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51화 (151/354)

151. 짓궂은 운명

“서해안의 스코틀랜드 CC 아세요?”

“스코틀랜드요? 골프의 발원지를 의미한 명칭인가요?”

“이름은 별 의미가 없고 27홀 회원제 골프장으로 개장했는데, 몇 년 전에 법정관리를 마치고 퍼블릭코스로 전환했어요. 뷰가 좋다는 둥, 수익성이 높다는 둥, 말이 좀 많은 코스였는데 조심스럽게 제안이 들어왔어요.”

“주변 확장성은 보장이 되나요?”

“코스 바로 옆에 큰 산이 있어요. 해발 105.9m이니까 수용한다면 활용도는 상당히 높아 보여요. 인천공항에서 멀지도 않고요.”

“그런데 뭔가 문제가 있나 보군요?”

한 마디로 복잡했다.

그 이유는 골프클럽을 완전히 사업적 목적으로 개장 운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골프가 사회와 국민 건강에 이바지하는 스포츠라는 생각만 있었어도 이렇게 온갖 송사에 얽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돈벌이의 수단으로 골프장을 개설해 수백억을 챙긴 뒤, 갖은 수단을 동원해 책임을 회피하고 법적 분쟁으로 이어진 경우가 너무도 많다.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회원권을 구매한 이들의 현명하지 못한 선택도 작용하고 자본주의 시장의 취약한 구조를 인정하지만, 법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빚어낸 참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가의 눈물과 원한이 맺힌 곳에 꿈의 씨앗을 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사실 관계가 달라요. 문제의 근원은 명확하지만 지금 상황은 오히려 누군가가 나서서 인수를 하는 것이 피해자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거죠.”

“피해자들의 손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는 측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인수 금액이 낮고 재생 가능성이 높지만 이미 수차례 무너진 이미지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이 최대 난관이거든요.”

“우리 TPK는 가능하다고 보시는 겁니까?”

“진흙 위에 피는 꽃이 더 아름답잖아요.”

이 대표는 종합적인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일단 수도권에 적당한 매물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고 가격 대비 실제 물건이 좋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조건이다.

다른 기업은 손을 대기 꺼리지만 최고의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할 수 있는 TPK라면 반전의 효과도 누릴 수 있다.

아무도 인수하지 않아 고통 받는 채권자들에게 일부나마 변제해 주고 서로 윈윈의 이미지를 생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하지 못한 그들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들어가면 한 번 방문을 해 보죠.”

“그래요. 사람이 밉지 골프 코스가 밉지는 않을 거예요.”

이 대표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그 코스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귀국하는 동안 스코틀랜드CC에 관련된 자료들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위치가 아주 훌륭하고 코스 레이아웃도 좋았다. 물론 갤러리에 나온 사진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어 확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JGTO 개막전을 우승으로 장식하고 귀국한 필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미루고 미뤘던 광고 촬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곤하지 않아?”

“전 재미있는 걸요!”

몇몇 장면은 모모코와 함께 찍었다.

산모의 배가 제법 불렀지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는 것에 부부가 동의했기 때문이다.

필상도 모모코도 번거로웠지만 이런 활동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기에 즐겁게 임했다.

그런데 운명은 참으로 짓궂다.

마지막 촬영이 아름다운 해변이 위치한 대부도에서 이뤄졌고 수고한 모든 스태프와 함께 점심 회식을 하는 횟집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과 조우했다.

“오빠. 저기 저 사람들 아는 분들이야?”

“누구?”

“오빠를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더라고.”

두 젊은 부부가 구석 자리에 앉아 식사 중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만 여자는 뒤태만 보여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런데 남자의 돌출 행동을 만류하려던 여자의 옆모습을 보는 순간, 필상의 심장은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바로 과거의 여인, 이성희였던 것이다.

필상과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이렇게 밝게 웃으며 사인을 요청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 프로님, 여기서 뵙다니 영광입니다. 하하하.”

“아! 반갑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잠시 뜸을 들인 필상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붉어진 낯빛을 감추지 못한 채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는 그녀를 가리키며 여전히 친근감 어린 어투로 되물었다.

“혹시 아내 분이십니까?”

“아. 네. 제 집사람의 고향이 공 프로님과 같은데, 혹시 제 아내를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어릴 적 또래 친구인데, 왜 모른 척하는지 모르겠네요. 성희가 아내 분 맞죠?”

