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42화 (142/354)

142. 어차피 승자는 한 명

“반갑습니다. 토미.”

“최근 가장 핫한 미스터 퍼펙트와 맞대결을 펼치게 되어 저도 영광입니다.”

말로는 영광 운운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결의가 가득했다.

어디서 갑자기 굴러들어 온 돌이 한창 잘나가는 자신의 명성마저 초라하게 만들고 일부 전문가들이 필상의 승리를 낙관한 것이 적개심을 불러온 것 같았다.

필상이 나타나는 순간, 자신을 향한 주목이 모두 사라졌으니 그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애써 감췄지만 세상을 초탈한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필상을 향한 경계심은 대단했다.

-토미 플리트우드. 어떤 선수죠?

-EUR에서 5승을 거둔 뒤, 2018년에 PGA로 건너와 2년 동안 2승을 거뒀고 톱 10에도 무려 11번이나 들었습니다. 랭킹이 말해 주듯이 굉장히 안정적인 샷을 구사하는 선수입니다.

-재작년 US 오픈에서 켑카에게 아깝게 1타 차로 2위를 했던 경기는 저도 봤습니다. 장발에 수염까지 길러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지만 고른 기량을 갖춘 선수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렇습니다. 조별 리그에서도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였음에도 예상 승률이 낮게 나온 것에 마음이 상했을 것 같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나란히 PGA 2승을 거뒀지만 공 프로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은 전인미답의 전설이잖습니까!

필상이 아너였다.

그 어느 때보다 기운이 넘친 필상은 연습장에서 확인한 결과 자신의 비거리가 한 클럽 이상 더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시합 도중에 비거리의 변화가 생기는 것은 절대 반가운 일이 아니다. 나름 최대한 정리는 했지만 불안 요소였다.

그래도 1번 홀은 비교적 위험 요소가 적고 투쟁심에 불타는 상대의 시선을 제압하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고 휘둘렀다.

그런데 임팩트가 되는 순간, 깨달았다.

이 홀이 394야드 전장이라는 것을.

“와아아아!”

자신이 의도한 샷은 360야드다.

하지만 힘이 잔뜩 실린 공이 그린을 오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좌측으로 휘는 레이아웃을 감안한 에이밍을 했어야 하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속사정을 알 리 없는 갤러리들은 미친 듯이 날아가는 타구에 하늘을 찌르는 함성을 질러 댔다. 착잡한 마음으로 타구를 바라보는데 성호의 음성이 들렸다.

“형 지금 풀스윙 한 거 아세요?”

“풀스윙?”

미처 그것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는데 가만히 복기해 본 필상은 왜 기대 이상의 임팩트가 터졌는지 이해했다.

-우우우! 저게 뭐죠?

-장타! 정말 엄청난 장타가 터졌습니다. 막창 나서 러프에 들어간 것은 좀 아쉽네요. 조금 더 좌측을 봤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파4 홀 1온 아닙니까?

-그린을 향했다면 오버했을 것 같습니다. 러프 때문에 공이 멈췄는데도 382야드가 나왔으니까요.

-어어어……. 이제 우리 공 프로 드라이브 비거리도 1위에 오르는가요?

-굉장한 장점이지만 장타는 지금처럼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길지도 않은 홀에서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할 것 같으면 길게 쳐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토미는 아예 3번 우드를 잡았다.

필상이 폭발적인 샷을 보여 줬지만 상관치 않았다.

272야드를 날리더니 남은 거리 102야드를 갭 웨지로 컨트롤해 그린에 올렸다. 본인이 의도한 만큼 붙지 못한 게 아쉬웠는지 들고 있던 클럽으로 괜히 바닥을 한 방 때렸다.

공은 이제 다시 필상에게로 넘어왔다.

러프지만 라이가 나쁘지는 않아 피칭으로 러닝 어프로치를 구사했다. 조금 약하다 싶었으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린 앞 페어웨이에 떨어진 타구가 포대 그린의 경사를 타넘어 그린에 오르더니 깃대를 향해 쭉쭉 굴러갔다.

“굿 샷!”

“퍼펙트 어프로치!”

필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의도한 만큼 치지 못했음에도 1.2m에 붙어 버디 기회가 주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내는 아무도 몰랐다.

러프에서 정확한 힘 조절을 보인 필상의 숏 게임에 너 나 할 것 없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형. 정리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가는 거죠?”

“응. 그래서 더 장타를 날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성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필상은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나마 짧은 클럽이 오차가 적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장타 모드로 돌변해야 할 것 같았다.

