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44화 (144/354)

144. 창조적 파괴

-PGA를 발칵 뒤집고 귀국하신 후 두문불출하셨는데, 많은 팬들이 궁금해 합니다. 근황이나 입장을 좀 밝혀 주시죠.

“발칵 뒤집었다는 것이 더 플레이어스 우승을 말하는 건가요? 아님 기권한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오랜 만에 카메라 앞에 서서 그런지, 기권 후에 쏟아진 터무니없는 기사들에 지친 것인지 필상의 태도는 다소 격앙되었다.

그러자 오히려 질문했던 기자가 당황했다.

미국 언론이 어떻든지 한국 골프팬들의 입장은 너무도 확고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팬들은 필상을 적극 지지했다.

진정한 강자는 끌려 다니면 안 된다고.

-저는 공 프로님의 영원한 팬으로서 2승을 거둬 시드를 확보하고도 마스터즈를 비롯한 PGA 대회를 참가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여쭙는 겁니다.

“그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계 골프계를 주름 잡는 선수들의 기량을 직접 확인했고 그들과 당당히 겨룰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만의 리그가 그리 달갑지는 않았습니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자들의 편향된 사고는 개인의 선택과 자유마저 무시했고 PGA가 그런 자들이 차려놓은 밥상이라면 굳이 앉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PGA 대회는 참가하지 않으실 계획이란 말씀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게는 자격이 있고 꼭 필요한 대회는 출전해서 제 기량을 마음껏 뽐내고 싶습니다. 오로지 앞선 기량만이 진실로 다가갈 수 있는 문이라면 말입니다.”

필상의 말은 듣는 관점에 따라 곡해될 수도 있다.

그를 지지하는 팬이라면 아쉬워도 응원에 힘을 보탤 근거가 되겠지만 PGA 입장은 유쾌할 리가 없다.

사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새로운 변화에 두려움을 느끼거나 반감이 있을 수는 있지만 미스터 퍼펙트가 보여 준 탁월한 기량과 스타성은 골프계가 다시 한 번 시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또한 미켈슨과 타이거가 적극 지지하면서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었고 실제 필상의 실력을 인정하는 팬들도 많다.

하지만 꼬투리가 잡히자 다시 고개를 쳐든 어이없는 주장과 편견은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될 만했다.

그래도 필상이 꾸준히 대회에 참가해 실력을 보여 준다면 필요한 것은 오직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묘한 대치가 이뤄지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다.

-KPGA 개막전에 불참한 공 프로님이 이렇게 JGTO 개막전에 출전하기 위해 나서는 것에 대해 서운해하는 팬들이 있습니다. 입장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솔직한 제 심정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면 그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밝히는 바, 코리안 투어에 보다 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투어프로로서 생활은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씀은 상금이 적은 대회는 나가지 않겠다는 건가요?

“저는 올해 메이저급 대회 7개에 출전할 계획입니다.”

-7개라니요?

코리안 투어에는 메이저로 인정하는 대회가 5개다.

실제 메이저 대회라고 칭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상금 규모만 크다고 될 수는 없다. 역사와 전통, 그리고 골프계에 이바지한 영향력 등을 고려하는데 KPGA에는 아직 조건이 충족되는 대회가 없다.

GS칼텍스 매경오픈, SK텔레콤오픈, 코오롱 한국오픈, KPGA 선수권대회, 신한 동해오픈, 이 5개를 메이저 대회라고들 하는데 KLPGA처럼 성장을 거듭해 왔다면 총 상금액 최고의 자리를 개최한 지 3년밖에 되지 않는 제네시스 챔피언십에 내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필상이 추가한 2개 중에 하나는 그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전에 밝힌 대로 나이키가 새로운 대회를 창설한다고 했으니 그것도 염두에 뒀다.

그런데 필상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총상금 15억이 되지 않는 대회는 나가지 않을 겁니다.”

-현재 그 조건에 맞는 대회는 하나뿐이잖습니까! 제네시스 챔피언십.

“나이키가 주관하는 대회가 2개 열리는데, 최종전인 아시안 챔피언십은 총상금이 아시아 최대가 될 것입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과연 사실인지 확인이 필요했지만 개략적인 내용은 발표되었다. 한국, 일본, 태국에서 각기 나이키가 주관하는 시리즈 대회가 열리고 그 최종전을 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개최되고 아시아 대회 최대 규모라는 말은 2억 엔을 넘는다는 것이라서 기자들은 쉽게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말이 나온 김에 제안 드립니다. 기존 메이저급 대회로 인정받는 대회들은 흥행의 성공을 위해 보다 다각도의 노력을 경주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씀은 어떤 의미인지요?

