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나만의 골프
“흑돈아. 그린 뒤가 낮으면 짧게 쳐서 굴리는 게 과연 나은 선택일까?”
“길게 쳐서 그린을 훅 벗어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난 일단 길게 쳐도 그린을 벗어나지 않을 자신이 있고 이 거리에서는 굴리는 것보다 당기는 것이 훨씬 수월해.”
굴리는 것이 힘을 조절하기 어렵다는 것은 성호도 동의한다. 그러나 장담한 것처럼 길게 치면서도 그린을 벗어나지 않게 거리를 맞추는 것은 실전심리상 어렵다.
하지만 스핀을 먹이는 것이 오히려 필상에게 수월한 기술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통상적이지 않은 필상의 공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쉭!
60도 웨지는 여간해서는 잘 쓰지 않는다.
지금처럼 탄도를 높이는 로브 샷을 쓸 때나 가끔 활용하지만 페이스가 누웠기 때문에 공과 접촉하는 면이 좁다.
그래서 실수가 빈번한 클럽인데도 오픈 스탠스에 클럽을 짧게 잡은 필상은 일고의 염려도 없는 과감한 샷을 구사했다.
너무 강하게 치는 게 아닌지 가슴이 철렁했지만 가파르게 하늘로 치솟는 타구를 보자 고개를 쳐들기에 바빴다.
바람이 강한 날이었다면 필상은 절대 이런 샷을 구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툭!
핀에서 그린 뒤의 프린지까지 공간은 5야드다.
필상이 50야드 샷 거리를 맞추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너무 높게 치솟은 타구는 너무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공은 필상이 장담한 대로 깃대 뒤 3야드 지점에 떨어지더니 크게 튀어 올랐다. 그런데 다시 내려선 지점은 놀랍게도 제자리였다.
자신이 만든 마크에 다시 떨어져서 얼마나 강한 백스핀이 먹었는지를 짐작케 했다. 절로 침이 넘어가는 그 순간, 그린에 닿은 공은 마치 빨대로 콜라를 빨아 마시듯 쪽 빨려 왔다.
“우우우우!”
그냥 쏙 들어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홀컵 앞에서 살짝 라이를 먹은 공은 약이라도 올리듯이 10cm 옆에 우뚝 멈췄다.
묘기에 가까운 환상적인 로브 샷에 엄청난 응원의 함성이 사방에서 터졌다. 필상은 평소와 달리 손을 들어 감사를 표했고 성호를 향해 씩 웃었다.
마치 시험 잘 본 성적표를 보여 주는 아이 같아 성호는 어이가 없었다. 과연 이런 모험적인 샷을 할 필요가 있었는지 아직도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 그의 기량이라면 굴려서도 얼마든지 버디 기회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기가 막힌 로브 샷이네요!
-이번 스윙도 그다지 예쁘지는 않았습니다. 굴려도 되는 샷을 띄우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높이 띄워야 스핀을 먹일 수 있나요? 적당히 띄워서 세워도 됩니다.
-그래도 팬들을 위해 멋진 스윙을 보여 줬는데 칭찬이라도 한 마디 해 주시죠. 하하하.
캐스터는 그나마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해설자는 칭찬은커녕 필상의 스윙에 대해 잔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간결한 스윙은 아니었다.
테이크백이 업라이트하게 올라갔으며 스윙 아크가 상당히 컸다. 실수의 여지가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좋았다는 것인데 그건 애써 모른 척했다.
“443야드?”
“네. 이번에도 바로 질러가실 겁니까?”
“아니. 페이드 샷을 구사해 보려고.”
앞선 10번 홀은 필상이 쉽게 버디를 잡았지만 지난해 평균 타수가 4.319나 나온 핸디캡 3번째 홀이다. 그러나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호수 안에 아일랜드로 티 박스를 조성한 11번 홀은 더 난해한 홀이다.
우측으로 서서히 휘는 도그렉 홀로 거리도 길뿐더러 티샷 랜딩 지역 좌우에 벙커는 물론 나무가 튀어나와 평균 타수가 4.416이 기록된 핸디캡 1번이다.
그런데 필상은 거침이 없었다.
드라이브 샷 캐리가 290이상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다들 선택의 기로에 서지만 다시 한 번 힘차게 휘두른 필상의 티샷 타구는 그런 위험 요소들을 비웃듯 지나가 버렸다.
“굿 샷!”
“퍼펙트 티샷!”
페이드 구질은 드로우에 비해 비거리가 짧다.
그런데도 부드럽게 홀의 모양을 따라 휜 타구는 캐리만 무려 357야드를 찍었다. 잘 믿기지 않는 수치지만 공이 376야드에 멈춰 섰으니 할 말이 없었다.