토미의 5m 퍼팅이 홀을 외면한 뒤, 필상은 가볍게 버디를 잡아 1업으로 앞섰다. 샷의 일관성은 떨어지지만 일단 선기를 잡았기 때문에 그걸 계속 살리는 게 중요했다.

-오늘 공 프로가 장타의 끝을 보여 주네요. 하하하.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시원시원한 샷에 팬들은 열광하지만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런트 나인에 4번이나 놓쳤습니다.

-그래도 파를 적어 내면서 아직 1업으로 앞서고 있잖아요. 우리 허 위원님, 너무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아요.

-정확하게 보셔야 합니다. 3홀을 이기고 2홀을 졌습니다. 우리 공 프로가 졌던 홀들은 하나같이 페어웨이를 놓친 경우였습니다.

-1번 홀은 러프에서 바짝 붙여 버디를 잡았잖아요.

-그 이후 러프에서의 샷이 어땠습니까? 하나같이 길었습니다! 어이없는 생크가 났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둘의 의견이 갈렸다.

시청자들이나 팬들도 같은 양상이었기에 서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게시판에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0번 홀 티샷이 1번 홀처럼 왼쪽으로 휜 레이아웃을 따라가지 못하고 다시 막창이 났다. 아무리 비거리에 자신이 있어도 벼랑을 타고 넘는 샷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문제는 공이 완전히 잠긴 헤비 러프라는 점이었다.

6번 홀에서 러프에 잠긴 샷을 하다가 힐에 맞아 엉뚱한 생크가 났던 필상은 집중했다. 질긴 풀을 헤치고 들어가 공을 쳐 내려면 강한 임팩트가 필요했다.

어차피 로프트가 56도인 샌드웨지를 들었기 때문에 그린에 올라간 공이 스핀을 먹으리라고 판단했다.

“볼! 볼!”

러프의 저항을 줄이려고 벙커 샷처럼 가파르게 들어 올려 정확한 임팩트를 만들었다. 하지만 공이 튀어 나가는 순간, 곁에 섰던 성호의 경고성 외침이 터졌다.

타구가 그린을 넘겨 반대편에 서 있던 갤러리들에게 날아갔던 것이다. 그나마 성호의 외침에 사람들이 주목한 덕에 공에 맞은 사람은 없었다.

아주머니 한 분이 들고 있던 가방에 맞은 공은 다시 러프에 떨어졌다. 너무 해괴한 미스 샷에 적잖이 당황했다.

-뭔가 꼬이는 것 같아요.

-오늘 샷이 전반적으로 강하고 깁니다. 스윙을 보면 그다지 문제점은 없어 보이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죠. 그러고 보면 갤러리들이 너무 그린 가까이에 서 있는 건 위험한 것 같아요.

-PGA에 데뷔한 선수라면 그만한 기량은 갖췄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도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선수가 샷을 할 때는 절대 한눈을 팔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홀을 놓치면 다시 올 스퀘어가 되는데, 어렵네요!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고 공 프로의 샷이 들쭉날쭉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제 생각에 몸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보다 더 장타를 팡팡 날리는데 그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허 위원은 필상의 플레이를 그렇게 분석했다.

골프는 일관성과의 싸움이다.

제반 여건을 확인한 후, 원하는 거리를 보내기 위해 적당한 클럽을 선택하고 정확한 방향으로 날려야 한다.

문제는 평소 연습을 통해 거리와 방향을 몸에 익히는데,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조절되지 않자 필상은 크게 낙심했다.

과연 이 상태로 시합을 지속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팬들의 기대, 또한 가족들의 염원을 생각하면 클럽을 놓을 수는 없는데 말이다.

‘집중하자. 집중!’

새로운 경지에 들어선 것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적응하지 못한 힘은 도리어 부담이었다. 지금처럼 전문성이 결여된 샷을 계속한다면 그건 발등을 찍는 일이다.

프로가 아마추어와 다를 게 없다면 존재 가치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번째 샷을 핀에 붙이지 못했다.

퍼팅은 자신이 있었지만 비슷한 거리에서 먼저 버디를 기록한 토미에게 올 스퀘어를 허용한 필상은 험난한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잠겼다.

“194야드에요.”

“8번.”

평소 8번 아이언을 180야드에 맞춰 놨다.

하지만 지금은 8번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그린에 떨어진 공이 후면의 벙커까지 기어들어 가자 할 말이 없었다. 갤러리들의 함성이 탄식으로 바뀔 때까지 기다린 필상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를 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정제되지 못한 기량으로 팬들의 앞에 서는 것은 실례다. 그린으로 향하는 필상에게 격려의 말들이 쏟아졌지만 필상은 벙커로 곧장 걸어 들어갔다.