“저는 손해 보는 사업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성공적인 대회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우리 팬들은 기꺼이 오른 입장료를 부담할 것이고 그게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시면 투자하고자 하는 서브 스폰서를 적극적으로 유치하십시오. 저라도 적극 돕겠습니다.”

-총상금 15억이면 일본 투어와 비교해도 그리 작은 대회는 아닌데, 그 계획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필 미켈슨과 타이거 우즈의 출전 약속도 받아 놨습니다. 초청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될 텐데, 어느 대회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두 선수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꿈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실제 그런 세계적인 선수를 한국으로 불러들이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게 사실이다.

그런데 비용 부담이 없다면 기존 12억을 15억으로 올리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흥행은 보장이 될 테니까.

기자들의 질문이 줄을 이었지만 필상은 시간이 없다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 인터뷰의 파장은 상당할 것 같았다.

“제가 너무 무리한 거는 아니죠?”

“네. 조금 더 조여야겠지만 팬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다면 나이키도 그 정도는 지원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TP의 출전은 이미 정해졌지만 그걸 잘 이용해서 꿈쩍하지 않는 주최 측에는 우리가 손을 먼저 내미세요.”

“그럴게요.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한국 오픈을 제외한 대회에는 TPK가 서브 스폰서로 참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3억 정도 투자하면 될까요?”

“네. 15억 이상 내거는 대회에 3억을 더하면 코리안 투어에 달려들 선수들이 꽤 많아지겠네요. 하하하.”

사실이 그렇다.

JGTO도 총상금 2억 엔 대회는 5개뿐이다.

단숨에 8개가 그에 근접하는 대회로 성장하면 경쟁은 치열해질 것이다. 굳이 외국 투어에 나가려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아시안 투어 선수들이 대시해 올 것이다.

또한 다른 대회들도 피치 못하게 상금 규모를 늘릴 가능성도 높다.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꼬이는 법이니까.

필상은 정말 오랜만에 일본 땅을 밟았다.

모모코와 나란히 나고야 공항에 나타나자 엄청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지난해 남녀 투어 상금왕 부부가 나란히 돌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토타임만 가졌고 인터뷰는 개막전이 끝난 뒤로 미뤘다. 일본 언론의 집요한 관심이 긍정적이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뒀고 평가는 나중에 바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느낌이 어때요?”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

“일본 골프 코스들이 아기자기하잖아요.”

모모코는 필상의 평가가 아주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녀도 한국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생각은 생각보다 훨씬 곱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서 그런 티를 내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 편견이 있다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행실을 각별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가족들이 한결같이 잘해 주지만 그래도 일본에 도착한 그녀의 마음은 푸근했다. 그런데 필상도 그렇게 말해 줘 고마웠다.

“숙소부터 가자.”

“추억을 새기려고 온천 여관을 잡았는데 괜찮죠?”

“그럼. 난 온천이 제일 좋더라. 하하하.”

필상과 모모코는 연애하는 기분으로 나고야의 첫날을 맞이했다. 당시를 생각하면 참으로 재미있었다.

자신도 그녀를 좋아했지만 언감생심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모모코는 서로 처지가 현격함에도 필상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고 급기야 자신의 남자로 만들었다.

그녀가 적극적이지 않았다면 필상은 홀로 자신의 길을 갔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마음은 애써 감춘 채.

이제 배가 제법 부른 그녀가 자신의 여자라는 것이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

* * *

까앙!

1라운드 필상은 10번 홀 마지막 조, 9시에 출발했다.

이번 대회에는 한국 국적을 가진 선수가 27명 참가해 132명의 출전 선수 중에 일본 다음으로 많다.

바로 앞 조에서 양용은 프로가 출발하는 모습에 응원의 구호를 외쳤던 필상은 첫 홀부터 강한 드라이브 샷을 날렸다.

442야드 파4 홀인데, 까마득히 떠오른 공은 떨어지는 것을 망각한 것 같았다.

-오우! 언제 떨어지나요?

-미스터 콩의 장타력이 빛을 발하는 샷입니다. 물론 아직 어디에 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오. 오. 오! 370야드를 훨씬 넘은 거 아닌가요?

