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48화 (148/354)

148. 오래된 영화

“오빠가 대표라는 게 알려졌어요.”

“대표라니?”

“타이거가 모든 사업을 관장하고 최대 지분을 가진 사람이 바로 오빠라고 밝혔다고요. 기자들한테.”

“최대지분을 가진 건 맞지만 대표는 아냐. 일대 주주일 뿐.”

“그게 그거 아닌가요?”

“아니지. 의견이나 이견을 제기하는 것과 실제로 일을 추진하는 건 다른 영역이야. 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외면하고 다른 것에 매달릴 의사는 없어.”

“아! 경영은 이 대표님과 전문가 그룹에게 맡긴다고 했죠.”

“그래야지.”

언론을 통한 정보의 확산은 시공을 초월하는 파급력이 있다. 방금 전에 타이거의 인터뷰 기사가 떴는데 벌써 기자들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때문에 골프장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필상이 모모코를 데리고 얼른 숙소로 이동하는데 이 대표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둘러 일본으로 오겠다고 했다.

이미 그녀도 급박하게 사태를 파악한 것 같았고 오늘은 회피하지만 내일 대회가 끝나면 필상도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다.

기왕이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이 대표의 생각을 듣고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 * *

드디어 JGTO 개막전 최종일 아침이 밝았다.

어제 저녁에 이미 이 대표가 각 언론사에 연락해 대회가 끝난 뒤 공식 인터뷰를 하겠노라 밝혔음에도 클럽하우스에 나타난 필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기자들이 많았다.

직접 다가와 대답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뭐라도 건지려는 집요한 눈빛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투어프로로서 경기에만 신경 써도 모자랄 판에 너무 과도한 행동이 아닌가 싶었으나 밝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같잖은 거드름을 피우던 과거의 그 누구와는 다른 언론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제 실속만 챙기던 옛 직장의 사장은 언론마저도 돈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 그런 성과를 낸 적도 있다.

‘언론도 아주 거대한 권력이지!’

때로 강압적인 힘보다 무서운 것이 펜이다.

필요에 따라 본질을 호도하고 명백한 사실도 무마시키며 없던 일도 그럴싸하게 포장해 사람들의 인식을 뒤흔든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했던 이들을 버리는 것은 물론, 범법자로 만든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그는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언론이 쉴드를 치고 대형 로펌이 나서 재판을 원하는 대로 주무르는데 가진 것 없는 시민은 당할 도리가 없었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남의 등골을 빼먹고 있을 게 분명했다. 사악한 본성이 어디 가지 않을 테니.

“성호야. 아이언 거리 다시 한 번 체크해 보자.”

“네. 어제 보니까 첫날과 또 다른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연습을 실천처럼 했지만 막상 대회에 임하면 거리가 제멋대로 춤을 춘다. 그게 다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내력이 급상승한 뒤로 일관성이 예전만 못했다.

그 대신 보다 감각에 의존한 스윙을 해 왔는데 어제 후반부터 샷이 안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문제는 그 느낌이 아직 유지되는지, 그렇다면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자신의 스윙을 어린 선수들이 모델로 삼는다는 말을 인지한 뒤로 끝없이 뻗치던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다소 수그러들었던 것이다.

“피칭이 160야드로 돌아왔어요!”

“70% 정도의 힘으로 컨트롤하니까 그렇게 잡히네.”

전에는 80%의 힘을 써야만 했다. 그렇다면 확실히 가용한 힘의 용량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전 약하게 치면 방향성이 더 불안하던데, 그렇지 않나요?”

“그건 컨트롤 샷의 의미를 혼동한 거지. 약하게 치는 것과 부드럽게 치는 것은 달라. 약하게 치려고 갑자기 스윙 스피드를 줄이면 정타를 낼 수가 없지. 약하게 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부드럽게 친다고 생각해야 해. 그래야 컨트롤이 되지.”

“전체적인 스윙 템포를 부드럽게 가져가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지. 하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드러움은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없어. 그럴 때는 클럽을 바꾸거나 공략을 수정해야지.”

마치 레슨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비법을 가르쳤다.

통제 가능한 부드러움, 그 이미지를 정확히 그리고 자신감 있게 휘두르기 때문에 간결한 스윙이 나오는 것이다.

갑자기 전신에 힘이 휘몰아쳐 샷을 컨트롤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기를 포기했었다. 이후 자신만의 스윙을 찾으려 노력했고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답은 결국 시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정한 길을 수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소 감각에 의존하는 변칙적인 샷을 하면서 스윙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것은 큰 성과였기 때문이다.

추후 꼭 필요한 경우에는 안정적인 샷을 할 수 있도록 대비함으로써 더 완벽한 경기 운영을 할 수 있다면 필드는 자신을 위한 무대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이스 샷!”

