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또 한 고비
WGC 델 매치플레이는 다른 대회와 달리 5일간 치러진다.
조별 예선을 3일간 치르고 토요일에는 8강전과 4강전, 그리고 마지막 날 오전에 준결승, 그리고 오후에는 3, 4위전과 우승자를 가리는 시합이 펼쳐진다.
4위 안에 들기 위해서는 7번의 승부를 펼치기 때문에 4라운드로 치러지는 다른 대회보다 훨씬 고단한 일정이다. 물론 기꺼이 자청하고픈 수고지만.
이제 겨우 예선을 통과했을 뿐인데, 슈펠레와의 경기에 상당한 기력을 소진한 필상은 엄마의 손맛에서 힘을 얻었다.
아들의 만족스러운 포만감에 수척해지셨던 그분의 눈가에도 비로소 웃음이 되돌아왔다.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요.”
“그럼 산책이라도 하렴.”
“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필상은 모모코와 별장 주변을 함께 걸었다.
별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팔짱을 낀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PGA가 대단하긴 대단한 것 같아요.”
“응. 당신도 LPGA에 진출하려면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것 같아.”
“전 미국에 오고 싶지 않아요. 가까운 일본이라면 모를까.”
“무슨 말이야? LPGA에 올 생각 없어?”
“제 꿈도 중요하지만 아이가 제 팔 흔들 때까지는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아요.”
“제 팔 흔들 때까지?”
표현이 좀 애매했다.
돌 지나면 아기들도 제 팔은 흔들 수 있지 않나?
그러나 모모코의 뜻은 아마도 엄마의 보살핌 없이 혼자 뛰어놀 수 있는 나이를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와 누나들이 적극적으로 돕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아이를 케어하고 싶은 것 같았다. 짐작컨대 엄마를 일찍 여의고 홀로 컸던 자신의 아픈 기억을 아이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듯.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 있다.
데뷔 2년차에 일본 여자 골프계를 평정한 그녀가 몇 년씩 쉰다면 과연 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신을 기다리는 팬들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네. 그래서 복귀는 할 거에요. 다만 꼭 필요한 대회만 나가려고요.”
“아! 그렇다면 팬들도 좋아하겠네.”
좋아할 것이라는 것은 자위였다. 그녀의 전성기를 갉아먹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물론 답은 있다.
그녀가 출전하는 대회마다 확실한 성적을 거두는 것이다.
자신은 전무후무할 연승을 이어가고 있지만 투어 대회 우승이 어디 밥 먹듯 쉬운 일인가?
적어도 한 해에 1승 이상 거두고 출전하는 대회마다 인상 깊은 경기를 펼친다면 그나마 분노는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바짝 신경을 써 줘야 한다.
“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절제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오빠.”
“하하하. 이럴 때 보면 정말 나보다 더 어른 같다니까.”
“치! 어리다는 말은 좋지만 오빠보다 더 늙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거든요!”
“이 깜찍하고 귀여운 여인을 누가 늙었다고 하겠어.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네. 하하하.”
“그럼 나 업어 줘요.”
“좋아. 업혀.”
필상은 모모코를 등에 업었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더 많이 전달되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침실에 들어선 그녀는 입맞춤을 나눈 뒤, 얼른 침대로 들어가 숨었다.
“저 먼저 잘게요.”
“그래. 좋은 꿈 꿔. 모모코.”
모모코는 필상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남편을 도울 수 있는지 정확히 알았다.
오늘 무척 힘든 경기를 마쳤기 때문에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자유를 준 것이다. 게다가 필상이 무엇을 하는지도 대충 짐작하는 것 같았다.
“아직 밤바람이 차요. 도 닦는 거는 적당히 하세요.”
“알았어, 하하하.”
“그리고 제가 새벽에 막 덤벼도 밀어내야 해요?”
“별걱정을 다 하네. 얼른 자.”
침대로 다가가 이마에 입을 맞춘 필상은 테라스에 나가 자리를 잡았다. 최근 토납을 꾸준히 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이 필요한 때였다.
그래서인지 호흡을 가다듬자마자 바로 무아지경에 빠졌다.
‘또 한 고비를 넘어서나?’
흩어진 내력이 서서히 차오른다 싶었던 순간, 몸이 한 번 크게 출렁거리더니 기가 담긴 그릇이 갑자기 팽창하는 낯선 느낌을 받았다.