갤러리들 사이에 선 모모코가 듣고 있는 일본 골프 채널 실시간 중계였다. 한국과는 달리 굉장히 요란하다.

그런 중계를 즐기는 팬들이 많다는 것인데, 분위기를 띄우는 데는 아주 그만이다. 때로는 편파적인 중계도 일삼아 모모코로서는 입맛이 쓰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지만 아직 한국 중계 방송을 이해하는 것은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도 좀 이상한 소리들을 해대고 있다.

화면은 보지 않고 음성 중계만 듣는데, 모모코가 보기엔 370이 아니라 390야드를 넘었기 때문이다. 분명 화면에는 정확한 거리가 나왔을 텐데 해설자는 말이 없었다.

“392야드 나갔습니다.”

“너무 힘을 아꼈나?”

“그런 소리하면 욕먹습니다. 아마 이 홀의 최장타 기록일 걸요?”

“그게 뭔 상관이야. 난 400야드를 보고 때렸다고!”

“형. 너무 스윙이 업라이트한데 괜찮겠어요?”

“아무렴 어때! 원하는 궤적과 거리만 나오면 되지.”

성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지만 실상 필상의 스윙은 최근 좀 이상해졌다.

전에는 빈틈을 찾고 싶어도 찾기 어려웠다. 녹화를 해 슬로우 모션으로 봐야 겨우 한 소리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지금 스윙은 참견할 소지가 너무 많았다.

‘질서를 따르는 자는 창조적인 파괴를 선도할 수 없어!’

물론 골프에서의 질서는 정확한 스윙 폼을 의미한다.

교과서적인 자세를 중시해 왔던 필상은 최근 내력의 급격한 변화를 겪은 뒤, 가장 중요하다고 믿던 것을 잃었다.

언제나 간결하고 깔끔하던 스윙이 거칠고 불규칙해진 것이다. 그걸 원상태로 돌리려고 사생결단의 의지로 달려들었다.

밤새 연습장의 조명을 켜고 하얗게 의지를 불태웠지만 불가능했다. 노력의 부족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혹사하던 필상은 급기야 내력이 역류해 긴급한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

그러다 문득, 왜 한 길만을 고집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긴 명상을 통해 깨달은 것이 보다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해서는 형식의 틀을 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샷의 일관성을 회복했다. 문제는 원하는 샷을 만들기 위해 스윙이 제멋대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비거리가 나왔지만 미스터 콩의 티샷 스윙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왜죠? 뭔가 문제가 보였나요?

해설위원의 말에 PD는 잽싸게 필상의 드라이브 스윙 장면을 리플레이 했다. 그런데 전문가가 아닌 캐스터가 봐도 뭔가 이상했다.

-인 아웃이 전혀 되지 않네요?

-그렇습니다. 키가 큰 것은 알지만 저렇게 가까이 서서 도끼질을 하듯이 퍼 올리는 스윙은 난생 처음 봅니다.

-그래도 결과는 아주 좋았잖습니까?

-그야 한 번의 결과일 뿐이지요. 다음에도 이런 샷을 하는지 좀 더 지켜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필상의 기존 스윙이 너무 이상적이었기에 더욱 눈에 띄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이 행운이었다는 논조였기에 동조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이렇든 저렇든 필상은 이미 세계가 주목하는 프로였기 때문이다. 일본 투어에서 데뷔했지만 순식간에 PGA 2승을 거두면서 JGTO에서 그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마스터즈에 출전권이 있음에도 거부한 필상이 같은 기간에 PGA 대회가 있음에도 일본 투어 개막전에 출전했다.

그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일인 것은 알지만 막상 일본 선수들과 겨룬다고 생각하자 다시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이다.

“완전히 일직선으로 날아와 50야드 남았어요.“

“60도 웨지.”

“홀을 그냥 노리려고요?”

“아니. 길게 쳐서 백스핀 먹일 거야!”

“뒤가 낮은데요?”

“그러니까!”

“으으……!”

조금이 아니라 많이 괴팍해졌다.

언제나 안전한 공략을 우선시하던 필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난번 매치플레이에서 기권하고 돌아온 뒤로 스윙은 물론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연습할 때, 쉽게 갈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늘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도전했다.

그게 다 연습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실전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났다. 하지만 말릴 수 없었다.

결과가 좋으니까!

그런데 실전이기 때문인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필상이 이번에는 나름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것은 곧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는 선전포고와 같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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