“어?”

왜 클럽도 들지 않고 들어가는지 의문을 품던 팬들은 필상이 갑자기 공을 집는 모습에 비명을 터트렸다.

토미가 온 그린에 성공했지만 버디는 어렵다. 기가 막힌 벙커샷을 해 파 세이브를 한다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도 황당한 행동을 본 것이다.

-왜 그러죠?

-공 프로가 경기를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왜요? 이번 홀만 포기한 건 아닐까요?

-토미 플리트우드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는 걸 보세요.

-아! 이게 대체 뭐죠?

실로 허망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허 위원이 이미 필상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언질을 했지만 늘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었던 필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필상이 경기를 포기하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놀라기는 토미도 마찬가지였다.

힘들게 올 스퀘어를 만들고 이제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필상은 두려운 존재였다.

거침없는 장타에 환상적인 퍼팅, 물론 오늘따라 실수가 많은 점은 그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다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1번 홀에서 갑자기 경기를 포기한다면 악수를 청하자 기쁨보다는 당혹감이 먼저 들었다.

그런 그를 뒤로한 필상은 곧바로 인파속으로 들어갔다.

“엄마. 우리 이제 바람이나 쐬러 가요.”

“그래. 그러자꾸나.”

엄마는 전혀 실망한 기색이 아니셨다.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었는데 필상의 난감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시는 것 같았다.

“오빠. 괜찮아요?”

“응. 가족들이랑 놀러 갈 컨디션은 충분해. 하하하.”

그렇게 코스를 벗어났으나 몰려든 기자들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이 대표가 나서 제지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기자들의 집착을 막기는 어려워 보였다.

“대표님. 더도 말고 10분만 인터뷰하겠습니다.”

“들었죠? 질문 딱 10개만 받겠습니다. 미리 조율해 주세요.”

클럽하우스 앞 공터에서 졸지에 즉석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왜 경기를 포기했는지 그 의문을 푸는 것이 그들의 역할인 것을 인정하지만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경기를 포기한 이유부터 밝혀 주시죠?

“저를 사랑해 주시는 팬들에게 먼저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좋은 플레이로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지만 보시다시피 제 컨디션은 오늘 최악이었습니다.”

-투어프로가 컨디션이 안 좋다고 경기 중에 그냥 포기해도 되는 겁니까?

“혹시 제가 얼마나 망가지는지를 보고 싶으셨다면 그건 참 죄송하군요. 하지만 경기를 하고 말고는 제 권리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대회 출전은 자격에 따라 결정된 것이고 사유가 있다면 출전하지 않을 수도, 기권을 할 수도 있다.

마치 경기를 끝까지 해야 하는 것이 의무인 양 말하는 기자의 태도는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그래도 최대한 짧게 마무리하려고 뒷말은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은 쉽게 놔주질 않았다.

-어차피 질 경기,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제가 원하는 샷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과 몸이 따로 노는데 어찌 이기겠습니까.”

-이길 수 있는 경기는 끝까지 하고 질 것 같은 경기는 포기한다면 그건 프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닌 것 같은데요?

“물론 4홀을 더 진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엉망진창인 플레이로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고 나쁜 습관이 몸에 배는 것도 원지 않습니다. 이 결정이 저의 최선이었습니다.”

그밖에도 기권한 것이 비겁하다는 취지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필상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미 패배를 인정했는데 무슨 말을 더 바라는지 구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차피 승자는 한 명이고 63명은 패한다.

그 방법이 다소 의외였지만 다른 패배와 다를 게 없다.

이 일로 인해 또다시 쓸데없는 말들이 나올지라도 그건 개의치 않으면 그만이다. 보다 잘 가다듬어 좋은 경기를 보여 주면 되는 것이다.

예상에 없던 더 플레이어스부터 시작해 바쁘게 달려오느라 지친 심신을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며 풀고 싶었다.

그래서 이 대표와 상의해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마이애미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나흘 동안 정말 편하게 쉬었다.

* * *

[필 미켈슨. 시즌 2승 달성! 제2의 전성기 오나?]

[타이거 우즈. 3, 4위전 압도적 승리.]

토요일 저녁 내내 필상의 기권 소식이 스포츠 언론을 장식했다. 내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미 PGA 중심 선수로 자리했음을 인정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미켈슨이 타이거를 누르고 결승에 오른 제이슨 데이를 4&3로 잠재우며 우승한 순간, 필상에 대한 기사는 꼬리를 감췄다.

3위를 달성한 타이거와 함께 노장들의 투혼에 대한 기사들이 지면을 가득 메웠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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