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남아나는 것이 없다.
필상은 2라운드도 불꽃 샷을 선보였다.
버디 7개에 이글을 2개나 잡았지만 오늘은 보기 2개, 더블보기도 하나 그렸다. 그래도 -7, 예선 -14를 기록한 필상은 5타차 단독 선두로 우뚝 섰다.
어제 오늘 시끄러웠던 스윙의 변화에 대한 우려를 깔끔하게 씻어 내는 성적이었다. 물론 본인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이런 변화도 적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솔직히 좀 불안했어요.”
“이해해.”
“그런데 오빠, 대체 왜 그런 변화를 시도하는 거죠?”
가장 가까운 모모코도 그런 의문을 가지는 걸 보면 다른 이들의 왈가왈부도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최정상을 밟았던 스윙, 특별한 이유도 없이 변화를 꾀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아내에게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전과 같은 스윙이 안 돼.”
“그날 기권한 것과 관련이 있나요?”
“응. 그날부터 나타난 새로운 증상이지. 내 속에 강한 힘이 생겼는데 그걸 완벽하게 조절하지 못하면서 결국 피치 못한 선택을 한 거야.”
“아!”
어쩌면 가야 할 길을 인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가장 표준적인 스윙을 익히려고 노력하고, 자신도 그런 과정을 밟아 큰 성공을 거뒀지만, 더는 그 방식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혹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다듬으면 못할 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정답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정상을 밟았다는 교만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 기회를 통해 자신만의 골프를 정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다만 모모코는 그래도 걱정스러운 것 같았다.
“변칙적인 그 스윙이 혹시 몸에 무리를 주는 건 아니죠?”
“하하. 오히려 내 몸을 자유롭게 하지.”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정말.”
사실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떻게 쳐야 한다는 강박이 없다. 그저 몸이 원하는 대로, 느낌대로 때린다.
그게 기존의 스윙과 다르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어이없는 실수가 나올 때가 바로 그런 망설임의 순간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지만 마음의 번민이 일면 여지없이 샷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쳤다.
* * *
-이 대회가 토켄 타도 CC에서 개최된 게 16번입니다. 올해 17회를 맞이하는데 그동안 최저타가 몇 타인지 아십니까?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으십니까! 당황스럽지만 제가 알기로 한 자릿수 언더파 우승이 더 많지 않았나요?
-학교 다닐 때 시험 성적이 좋으셨죠? 아마도 제 질문의 의도를 잘 파악한 것 같은데, 사실이 그렇습니다. 다만 3년 전 양 웬총이 -16을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아하! 바로 지금 공 프로의 성적과 같군요.
-네. 날씨도 사나운데 전반을 마친 현재 공 프로가 그 기록을 달성한 겁니다. 다른 코스에서 나왔던 이 대회 최저타 우승 기록도 갈아 치울 기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내일 비 소식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필상은 -21이라는 스코어를 무조건 넘어설 것 같다는 느낌을 줬다. 비록 가끔 미스 샷이 나오지만 모두들 타수를 줄이기는커녕 잃고 있는 상황인데도 필상은 공격 앞으로였기 때문이다.
바람이 강한데도 탄도 높은 샷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바람이 마치 그를 돕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와! 바람이 공을 날라다 주네요!”
“좀 더 띄웠어야 하는데 아쉽네.”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 그린에 올린 것만 해도 다들 뒤로 넘어갑니다. 그만 좀 해요.”
15번 홀은 367야드 파4 홀이었다.
평소라면 원 온을 노릴 거리지만 오늘은 드로우 성 맞바람이 불어 탄도가 제법 높았던 타구는 그린 좌측 앞에 놓인 벙커에 빠졌다.
문제는 너무 가파르게 떨어지는 바람에 심각한 에그 플라이가 났다는 것이다. 게다가 높은 턱에 바짝 붙어 있어서 퍼 올려 그린에만 올려놔도 박수가 쏟아질 상태였다.
하지만 클럽페이스를 완전히 개방한 필상은 강하게 때렸다. 정상적인 샷이었다면 샌드웨지로 140야드는 날아갈 힘이었다.
그런데 듬뿍 퍼낸 모래 사이로 하얀 공이 빛을 발하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떠올랐다. 겨우 그린에 올라가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람을 타고 깃대 방향으로 떨어진 것이다.
예상보다 훨씬 잘 붙은 공인데도 더 띄우지 못한 아쉬움을 표하는 필상을 보자 성호는 얄미웠던 모양이다.
-뭘 하는 거죠?
-그린의 경사와 바람도 감지하는 것 같습니다.