-이번 드라이브 티샷도 좀 이상합니다. 페이드를 치려면…….
-하하하. 그만하시죠! 페어웨이 정중앙을 잘 지킨 샷인데 스윙이 이상하다고 계속 말씀하시면 다른 선수들은 뭐가 되나요?
-네?
-교과서에 나옴직한 예쁜 스윙을 하고도 벙커에 빠지고 나무숲에 들어가는 선수가 숱하지 않았습니까!
해설위원 아베는 벌게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 겨우 몇 번의 샷만 봤기 때문에 곧 자신의 주장이 증명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PD의 표정이 영 못마땅해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투어프로 출신이고 그래도 나름 전문가인데, 캐스터가 그렇게 치고 들어올 줄 몰랐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은 더 있었다.
필상은 지난해 JGTO 7승을 거둬 독보적인 인상을 남겼고 PGA 데뷔전을 비롯해 더 플레이어스까지 휘어잡으며 자랑스러운 아시아인이 되었던 것이다.
필상의 국적이 비록 한국이지만 일본을 주 무대로 활약했고 개막전에 맞춰 들어온 것만으로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70야드 조금 못 미치는 것 같아요.”
“69야드. 네 생각은 어때?”
“왜요? 이번에는 점괘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어허! 다른 점괘는 나온다. 그렇게 들이대다가 한 방 맞게 될 거라는 거.”
“아, 알았어요. 포대 그린이라서 굴리는 건 좀 부정확하지 않을까요?”
“그래? 그럼 피칭.”
“아! 진짜!”
“창조적인 샷을 좀 생각해 봐. 아무도 하지 않는.”
“끄응!”
골프는 창조적인 사고보다는 안전하고 보수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파4 홀에서 파만 해도 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승하려면 언더를 쳐야 하지만 기회가 찾아왔을 때 타수를 줄이는 것이고 파를 근간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배운다.
마음처럼 쉽지 않은 게 골프고 좋지 못한 샷이 나오면 그 이유가 수만 가지라고 하지 않던가.
하다못해 한 달 전에 먹은 음식 탓도 하는 마당에 창조적인 샷, 그건 피치 못할 트러블 상황에서나 생각하는 것이다.
수많은 실패의 경험을 몸에 체득한 프로들은 안전한 샷을 위해 연습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필상도 그렇게 믿고 정진한 결과,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다.
타악!
피칭웨지가 만들어 낸 타격음은 경쾌했다.
펀치 샷에 가깝게 낮은 탄도로 가볍게 임팩트만 가했는데, 너무 강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 애매한 탄도로 날아가면 무조건 그린을 오버할 것 같았다.
하지만 타구는 포대 그린의 오르막 경사에 맞더니 크게 튀었다. 입사각과 반사각이 동일하다는 일반적인 이론이 통용되지 않은 것은 그 와중에도 스핀이 강하게 걸렸기 때문이다.
마치 경사 지점에서 로브 샷을 한 것처럼 뜬 공은 그린에 떨어졌고 또 다시 깃대를 향해 슬금슬금 굴러가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느린 이유는 아직도 피칭웨지로 때린 공에 백스핀이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아주 신기한 샷 아닌가요?
-정확한 탄착점을 잡은 것 같습니다. 투어프로라면 저 정도의 정확성은 갖추어야겠죠.
-연습과 실전은 다르지 않나요? 전 저런 샷을 성공하는 선수를 거의 보지 못한 것 같은데요.
-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어떨지 모르지만 미스터 퍼펙트는 확실히 스윙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좋게 표현하자면 형식에서 자유로워진 것이고 부정적으로 본다면 지나치게 제멋대로인 공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 제가 보기에도 흔히 볼 수 있는 교과서적인 스윙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왜 저는 공 프로가 편안해 보이죠?
백 나인에서 시작하는 선수들은 초반에 극히 조심스러운 경기를 펼친다. 통계가 의미하는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너무도 편하게 연속 버디를 잡았다.
혀를 내두를 무시무시한 장타가 기본이 되었지만 세컨샷의 정밀한 기술도 그에 못지않았다. 동반자들은 이미 의욕을 상실한 것 같았다.
370야드를 넘는 장타에 기가 죽었고 이어진 세컨샷도 흉내 내기 어려운 고급 기술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들도 작정하면 그런 공략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그런 기술을 너무도 편하게 펼치는 모습에 한 명은 +1, 다른 한 명은 +2를 기록하며 필상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허 위원님은 오늘 경기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평가하고 말고 할 게 있나요! 두 번의 큰 실수가 있었지만 공 프로는 마치 골프 쇼를 보여 주는 것 같은 놀라운 기량을 마음껏 뽐냈습니다.