이름까지 맞추자 그제야 남자의 낯빛이 굳었다.

골프팬인 그는 그동안 늘 필상의 경기를 직관했다. 그때마다 곁에 있던 아내가 했던 말은 고향이 같다는 말 뿐이었다.

이름까지 아는 어릴 적 친구라면 당연히 남편이 열렬히 좋아하는 필상에 대해 아는 척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별말이 없었던 기억들을 가만히 되새겨 보니 좀 의아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과거에 대해 물은 적은 없지만 남자가 없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그것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데, 필상의 묘한 태도가 괜히 거슬렸다.

굳이 여자가 아는 척을 하지 않는데, 왜 이렇게 나오는 것일까?

“오빠. 아는 분이세요?”

“응. 잠깐만. 인사 좀 하고 올게.”

어안이 벙벙한 남자는 머뭇거렸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필상은 그들의 자리로 당당히 걸어갔다. 그 뒤를 어정쩡하게 따르는 남자의 표정은 뭐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호했다.

자신이 극렬히 좋아하는 프로 골퍼가 알고 보니 친한 관계라는 것, 분명히 기뻐할 일이지만 그게 기껍지 않은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필상이 다가오자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던 성희가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먼저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이런 여우 같으니라고!

“필상아. 오랜만이야.”

“알아 봤으면 아는 척이라도 하지 너무하는 거 아냐?”

“일행들이 많은 거 같아서…….”

핑계가 궁색했다.

누가 봐도 통하지 않을 이유다. 필상처럼 온 국민이 좋아하는 스타가 되면 모르는 사람도 어떻게든 인연을 들먹인다.

더욱이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라면 더더욱.

하지만 필상은 개의치 않고 치과의사라는 남편에게 물었다.

“제가 잠시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시죠.”

하필이면 그녀와 마주 앉았다.

묘하게도 남편의 자리에 필상이 앉았고 남편은 중간에 끼어 앉은 셈이었다.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필상이 먼저 앉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으나 그걸 깬 사람도 성희였다.

“결혼 축하해.”

“응. 미처 초대를 못해서 어쩌지.”

“나도 그랬는데 뭘. 그런데 실물을 보니까 네 와이프, 모모코 정말 예쁘네.”

“내 아내? 그럼 예쁘지. 그렇지 않습니까?”

필상은 뜬금없이 그녀의 남편에게 화살을 돌렸다.

어색한 미소를 짓던 그의 대답이 정말 궁금했다.

“당연하지요. 일본 여자 골프의 여신 아닙니까! 저도 공 프로의 남다른 능력이 늘 부러웠습니다. 하하하.”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봅니다. 아마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가 아니었을지. 하하하.”

물론 분위기를 맞추기 위한 농담이다.

필상도 맞장구를 치며 크게 웃었지만 성희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냥 토라진 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는데 그 표정은 정말 진심이 그대로 투영된 것 같아 그도 찔끔했다.

그러나 필상은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치과의사라고 들었습니다.”

“네. 고향이 좁은 동네라더니 그런 것까지 다 아십니까?”

“그럼요. 지금은 좀 소원해졌지만 저희 어릴 적에는 두 집이 정말 가까운 사이였거든요.”

“아! 그랬군요. 진즉에 알았으면 반드시 저희 결혼식에 초대했을 텐데,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정말 아쉽습니다.”

“제가 그때는 워낙 변변치 못해서 집밖을 잘 나가지를 못했었습니다.”

“공 프로님에게 그런 아픈 과거가 다 있으십니까?”

“네. 대학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실직하고 만고의 백수가 되었었거든요.”

입 밖으로 다시 그 시절을 언급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바로 이성희 앞에서.

빨갛던 낯빛이 서서히 하얀 사색으로 변하는 걸 지켜보며 자신이 참으로 옹졸한 남자라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의 배신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또한 얼마나 고마웠는지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남편은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상당히 무던한 성격인 듯.

“두 집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좋은 관계를 다시 이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죠. 서로 바빠 만나기는 쉽지 않겠지만 명절 같은 때 여주에 오시면 저희 집도 한 번 찾아 주십시오.”

“아!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 말을 하며 필상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골프공을 꺼내 거기에 직접 사인을 하고는 그에게 건넸다.

