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52화 (152/354)

152. 동종의 쓰레기

유난히 화창한 봄날이었다.

필상은 이 대표와 함께 인수 의사를 밝힌 스코틀랜드CC를 실사하기 위해 서해안 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내주에 개최될 매경오픈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었고 주말에는 대회 출전을 확정한 타이거가 인천공항으로 들어온다.

그의 KPGA 대회 출전에 한국 골프팬들은 열광했고 PGA는 같은 기간에 열리는 웰스 파르고 챔피언십을 고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타이거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최근 허리 부상 때문에 고전 중인데 무엇 때문에 한국까지 날아가 무리를 하느냐는 것은 수사에 불과했다. 필상이 PGA 출전은 본체만체하는 와중에 오히려 PGA를 대표하는 선수가 한국 투어에 참가하는 것이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속만 태울 뿐 직접적인 언급은 회피한 채로.

“오늘 날씨 참 좋죠?”

“아주 싱그럽네요. 곧 5월이잖습니까.”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좋지 못한 선입견을 가졌지만 도착한 골프장의 위치와 주변 전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서해 바다를 굽어볼 수 있는 위치와 도시와 구별된 울창한 산림은 서울이나 인천에서의 거리를 잊게 할 만큼 자연친화적이었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클럽하우스에 도착한 필상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인간의 얼굴을 봤다.

“저 새끼가 왜 여기에?”

내릴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차창 밖을 내다보며 평소와 다른 거친 말을 쏟아 내는 필상을 바라보던 이 대표는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도 이사. 저 사람 말인가요?”

“네. 죽어도 잊지 못할 인간이죠.”

“그럼 이참에 본때를 보여 주세요. 어차피 아쉬운 건 저들이니까요.”

얼마 전 성희를 우연히 만난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쳐 죽이고 싶은 인간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분노를 잠재우기 힘들뿐.

하지만 필상 일행이 차에서 내리지 않자 골프장 직원이 황급히 달려와 차문을 열어 영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투력을 극상까지 끌어올린 필상은 차에서 내렸다.

“어. 이게 누구야?”

“미친 새끼!”

참으로 뻔뻔한 작자였다.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도 모자라 횡령 배임으로 법정 싸움까지 하게 만들었다. 진실이 밝혀진 뒤 필상은 가진 것을 모두 잃었으나 놈은 법의 뒤에 숨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참으로 엿 같은 세상인데, 죽여도 시원찮을 놈의 상판대기는 법정에서 본 뒤로 처음 보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대체 무슨 낯짝으로 아는 척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때문에 놈에게 향한 첫 마디는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원초적인 욕설일 수밖에 없었다.

“어허! 옛 상사한테 이러면 안 되지.”

“상사? 너 같은 양아치 새끼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도 짜증나니까 헛소리는 집어치워.”

“난 아는 처지라고 도움을 줄까 했는데…….”

“도 이사!”

놈이 대가리는 아닌 것 같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중년 남자가 그를 제지하며 나섰는데, 풍기는 기운이나 생김새를 보아하니 같은 족속이라는 느낌이 확연히 왔다.

때마침 이 대표도 한 발 나섰다.

“최 회장님. 저 치는 논의의 장에서 제외하시죠.”

“난 도 이사가 공 프로님을 잘 안다고 해서…….”

“이보세요. 저자가 내게 어떤 짓을 벌였는지 알고나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표님, 그만 돌아가죠.”

그 말을 남긴 필상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일부러 문을 거칠게 닫은 이유는 이 대표에게 협상의 여지를 주기 위해서였다. 개인적인 감정은 여과 없이 드러내지만 사업은 별개라는 냉정함을 잃지는 않았던 것이다.

차창 밖으로 최 회장이라는 자가 도 이사를 쫓아내는 모습이 보였으나 필상은 여전히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때맞춰 이 대표가 행동에 들어갔다. 그녀마저 맞은편 차문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최 회장은 얼른 필상이 앉은 차문을 열고는 사과부터 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도 이사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쫓아냈으니 그만 기분 풀고 나오시죠.”

“내가 병신입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 지금 내 기분으로는 그 어떤 논의도 진행할 의사가 없습니다. 일도 좋지만 원수 같은 사악한 놈과 연관된 이곳에 대한 정내미가 떨어졌으니까 없었던 일로 하시죠.”