-7언더로 단숨에 단독 1위로 나선 것은 정말 축하할 일이지만 전에는 실수가 극히 적었잖습니까! 멋진 샷도 머리에 남지만 전 엉뚱한 실수가 자꾸 께름칙합니다. 안전한 공략을 하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짧은 기간이지만 공 프로는 많은 것을 겪었습니다. 또한 흠 잡을 데 없는 스윙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가 잘 알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실험적인 샷이 그가 만들어 나갈 골프의 큰 밑그림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일본 중계진과 달리 한국 골프 채널 중계진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한 채 방송했다.
다들 필상의 건강을 걱정했기 때문인데, 오랜만에 필드에 서는 것이 상당한 부담일 것이라고 봤다. 기억된 마지막 모습이 그답지 않은 기권이었고 상당 기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상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새로운 시즌을 맞이한 필상의 스윙이 이전과는 너무도 확연하게 변했기 때문에 장타를 연속 날려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결과는 눈이 부셨다.
이글 하나, 버디 7개.
만약 미스 샷이 없어 보기를 2개나 범하지 않았다면 -9가 되었을 것이다. 공동 2위가 나란히 -5라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에 더 아쉬웠다.
“수고 많았어.”
“양 프로님. 오늘 컨디션이 좋아 보이시던데요?”
“그래도 어디 자네만 하겠나! 하하하.”
“전 요즘 골프를 새로 배우는 느낌입니다.”
“무슨 말인지 대충 알 것도 같아. 얼른 씻고 나와. 저녁은 내가 살 테니까.”
“네. 후딱 씻고 나오겠습니다.”
앞 조에서 경기한 양용은 프로가 필상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필상의 변화에 대한 조언 같은데 너무도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저녁 식사는 함께하지 못했다.
장인어른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양 프로는 흔쾌히 이해했고 내일 아침 연습장에서 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님.”
“여전히 자넨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
“경기를 보셨습니까?”
“그럼. 봤지.”
왔다면 당연히 모모코와 함께 있어야 할 장인이 보이지 않아 온지도 몰랐다. 모모코의 기색을 보건데, 둘 사이에 뭔가 또 꼬인 게 있는 것 같았다.
아이를 가진 딸과 오랜만에 만나 함께 사위의 경기를 보지 않은 걸 보면 좋은 일이 아님은 짐작이 됐다.
함께 식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저간의 사정이 드러났다.
“사업은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
“요즘 일이 잘 안 풀리십니까?”
“사업이라는 게 운과 시기가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그게 좀 엇나가더라고.”
“곧 잘될 겁니다.”
장인은 골프 용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물론 자신이 모든 걸 주도하는 것은 아니고 지분을 투자한 회사가 꽤나 안정적이라고 파악했는데, 최근 상황은 체크해 보지 못했다.
만약 사업이 잘되지 않았다면 딸인 모모코에게 도움을 청했을 테고, 모모코는 필상보다 부친을 더 신뢰하지 않기에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자네가 한 번 나서 주면 될 것도 같은데…….”
“아빠!”
본론을 꺼내려 하자 모모코가 강력히 제지하고 나섰다.
그녀는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반대했기 때문에 오늘 함께 경기를 관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필상은 모모코의 손을 잡아 일단 진정시키고 장인에게 경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들어 보니 대단한 것은 아니다.
골프웨어에 손을 댔는데, 광고 모델로 도와주리라 예상했던 모모코가 올 시즌 투어에 나서지 않는 바람에 기대했던 효과를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필상에게 서브 스폰서 계약을 원했고 기왕이면 광고 촬영도 나설 줄 것을 요청했다.
“제가 당연히 도와 드려야죠.”
“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말도 못 꺼내게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내 딸이 아니야!”
“아빠! 오빠는 이미 일본 내 의류 스폰서가 있다니까요. 아빠 회사와 계약하면 이중 계약으로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데, 푼돈으로 어떻게 그걸 감당하라는 말씀이세요!”
대놓고 말하자 장인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돈과 관련해서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음이 분명했다. 물론 장인의 사업이니 금전적인 부분과 상관없이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모모코가 적절한 수준에서 지원했고 이후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었다.
때문에 자르고 싶었지만 모모코와 자신의 입장은 다르다.
“제 분에 넘치는 사랑스러운 딸을 제게 주셨는데, 제가 그 정도 도움도 드리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역시! 자넨 내 아들이야! 딸보다 나은 아들. 허허허.”
왜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늘 허망한 꿈만 쫓으시며 가족들의 어려움은 고려하지 못한 무책임한 그분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필상은 그런 쓰라린 기억을 또다시 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면전에서 그럴 수는 없었을 뿐이다.
필상이 아는 바 어차피 사업의 주도권은 장인이 아닌 동업자 중에 한 명이 쥐고 있다. 그와 만나 담판을 지으면 된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