-저렇게 라이 근처에 서서 눈을 감고 있으면 그걸 느낄 수 있나요?
-선수들마다 다르지만 퍼팅한 공이 바람의 영향을 받는 것까지 주의하는 걸 보면 멋진 퍼팅이 나올 것 같습니다.
더 붙이지 못한 걸 아쉬워한 이유가 퍼팅 라이가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좌측 세 컵을 봐야 하는데 그린 위의 바람은 더 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려고 감각을 집중시켰다.
‘반 컵?’
안 들어가도 좋다는 생각 따위는 잊었다.
반드시 넣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자 생각보다 더 봐야 한다는 느낌이 왔고 필상은 과감한 퍼팅 스트로크를 감행했다.
터무니없이 많이 본 것 같았지만 라인을 타고 구르던 공은 홀컵 앞에서 돌연 급격하게 꺾이며 지상에서 사라졌다.
짜릿한 쾌감과 함께 절로 쥐어진 주먹을 힘차게 휘두르는 모습에 긴장한 채 주변을 에워 쌓던 팬들의 뜨거운 함성이 그린 주변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 입을 삐죽 내밀던 성호도 극한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는지 하이파이브를 청하며 빙긋이 웃었다.
“진짜 미치겠네요!”
“바람이 영향을 미칠 것 같더라고.”
“그게 느껴지다니, 인간이 아닌 건 확실해요!”
“이제 그런 멘트는 좀 그만하지?”
“알았어요. 하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건 맞잖아요.”
“그렇지 않아. 얼마나 간절한지가 문제지, 인간의 의지는 때때로 놀라울 정도로 대단하게 작용하거든.”
“아! 이럴 때 보면 저도 현역으로 뛰고 싶다니까요.”
“못할 것도 없지. 내가 봐도 네 실력은 캐디만 하기에는 아까운 면이 없지 않아.”
“에이……. 그래도 만족하고 살려고요.”
필상은 농담을 한 게 아니다.
실제 성호는 좋은 자질을 타고났다. 체구가 다소 육중하지만 굉장히 유연한 몸을 지녔고 보기 드문 파워도 갖췄다.
모질지 못한 성격이 흠이지만 그동안 필상과 함께 여러 경험을 공유하며 골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커졌고 꾸준하게 연습한 결과, 당장 투어를 뛰어도 경쟁력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막상 필상이 권하자 꽁무니를 뺐다.
녀석이 가장 훌륭한 캐디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캐디의 전문적인 역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필상은 녀석의 부족한 부분보다 장점이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보다 편한 동반자라는 것이다. 필상의 수입 증가에 따라 벌이가 좋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어려서부터 꿈꾸던 일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늘 미안했다.
“성호야. 네가 의욕을 가지고 투어를 뛰겠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줄게.”
“생각해 볼게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듯 보이지만, 그의 음성에는 기대했던 자신감이 비치지 않아 못내 아쉬웠다.
필상과 함께 다니며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절감한 것 같았고 또한 스스로의 한계도 절감한 것으로 보인다.
수없이 많은 순간, 필상이 이룩한 영광을 함께하며 왜 욕심이 나지 않았겠는가!
본인도 필상과 같은 꿈을 더 오랫동안 꾸어 왔기에 그 가능성에 대해 수없이 고심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바람이 현실의 안주에 가로막혔다면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아직 필상보다 5살이 어리기 때문에 결코 늦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뒷바람이 부는 것 같은데, 오늘 거리가 얼마나 되지?”
“182야드에요.”
“9번 아이언.”
“그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부나요?”
“응. 긴 것보다는 짧은 게 나을 것 같아서.”
9번 아이언은 평소 170야드에 맞춰 연습해 놨다.
숏 아이언은 늘 컨트롤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비거리의 폭이 큰 편이다. 하지만 넓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파3 홀에서 선수의 심리는 위축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필상은 달랐다. 걱정이나 두려움 따위는 한 치도 보이지 않았다. 벙커에 붙은 깃대보다 더 좌측을 겨냥한 이유는 그린의 경사 때문으로 보였다.
쉬익!
모처럼 간결한 스윙이 나왔다.
부드럽게 테이크 백을 하는 것 같더니 백스윙 탑에서 잠시 숨을 고른 클럽헤드가 정조준한 표적을 향하듯 쏘아졌다.
느낌이 좋았는지 샷을 마친 필상은 바로 티 그라운드를 내려왔다. 타구가 어디에 떨어지는지 보지도 않았다.
“굿 샷!”
“붙었냐?”
“네. 핀으로 향해요!”