그 말을 던진 필상은 이 대표에게 어서 차에 타라는 손짓을 했고 그녀는 순순히 따랐다. 최소한 필상이 결정권을 가졌음을 명확히 보여 주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이 대표가 차에 오르자 필상은 기사에게 출발 지시를 내렸고 차가 클럽하우스에서 멀어지자 픽 웃으며 속내를 밝혔다.

“연락이 다시 오겠죠?”

“그럼요. 우리가 유일한 동아줄이거든요.”

“후려칠 생각은 없었는데 바닥까지 후려쳐야겠습니다.”

“그 분위기가 잘 형성되고 있는 것 같아요. 호호호.”

같은 시간, 차가 떠난 뒤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낸 도 이사는 최 회장의 주먹질에 나가떨어졌다.

발로 마구 걷어차고 온갖 욕설을 퍼붓는 것을 백미러로 확인한 필상은 둘의 관계가 어떤지 짐작이 됐다.

자신을 비롯한 직원 수십 명의 고혈을 빤 악질적인 놈이 예상과 달리 누군가의 하수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본때를 보여 주는 것은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바닷가에 좋은 카페가 많다던데, 가서 차나 한잔하죠.”

“도 이사가 옛날 직장 상사였나요?”

“얘기하자면 깁니다.”

카페에 도착하기도 전에 놈들에게서 계속 연락이 왔다.

아쉬운 것은 그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굳이 쉽게 응할 이유가 없었다. 카페에 도착해 차를 마시면서 필상은 본의 아니게 과거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야 했다.

적어도 누군가를 이 바닥에서 매장시키려면 그만한 합리성은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필상의 과거를 접한 이 대표는 마치 자기 일인 양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주 질이 낮은 놈이군요.”

“사회악입니다. 평생 남의 등이나 쳐 먹고 살 놈이죠.”

“어떻게 매장을 시키죠?”

“그건 제게 맡겨도 됩니다. 하하하.”

누군가에게 악한 감정을 품은 적은 있어도 구체적인 실행 방안까지 구상한 적은 없다. 하지만 필상은 자신에게 부여된 아주 특별한 능력을 써도 무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과거처럼 많은 것을 가진 것은 아닌 것 같았으나 인생의 밑바닥이 얼마나 잔인하고 처절한지 깨닫게 만들 생각이었다.

대충 한 시간여를 카페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필상은 급기야 이 대표와 함께 다시 스코틀랜드CC로 향했다.

그런데 아까와 달리 최 회장 옆에 도 이사는 보이지 않았다. 또한 차에서 내린 필상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아까는 제가 워낙 감정이 치솟아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전후 사정도 모르게 그딴 놈을 곁에 둔 제 불찰이지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똑같거나 더 악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일단 협상의 상대였기에 선선이 그를 따라 회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대기업 회장실을 가본 적은 없지만 이보다 화려할 것 같지는 않았다. 골프장 오너라고 해도 부채가 자산을 거의 잠식한 회사라고는 믿기지 않은 호사로운 인테리어였다.

그런 필상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최 회장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겸양을 떨었다.

“누추하지만 앉으시죠.”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으니 바로 논의를 시작하시죠.”

“아. 네.”

최 회장과 이 대표가 본론에 들어가자 필상은 지루하다는 듯 기지개를 펴더니 바람이나 쐬러 가겠다면 방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비서실에는 도 이사가 독기 가득한 눈빛을 띠며 밖으로 나온 필상의 노려보며 앉아 있었다.

“이봐. 도 씨. 눈깔에 힘 빼. 이 새끼야!”

“뭐? 이런 후레자식이!”

발끈한 도성주가 벌떡 일어나 필상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기분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제법 덩치도 있고 성깔도 있지만 필상의 질식할 것 같은 기운을 접하자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게다가 운동으로 다져진 필상과 싸워 이길 자신도 없었다. 졸지에 주제 파악을 한 것인데, 그런 모습을 비웃듯 필상이 다가가 놈의 이마에 집게손가락을 댔다.

“병신 새끼! 덤벼 봐! 저기 C TV에 다 녹화되고 있잖아.”

“그만하지. 내가 너보다 나이가 열 살 이상 많다고.”

“너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이 부장님을 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마구 주먹질을 한 개새끼가 바로 너야. 잊었냐?”

“그만하자니까!”

“뭘 그만해. 네놈한테 당한 것 생각하면 껍질을 홀딱 벗겨 소금에 절여도 시원찮아. 이 조가튼 새끼야!”

비서실에 있던 여직원 둘이 바짝 얼었다.