약간의 통증을 동반했기에 깜짝 놀랐지만 더욱 강해진 기운이 전신을 휘감아 돌면서 나른한 쾌감이 찾아왔고 더욱 민감해진 감각이 느껴졌다.
저 멀리 떨어진 숲에서 작은 울음을 터트리는 벌레들의 소리까지 들려왔고 이어서 전신에 차오르는 힘이 요동을 쳤다.
‘드디어 풀스윙이 가능해진 건가?’
오랫동안 남아 있던 숙제가 풀린 것 같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전신을 제멋대로 휘돌아다니는 이 기운을 과연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이 정도의 강한 힘이라면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질서를 파괴하는 혼돈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필상은 잠시 주저했다.
토납을 멈추고 지금까지 누려 왔던 힘에 만족할 것인지, 아니면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맞서서 극복해야지! 뭘 망설이는 거야!’
아픈 경험을 했던 필상은 주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아무도 가 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 보면 물러설수록 더 힘들었다.
비록 당장의 결과는 기대에 차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에게 주워진 날들이 어디 오늘 하루뿐이던가!
눈앞의 걱정보다 더 많은 나날들을 위해 끝까지 맞서겠다는 각오를 다진 필상은 깊은 심연의 바다에 몸을 던졌다.
토납에 깊이 집중하면 시간의 흐름이나 주변의 동태도 감지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곁에는 지금 모모코가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형님. 아직 안 일어나셨어요?”
“피곤한 것 같아서 식사 준비 다 끝나면 깨우려고요.”
“와! 어제 슈펠레한테 엄청 시달리더니 정말로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네.”
성호는 필상의 8강전이 8:10에 시작하기 때문에 6시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거실에 나타났다. 그런데 늘 자신보다 먼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필상이 보이지 않자 먼저 필드로 나간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아직 자고 있다는 말에 슈펠레 핑계를 댔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사랑스러운 아내의 품에 안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후 2층에 올라갔던 모모코에게서 문자가 왔다.
[성호 씨. 잠시만 우리 방으로 올라와 주실래요?]
그냥 불러도 될 걸 굳이 문자를 보낸 이유를 생각한 성호는 조용히 일어나 식구들 몰래 2층으로 향했다.
마침 모모코가 문을 열고 성호에게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얼른 문을 닫은 모모코가 작게 소근 거렸다.
“오빠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요.”
“제가 깨울까요?”
“그게 아니라……. 조용히 따라오세요.”
왜 그러나 싶었는데 방안으로 깊이 들어서자 이미 가지런히 정돈된 침대가 보였다. 뭔가 기이한 생각이 든 성호의 시선이 바로 테라스로 향했고 기함이 터졌다.
“어어!”
“8시간째에요.”
“어젯밤에 시작한 운기를 아직도 하고 계신 건가요?”
“네. 평소에는 길어야 두세 시간이고 알아서 깨어났어요. 그런데 지금은 걱정이 되요. 그냥 깨워도 되는지…….”
성호도 어찌할 바를 몰라 벙찐 표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신이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결정은 자신보다는 아내인 모모코가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 일어나야 경기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형수가 결정하세요.”
“그럼 혹시 모르니까 만약을 위해 저 좀 도와줘요.”
“네.”
성호는 모모코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모모코는 테라스에 들어서자 인기척부터 냈다.
“흐음!”
“…….”
“오빠!”
한 번 부른 뒤 반응이 없자 모모코는 잠시 기다렸다.
제발 혼자서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냥 혼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진즉에 깨웠을 것이나 필상이 그런 상태가 아니었기에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그러나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의 떨리는 손이 필상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흑돈은 왜 데려왔어?”
“오빠!”
“날이 훤히 샜네? 지금 몇 시야?”
“6시 반이요.”
“큰일 날 뻔했네. 하하하.”
“형, 대체 왜 그러세요! 사람 심장 떨리게!”
“넌 얼른 내려가 밥이나 든든하게 먹어. 난 씻고 내려갈 테니까.”
“서두르세요. 몸은 풀어야지요.”
“알았어. 너 쓸데없는 잔소리 계속할 거냐?”
“알았다고요. 형수 놀라면 안 되는 사람인 것은 알죠?”
“이게 진짜!”
필상이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성호는 얼른 도망쳤다.
본인도 놀랐지만 아이를 가진 모모코를 긴장시키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 한 마디 보태려다 응징을 당할 뻔했다.