그제야 성호에게 클럽을 건넨 필상도 그린을 쳐다봤다. 제대로 떨어져 그린 경사를 탄다면 버디 기회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우와아아아!”
들어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타구가 조금 강했는지 라이를 덜 먹은 공은 홀컵 좌측을 스치고 지나 2m 거리에 멈췄다.
코스 세팅이 쉽지 않을뿐더러 좌측의 벙커가 두려워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린 중앙을 겨냥해 우측에서 롱 퍼팅을 했다.
물론 앞선 60여 명의 선수 중에 버디다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 1명만 기가 막힌 롱 퍼팅에 성공했을 뿐, 필상처럼 제대로 공략해 버디 기회를 만든 선수는 없었다.
-군계일학이라는 표현이 떠오르네요. 하하하!
-이번 샷은 아주 깔끔했습니다. 마치 작년도 일본오픈이나 JT컵에서처럼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그런 스윙이었습니다.
-아! 늘 변칙적인 스윙을 하는 건 아니군요?
-하하. 변칙적인 스윙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물론 배우는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권장하는 바람직한 스윙은 있지만 그게 정답은 아닙니다. 본인이 원하는 곳에 정확히 보낼 수 있는 스윙, 그게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 맞는 스윙이라고 보면 되나요?
-그렇습니다. 아마추어들이 프로의 스윙을 똑같이 따라 한다고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프로들도 그런 점을 간과한 레슨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거죠.
필상에게 걸리면 남아나는 것이 없다.
기회라고 생각했을 때, 반드시 결과를 만들 수 있어야 강자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필상처럼 기회에 강한 선수도 없다.
하필 2번의 실패가 모두 매치플레이에서 나왔기 때문에 혹시 일대일 대결에 징크스가 있는 게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억측이다.
필상과 함께 경기를 펼친 선수들은 대체적으로 말을 아끼는데, 최근 극심한 침체기에 빠진 매킬로이가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 대표적이다.
‘미스터 퍼펙트는 강합니다. 정말 강한 선수입니다.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보이는 평정심과 극도의 절제력, 그를 루키라고 무시했던 저는 그에게 받은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 인터뷰 말미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말을 사용했다.
타이거와 미켈슨의 시대가 지나고 나타난 젊은 고수 중에 내로라하는 대표 주자인 그가 ‘도전’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 말이 많았다.
그래 봐야 2승이고 마지막 대회에서는 기권한 것을 들먹이며 알량한 밑천이 드러날까 두려워 미국에 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궂은 날씨에도 5타를 줄여 중간 합산 -19를 기록한 필상은 2위와 9타차의 현격한 격차를 보이며 JGTO 개막전부터 자신의 시대가 활짝 개화되었음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오빠. 이것 좀 봐요.”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 필상에게 모모코는 기사 하나가 열린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좋은 경기를 축하하는 팬들의 뜨거운 박수가 이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모르지 않을 텐데.
“잠깐만.”
일단 필상은 그녀를 끌어당겨 왼팔로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손을 내민 팬들의 하이파이브에 호응하며 걸었다.
물론 궁금했기에 그 내용을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슨 기사인데?”
“미켈슨이 인터뷰에서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나 봐요.”
“우리 TPK?”
“네. 타이거 우즈랑 오빠와 함께 골프 사업을 시작한다고 밝혔어요.”
“잘됐네.”
“어? 이게 다 전략이었어요?”
“그건 아닌데, 곧 법적인 절차가 끝날 거니까 슬슬 바람을 일으킬 때도 됐지.”
모든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필과 타이거는 이미 본인들의 몫을 입금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 일체 필상에게 일임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 연락을 주고받지만 만날 수 없는 처지라서 안부를 묻거나 최근 근황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룰 뿐이었다.
물론 곧 법적인 절차가 마무리되면 전격적인 오픈 행사를 열기로 했다. 주 사업 영역이 아시아 시장이기 때문에 미국과는 당장은 무관하지만 미국발 기사의 파워를 고려하면 미리 군불을 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기사의 논조는 어때?”
“다들 경악하죠. 타이거와 필이 함께 뭔가를 도모하는 것부터가 관심을 끄는 화제니까요.”
“내 이야기는 별로 없는가 보네?”
“네. 그 스타일 이미 잘 알잖아요. 항상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우리 필 오빠. 크크크.”
“타이거 형이 한 마디 보태면 더 큰 불이 붙겠어.”
아니나 다를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필상의 바람이 이미 실현되어 있었다. PGA 대회에 미켈슨과 함께 참석하고 있던 타이거를 찾아가 사실을 확인한 기자에게 그는 보다 많은 것들을 확인시켜 줬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