필상은 챔피언 조 아너로 나서 첫 티샷부터 유감없는 장타를 날렸다. 평상시에는 파 5로 운영되는 홀을 475야드의 파 4로 조정했기 때문에 마음껏 때려도 상관이 없었다.

다만 우측으로 굽은 레이아웃이라 랜딩 지역 우측에 파 놓은 벙커가 위협적이었으나, 캐리가 330야드를 넘은 필상의 타구는 비웃는 듯이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구르는 공이 어디에 멈추는지 쳐다보느라 갤러리들은 목을 길게 빼기에 바빴다.

차원이 다른 장타였다.

이런 엄청난 장타자를 반쪽 선수라고 놀렸던 자들이 도리어 남들보다 크게 칭송한다는 점이 아이러니였다.

-우우! 이젠 때렸다 하면 350야드를 넘네요!

-정확히 352야드입니다. 이런 긴 전장에서 웨지로 세컨샷을 해도 된다는 겁니다. 하하하.

-그나마 안전하게 날린 거죠?

-그렇습니다. 마음먹고 강하게 치면 380야드도 충분한 파워풀한 스윙, 가히 세계 최고의 장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러네요. 평균 비거리가 320야드를 넘는 선수가 있지만 우리 공 프로와 비교하면 너무 차이가 현격한 거죠.

-물론 장타가 골프의 모든 것은 아니며 장타의 함정에 빠져 오히려 경기력이 나빠진 프로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Mr. 퍼펙트라는 닉네임을 받은 정확성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유수의 선수들이 우리 공 프로라면 엄지를 치켜드는 거죠.

-미켈슨에 이어 타이거 우즈도 차세대 황제의 자리는 우리 공 프로의 것이 될 거라고 했다지 않습니까. 하하하.

두 선수는 사업 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왜 한국 출신의 신예 선수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느냐고 물었을 때, 둘의 공통된 의견이 나왔다.

머잖은 날에 자신을 능가할 슈퍼스타가 탄생할 것이라고.

극적인 데뷔를 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하다고 믿기 싫었던 기자들이 연거푸 부정적인 의견을 도출하려고 노력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타이거가 말하길, 지금은 자신이나 미켈슨이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곧 역전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아시아 시장을 무시하는 PGA의 태도는 필히 개선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125야드. 뭐 드려요?”

“샌드 가자.”

“핀이 고지에 꽂혀서 그냥 팍 세우면 좋을 것 같아요.”

“오케이!”

포대 그린이다. 그런데 좌측 후면의 고지 위에 깃대를 꽂아 놔 그린 중앙을 보는 것이 적절했다.

핀을 바로 보다가 조금이라도 길면 그린을 오버해 굴러 내려갈 세팅이다. 하지만 필상은 물론 성호도 최고의 결과만 염두에 뒀다.

안전한 선택을 권하는 게 캐디의 본분이지만 최근 최고의 샷 컨디션을 보이는 필상은 어떤 샷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대신 필상이 어떻게 공략하는지 지켜보는 성호의 눈빛에는 약간의 긴장과 더불어 진지한 탐구열도 엿보였다.

“우와아아아!”

타구가 순식간에 창공으로 치솟아 정신을 차리지 않은 이들은 공의 궤적을 놓칠 만큼 강한 임팩트가 이뤄졌다.

적당한 탄도에 스핀을 걸어 멈출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린 앞으로 굴러 내려올 수도 있다고 판단한 필상은 굉장히 높은 탄도에서 그냥 떨어뜨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말이 쉽지, 그렇게 높은 탄도로 거리를 정확히 맞추는 것은 프로에게도 쉬운 샷은 아니다. 때문에 타구를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에는 기대감이 가득 맺혔다.

통상적이지 않은 시도였으며 이런 샷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직관의 묘미이기 때문이다.

퍽!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지만 일부 팬들은 그냥 홀컵에 박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제 낙하지점은 20cm 뒤였다.

아무리 잔디가 덮인 그린이라도 떨어지는 충격을 모두 흡수하지는 못했고 뭉툭한 디봇 자국을 남긴 공은 크게 튀었다.

문제는 그 공의 방향인데, 특이하게도 앞이나 뒤로도 움직이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다시 떨어졌다.

그리고는 잔잔하게 몇 번 퉁퉁 거렸으나 공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그린을 오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건만 대부분의 팬들은 오히려 스핀이 먹지 않아 샷 이글이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날아간 거리보다 더 높이 떠올랐던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무려 134야드를 떴다고 뜹니다. 보통 선수들의 드라이브 샷 탄도보다도 높았습니다.

-요즘은 레이더 추적 기술을 골프에 활용한 다양한 정보가 제공되어 보다 분석적으로 관전할 수가 있더군요.