“성희가 아주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이성희, 앞으로는 서로 연락도 좀 하며 지내자. 괜찮지?”

“응. 그래.”

“난 일행들이 기다려서 그만…….”

하고 싶은 말이 켜켜이 쌓였지만 꺼낼 수는 없었다.

옹졸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다. 자신을 버리고 이 남자를 만나 행복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에게 있을 수 없는 실례였다.

친필 사인볼을 줘 고맙다며 연신 마주잡은 손을 흔드는 그에게 정중히 인사한 필상은 자리로 돌아왔다.

“저기 저 여자, 나 알아요.”

겨우 마음을 다스리고 돌아왔는데 모모코의 말이 아팠다.

그녀가 어떻게 성희를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집 구석구석에 남은 그녀의 흔적을 다 지우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

“과거일 뿐이야.”

“알아요. 전 저 여자가 너무 고마워요.”

“모모코…….”

주변에 사람들이 꽤 많다. 하지만 모모코의 그 말을 들은 필상은 그녀를 안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도 사랑스럽지 않은가!

그사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성희와 그녀의 남편이 횟집에서 나가는 모습을 봤다. 자신의 앞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던 치과의사가 사인볼을 바다에 던지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게 좀 착하게 살지 그랬어!’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의 의심은 무서운 법이다. 필상이 다녀간 뒤로 침묵만 지키던 부부가 조용히 자리를 떴고 차에 타기 전에 고마움을 표하던 사인볼을 버렸다.

그가 버릴 것이 그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세상사가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유치한 복수라는 생각은 들지만 넓고 넓은 천지에 그녀와 자신이 이렇게 맞닥뜨린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시원할 것 같았지만 찜찜함은 여전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을 저버린 대가치고는 너무 가볍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 * *

“너 성희 만났어?”

“왜?”

“아까 난리 났었잖아.”

집에 들어오자 큰누나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초저녁에 있었던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누나의 표정이 밝은 것을 본 필상은 일단 안심했다.

성희가 남편과 대판 싸웠는지 친정에 연락했고 그 애미라는 여자가 집에 찾아와 난리 법석을 떨었단다.

당연히 엄마와 누나들은 시답지 않은 소리 하지 말라며 쫓아냈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소란이 멎은 뒤에 다들 엄마를 위로했다는 것이다.

“촌 동네가 시끄러웠겠네!”

“아주 속이 시원했지. 대체 넌 그년을 어디서 만난 거야?”

누나는 시시콜콜 물었지만 필상은 그냥 웃고 말았다.

좁은 시골 마을 인심이라는 것이 그렇다.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라면 다행인데, 같잖은 힘의 우열이 작용한다.

필상과의 관계를 다들 알면서도 치과의사한테 시집간다고 그 집 잔치에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었다.

하지만 필상이 크게 성공해 마을을 빛낸 유명인이 되었고 엄마가 주변 사람들에게 선심을 팍팍 쓰자 이제는 달라졌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성희는 이제 아주 몹쓸 년이 되었다. 참으로 간특한 인심이 아닐 수 없지만 세상사가 그리 돌아가는 것을 어쩌겠나!

“얼른 밥이나 먹어.”

“네. 엄마.”

“너 말고. 네 집사람부터 데리고 와야지.”

“아! 진짜! 이제 손자라도 낳으면 난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될 것 같은데?”

“아들이래?”

“아니요. 그건 모르죠. 그냥 그렇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집사람한테 더 잘해.”

“뭘 더 잘해요?”

“이제 허구한 날 밖으로 나돌 거 아냐! 그러니까 집에 붙어 있을 때는 살가운 애정 표현도 좀 하고 그러라고. 나나 누나들 눈치 볼 거 없어. 알았지?”

“으음! 알았어요!”

엄마는 아이까지 가진 모모코가 아직 한국어도 서툰데 시집 식구들과 이국에 함께 사는 것이 늘 안쓰러운 모양이다.

그런 마음 씀씀이를 가졌기에 모모코가 더 편하게 식구들과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필상에게도 이러는데 누나들에게는 오죽할까 싶기는 했다.

하지만 가족의 중심이 필상과 모모코에게 옮겨온 것을 누나들이나 자형들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만약 필상이 늘 집에 붙어 있다면 모를까, 집보다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길기에 가족들의 배려는 꼭 필요했다. 그걸 엄마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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