하기야 세상 모든 남자가 부러워할 여신을 아내로 맞은 필상이 모모코를 얼마나 위하는지는 모르지 않았다.
성호가 사라지자 필상은 모모코를 꼭 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차분하게 읊는 그의 말이 좀 이상했다.
“모모코. 혹시 내가 경기 중에 이상한 증상을 보이면…….”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큰 문제는 아닌데 한 번 더 크게 도약하기 위해 잠시 움츠릴 상황이 올 것도 같아서 그래. 지난번처럼 경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으면 당신이 나서 줘.”
그저 만약의 사태를 고려한 것뿐인데, 모모코의 눈시울은 금방이라도 물방울을 떨어뜨릴 것처럼 붉어졌다.
괜한 말을 했나 싶지만 지금 이러는 것이 갑작스럽게 놀라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밤새 자신의 변모한 내력과 고군분투했지만 모든 힘을 조절할 방도는 찾지 못했다. 다만 그게 자신에게 큰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면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미리 모모코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킨 것이다.
“오빠가 제게 알려 주면 안 되나요?”
“알았어.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겨도 놀라지 마. 전에도 거뜬하게 일어났잖아. 그때는 아예 경고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래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냥 이번 대회 포기…….”
포기하면 안 되냐고 물으려던 모모코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간의 노고도 아깝지만 필상이 확실하지도 않은 두려움 때문에 경기를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를 다독인 필상은 양치와 고양이 세수만 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너무도 좋았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미켈슨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하지만 필상의 권유에 한 수저 떠먹더니 그릇을 달라고 했다.
“와아! 이거 이름이 뭐지?”
“된장찌개요.”
“이거 한국의 발효 건강 음식이지?”
“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냄새는 좀 불편하지만 맛은 아주 건강해지는 느낌이야.”
“건강해지는 맛이라고요? 하하하.”
그다지 다양하지 못하고 비싸기만 한 일본 음식은 굉장히 잘 알려진 것에 비해 한국 음식에 대해 아는 서양인은 드물다.
하지만 귀동냥이 있었는지 미켈슨은 한국 음식이 건강에 좋다고 알고 있었고 먹기 불편하지 않자 아예 따로 부탁한 그릇에 덜어서 열심히 먹었다.
한국인의 입맛과 같은 느낌을 받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건강에 좋다면 뭐든 흡입하는 것은 동서가 다를 바 없었다.
***
“예수님이 납시었네요.”
“남의 개성을 폄하하는 건 아주 좋지 못한 습관이야.”
16강에서 만난 선수는 영국 출신의 토미 플리트우드였다.
머리카락이 뒷목을 덮었고 수염도 멋지게 기른 그가 나타나자 그 취향이 불편했던 성호가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절대 마구 기른 머리와 수염이 아니다. 면도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여 다듬기 때문에 그건 개성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무시하기보다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지만 성호는 필상의 조언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듯,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술술 풀어냈다.
“제가 좀 살펴봤는데 PGA에서는 2승뿐이더라고요. 유럽피언 투어에서 5승이 있지만 16강에 오른 선수 중에 그나마 편한 선수인 것 같아요.”
“편한 상대? 토미의 세계 랭킹이 몇 위인지는 알지?”
“10위더라고요?”
“그거 가위 바위 보를 해서 딴 걸까?”
“그건 아니겠죠. 우승은 많지 않지만 톱 10에 많이 들어 포인트를 꾸준히 쌓은 것 같더라고요.”
“그게 무서운 거야. 슈펠레보다 오히려 2단계 더 높다는 것만 명심해.”
“7위가 10위보다 3단계 높잖아요.”
“오늘따라 왜 이럴까? 아침부터 매를 벌더니 간이 좀 심심하게 부었나?”
“알았어요. 입 닫을 게요.”
성호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녀석은 아침에 일어난 일 때문에 불안했던 것이다.
자신이 상대를 눌러 필상이 자신감 있게 상대하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필상은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라고 봤다.
상대를 낮추는 것보다 오히려 경계하는 것이 낫다. 그의 예선 성적이 결코 만만치가 않다. 첫날 안병훈에게 패했지만 루이스 우스투이젠과 카일 스탠리를 연파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자신에게 이겼던 안 프로를 제치고 올라온 것만 해도 필상으로서는 경계가 필요한 선수였다.
흥미롭게도 87년생인 그는 필상과 동갑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