-탄도와 거리, 스피드, 하다못해 스핀 양까지 측정되기 때문에 프로들이 자신의 데이터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합니다. 그래서 샷을 교정하기가 훨씬 쉬워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야구나 축구, 육상 같은 부문에서도 과학적인 분석이 상당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특히나 메이저리그를 관전하다 보면 별의별 것이 다 제공되더군요.

필상도 늘 연습할 때마다 샷을 녹화하고 데이터를 수집, 분석한다. 덴마크의 한 회사가 제공하는 특별한 서비스를 후원사를 통해 제공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떤 과학도 인간의 모든 것을 분석하지는 못한다. 결과에 대한 데이터만 제공할 뿐, 어떤 샷이 최선인지는 선수가 직접 판단하고 시행하는 것이다.

상당 부분을 감각에 의지한 채로.

이번 샷만 해도 얼마나 높이 띄울지, 스핀은 어느 정도나 걸지, 수치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스윙을 한 것이 아니다.

스핀 없이 높이 띄울수록 좋다는 생각을 했고 평상시 연습한 자신의 감각을 믿고 과감하게 때렸을 뿐이다.

타앙!

동반자들이 그린 주변에서 숏 게임을 준비하는 사이, 필상은 가볍게 탭인 버디를 낚아 내고 뒤로 물러섰다.

핸디캡이 높은 홀은 아니지만 최종 라운드의 긴장감과 난해한 핀 세팅 때문에 버디가 잘 나오지 않는 홀이다. 그러나 너무도 쉽게 버디를 낚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근간은 역시 장타에서 출발했다.

다른 선수들은 일단 랜딩 지역에 설치한 위험 요소를 피하기 위한 관문을 건너야 하지만 필상은 그 부담부터 없었다.

게다가 차원이 다른 완벽한 세컨샷, 2번의 굿 샷이 나오고도 버디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까딱하면 10타 차 이상 벌어지겠어요.”

“그럼 좀 더 안전하게 쳐 볼까?”

“아예 연습을 하려는 거죠?”

“눈치는 빨라가지고!”

“너무 티 나게 하지는 마세요. 다 형님의 신기한 샷을 보러 온 사람들인데, 뭐라도 보여 줘야죠.”

“안전한 공략, 그게 가장 좋은 거야. 아마추어들에게 어떻게 쳐야 하는지 가장 모범적인 답은 역시 인내심이거든.”

“하기야 그렇기는 하네요.”

아마추어들이 자신의 핸디캡을 줄이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필요 이상의 모험을 너무 자주 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샷을 가다듬은 프로들도 감행하지 않는 극히 낮은 가능성에 목을 맨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고 그런 불안감 때문에 제대로 된 스윙을 하지 못하는 데도 말이다.

가장 비근한 예가 바로 파 5홀에서의 세컨샷이다.

2온을 노릴 수 있는 거리가 남았다면 그나마 우드를 잡는 걸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3번 우드로 보낼 수 있는 거리보다 더 남았는데도 무조건 우드를 요구한다.

자신은 우드 샷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웬만한 프로들에게도 쉽지 않은 클럽이 바로 우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나 최고의 결과만 상상하다가 산에 오르기도 하고 물가를 기웃거리며 로스트볼을 찾아 헤맨다.

잘라 갈 줄 모르는 아마추어는 베스트 스코어를 기록해 의기양양한 바로 다음 날 충격의 라운드를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오늘은 중계방송이 좀 맹숭맹숭하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 프로의 스윙이 지난 3일과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걸 못 느끼십니까?

-완전 실감하고 있죠. 오늘은 거의 작년과 같은 안정된 플레이를 이어가고 있네요. 이미 우승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팬들을 위해 보다 환상적인 샷을 보여 주면 안 되나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지만 공 프로는 지금 골프에서 가장 힘든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겁니다. 바로 안정된 스윙과 착실하게 타수를 줄이는 공략, 무엇이 더 필요하죠?

-가슴이 시원하게 뚫릴 특유의 장타 없이 아이언만으로 핀에 붙이는 것은 원래 잘하던 거잖습니까!

허 해설이 아무리 강조해도 캐스터는 좀처럼 자신의 욕구를 감추지 않았다. 왜냐면 필상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보다 흥미로운 경기를 연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상은 끝까지 그의 바람에 호응하지 않았다.

착실하게 전반에 4타, 후반에 4타를 줄여 이번 대회 18홀 최저타를 기록했음에도 그게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마지막 버디 퍼팅을 집어넣고 우승을 확정지었음에도 너무도 당연한 듯 감흥 없는 축하와 박수만 쏟아질 뿐이었다.

모모코가 달려 나와 함께 포옹하며 우승을 자축하는 모습은 이미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경기 후 필상의 인터뷰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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