그녀들은 필상이 누군지 너무도 잘 안다. 골프장에 근무하면서 한국 최고의 프로 선수를 모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알던 이미지와는 달리 동네 양아치들도 쓰지 않을 험악한 말을 상대의 면전에서 마구 쏟아내는 모습에 하얗게 질렸다.

“알았어. 어디 두고 보자. 얼마나 잘되는지.”

“병신 새끼. 꼬리 말고 도망치는 주제에.”

도 이사는 결국 비서실을 휑하니 떠났다.

비서실을 나서는 그의 뒤통수에 마구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하는 필상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하지만 놈이 떠난 뒤, 필상은 여직원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CCTV 녹화된 거 지워 주시죠.”

“네?”

“계속 여기 근무하고 싶다면 내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겁니다.”

“아, 네.”

어린 여직원은 여전히 벌벌 떨고 있었지만 나이 많은 여직원은 금방 필상의 말을 알아듣고는 컴퓨터에 앉아 지시대로 실행했다.

그걸 지켜본 필상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이 풀렸다.

“제가 오늘 두 분께 큰 실례를 했습니다. 하지만 저 쓰레기 같은 인간한테 5년을 착취당하고 철장 신세까지 질 뻔했습니다. 아주 악독한 놈이죠. 부디 오늘 본 것은 잊어 주십시오.”

“저흰 이해해요. 우리도 저 인간이 호되게 당하는 거 보니까 아주 속이 후련했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만약 저희가 이곳을 인수한다면 두 분은 실직하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바닥을 보인 것은 기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 느낌을 받은 필상은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어차피 논의는 이 대표가 알아서 할 테고 필상은 클럽하우스를 나서 코스를 향해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런데 카트 한 대가 다가왔다.

아까 비서실에서 봤던 30대 중반의 여직원이었다.

“코스를 돌아보시려면 카트를 타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아! 고맙습니다. 직함이?”

“고 대리에요. 고영미 대리.”

“고 대리님에게 카트 운전을 부탁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코스를 전혀 몰라서.”

“물론이죠. 어서 타세요.”

퉁퉁한 외모를 지닌 고 대리는 굉장히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자신이 아는 코스에 대한 정보를 술술 읊는데, 경험이 풍부한 캐디보다도 나은 것 같았다.

그녀는 첫 직장인 이곳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필상이 묻지 않았음에도 골프장의 연원을 상세히 설명했다.

비서실에 근무해서인지 웬만한 직원은 알 수 없는 속사정까지 이야기하는 이유는 필상이 이곳을 인수하기를 염원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골프장을 경영한 이들은 얍삽한 작자들일지 모르지만 이곳에 근무하는 대다수의 직원들은 이곳이 일터였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올바르지 못한 오너 밑에서 온갖 착취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상상을 하니 자신의 과거가 오버랩이 되는 것 같았다.

“코스가 아주 예쁘네요.”

“그렇죠? 조금만 투자하면 훨씬 좋은 골프장이 될 수 있다니까요. 여기 직원들은 대부분 한 동네 사람들이라서 일을 하는데 손발이 척척 맞거든요.”

“다들 직장을 잃을까 걱정이 많겠군요.”

“네…….”

본질을 꿰뚫은 필상의 말에 그녀의 음성이 기어들어 갔다.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위해서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꺼냈던 것이다.

그런데 필상이 직설적으로 언급하자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고 대리님.”

“네. 말씀하세요.”

“저희가 인수할 겁니다. 그리고 직원을 해고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아마 지금보다 더 많은 직원이 필요할 거고 기왕이면 이 동네 사람들을 쓰겠습니다.”

“저, 정말이세요?”

“저 공필상입니다. 최 회장이나 도 이사처럼 양아치는 아니니까 저를 믿고 지켜보세요.”

“최득현이 되지도 않을 무리한 요구를 할 텐데요?”

“음흉한 계략이라도 꾸몄나 보군요?”

“네. 제가 이번 인수 건에 관한 운영진의 자료를 정리했거든요. 사실은…….”

놈들은 이번 일에도 사기에 가까운 행각을 준비하고 있었다. TPK가 아니면 인수할 대상이 없는데도 마지막까지 빼먹고 빈껍데기만 넘길 흉계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도성주나 최득현이나 동종의 쓰레기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지만 바쁠 일은 없었다.

어차피 이 대표가 걸러 낼 가능성이 높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종 계약서에 사인할 당사자는 필상이기 때문이다.

27개 홀을 두루 살펴본 필상이 최 회장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밖에까지 고성이 들렸다. 놈들의 수작을 파악한 이 대표의 흥분한 음성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는 강한 톤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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