가 있을 겁니다.”
“정말이야?”
“물이 생각보다 뜨거우니까 일단 조금씩 떠서 몸을 적시고 적응한 뒤에 천천히 들어와 보세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타이거가 온수에 적응하는 데만 5분이 넘게 걸렸다. 물에 몸을 담그고도 그는 마치 고난의 수도승 같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편안하게 눈을 감고 온수찜질을 즐기는 필상을 보더니 똑같이 따라 했다. 그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흘러나올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으으으……. 이제야 느낌이 좀 오는군!”
“천천히 스트레칭을 해 보세요.”
“그럴까?”
일본을 여러 번 방문했을 때도 온천을 경험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따라 해 보고는 그만뒀다. 몸에 좋다는 안내가 있었지만 굳이 자해를 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필상의 권유를 받아들였고 급기야 혈액 순환이 좋아지고 전신의 근육이 풀리는 경험을 했다.
“그만 나오시죠.”
“조금만 더.”
“하하. 다음 코스는 더 좋을 텐데요?”
“다음 코스?”
황토와 참숯 찜질방이 있었던 것이다.
온수 적응에 자신감을 얻은 타이거는 자신 있게 따라 들어왔지만 후끈한 열기에 기겁하고 튀어 나갔다.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것 같았으나 필상이 여유롭게 즐기는 모습을 보더니 도를 닦는 표정을 지으며 들어와 앉았다.
필상은 그의 등 뒤로 돌아가 앉아 그의 몸을 안마해 줬다. 우려만큼 부상이 심각하지는 않았는지 10여 분 마사지를 하자 더는 기가 유출되는 느낌이 없었다.
“공 프로. 고마워.”
“몸이 이전보다는 확실히 좋아진 것 같습니다.”
“응. 나도 그렇게 느껴. 이게 다 자네 덕분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형이 몸 관리를 더 잘했기 때문이죠.”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 자넬 만난 건 내 인생 후반기의 가장 큰 행운인 것 같아.”
“하하하. 다음 코스로 가시죠?”
“다, 다음 코스?”
타이거의 표정은 마치 엄마 손에 붙잡혀 가기 싫은 병원에 끌려가는 아이 같았다. 이미 경험한 두 번의 찜질도 그에게는 유격 훈련과 같은 고난이도였다.
그래도 자신의 건강관리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얻었고 미국에 돌아가면 필히 집에 찜질방을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음 코스가 더 있다는 말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닌 용기의 한계가 드러난 것만 같았다.
“이번 코스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정말이지?”
“그렇다니까요. 제가 특별히 모셔온 게스트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게스트?”
다름 아닌 세신(洗身), 즉 때밀이였다.
골프클럽에는 세신사가 없어 미리 부탁해 시내에서 초청한 것이다. 그냥 마사지를 하는 줄 알았던 타이거는 세신사가 이태리타월을 팡팡 때리며 때를 밀기 시작하자 기겁했다.
한국인들에게는 시원한 그 느낌이 타이거에게는 마치 피부를 벗겨내는 것 같은 통증이 수반되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필상이 세신사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야만 했다.
“그분은 때를 미는 게 난생 처음이니까 살살 하시다가 세기를 조금씩 높여 주세요.”
“이 유명한 양반이 의외로 엄살이 심한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전신 구석구석 심지어 발바닥의 각질까지 제거해 주는 단계에 이르자 눈이 마주친 타이거는 엄지를 불쑥 치켜세웠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가 없는 그 시원하고 후련한 느낌을 타이거가 마침내 찾아낸 것 같았다.
팁을 100달러나 준 세신사와 기념 셀카까지 찍은 타이거가 앞으로 전용 세신사를 고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에서 구인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 * *
-지금부터 제 39회 GS칼텍스 매경오픈 중계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허덕호 해설위원과 더불어 한국 골프의 선구자이셨던 최경주 프로님이 함께 여러분의 시청을 도와주시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시청자들에게 인사하시죠?
-여러분 반갑습니다. 캐스터께서 과분한 표현을 하셨는데 선구자는 아니고요. 또한 제가 은퇴한 것도 아닙니다. 부상 때문에 대회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어딜 가도 꼭 봐야 할 경기라서 이왕이면 자료가 많은 여기도 좋겠다 싶어 왔습니다.
-하하하. 최 프로님의 입담은 여전하시네요. 제가 미처 보지 못하는 실전 심리와 상황에 대한 전문적인 해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해설은 허 위원님이 하십시오. 전 그냥 앉아만 있어도 된다고 해서 나온 거 아닙니까. 하하하.
이제 막 첫 티오프가 되어 아직 중계 화면에 잡을 장면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중계진은 농담 섞인 대화로 시청자들의 무료함을 달래는 중이었다.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못한 최 프로가 임시 해설위원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이번 대회가 크게 흥행하기를 바라는 선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두 나섰고 해외 투어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들도 다 모였다. 게다가 타이거 우즈가 출전하면서 해외 언론의 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또한 나가는 대회마다 굉장히 높은 확률로 우승하는 필상이 과연 이번 대회도 거머쥘지 그것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첫날 매치 업 중에 아주 흥미로운 조합이 보이더군요.
-주최 측에서 특별히 당사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는데, 흔쾌히 동의해 줬다고 합니다.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죠. 저라면 쉽게 응하지 못했을 겁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누구랑 함께 경기하느냐는 의외로 중요하거든요.
-이곳을 찾아오신 골프팬들과 대회의 흥행을 위한 선수들의 뜻깊은 배려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 프로까지 동의한 특별한 매치 업은 바로 4번째 조로 7:03에 출발하는 세 명에 대한 것이었다.
타이거 우즈, 공필상, 그리고 김경태.
그들을 맺어 준 고리는 당연히 필상이었다. 이미 이틀 전에 그들이 연습 라운드를 함께한 것도 큰 화제였다. 아무리 친해도 경쟁 상대와의 라운드는 가급적 피하는 게 보통이다.
“경태 형.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닙니까?”
“이거 왜 이래? 날도 밝지 않은 껌껌한 꼭두새벽에 연습장에 나온 거 다 들었어.”
“잠이 일찍 깬 걸 어쩝니까?”
“타이거는 아직 안 왔나?”
“지금은 연습 그린에 있어요. 아까 봤는데, 샷 감각이 아주 최고조까지 올라왔더라고요.”
“아! 씨이……. 꼴찌하면 안 되는데!”
“이 코스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했던 형이 그러면 안 되죠. 전 연습 라운드 3번이 전부라니까요.”
“됐고. 오늘 네 전략이나 좀 읊어 봐.”
“경쟁자의 전략을 말하라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공격 앞으로 할 거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