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40화 (140/354)

140. 팽팽한 승부

그런데 필상이 미처 모르는 기이한 현상이 하나 있었다.

오늘 핀이 꽂힌 지점을 직선으로 정확히 공략한 선수들은 하나같이 기대와는 다른 황당함을 경험했다. 그린 앞 러프에 맞은 공이 스핀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린에 올라가지 못하고 굴러 내려와 항아리 벙커에 빠졌던 것이다.

때문에 필상의 뇌리에 그려진 궤적은 선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린 앞 잔디가 물러 앞으로 튀지 못하는 것을 회피하도록 최적의 공략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 못 칠 것도 없지!’

푸르스름한 그 포물선을 따라 타구가 날아갈 수 있도록 필상은 페이드 샷을 준비했다. 때문에 평소보다 샷 루틴이 좀 길었다.

하지만 갤러리들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필상의 진지한 모습이 뭔가 터트릴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간결한 샷이 터졌다.

“으으으?”

첫 반응은 안타까움이 깔린 괴성에 가까웠다.

왜냐면 타구의 방향이 그린이 아닌 좌측 골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후 그 소리는 함성으로 바뀌었다.

“인 더 홀!”

“홀인원! 홀인원!”

서서히 우측으로 휘는 페이드 타구를 보며 다들 흥분했다. 정확히 깃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홀인원은 결코 쉽지 않다. 수많은 선수들이 핀 하이로 공략하지만 실제 타구는 한참 벗어나기 일쑤다.

그러나 타구를 바라보던 필상은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려졌던 궤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구현했기 때문이다.

탁!

타구는 깃대 좌측 2m 앞에 떨어졌다.

조금 빗나간 것 같았지만 바운드가 된 공은 페이드 스핀이 작용했는지 우측으로 튀더니 깃대를 살짝 오버했다.

홀인원의 기대했던 이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비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잘게 몇 번 튀면서 제자리에 멈출 것 같던 공이 돌연 누군가 잡아당긴 것처럼 백스핀을 먹고 쭉 빨려온 것이다.

텅!

-와! 와! 저, 저거 들어갔습니다.

-네. 공 프로가 드디어 반전의 기회를 잡았습니다. 페이드를 구사할 때는 좀 불안했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던 겁니다!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지금 같은 레이아웃에 누가 페이드 샷을 쏘나요? 전 경기를 포기한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포기요? 그럴 선수는 아니지요.

-작년에 JGTO 경기에서 포기한 적이 있잖습니까?

-그때는 포기한 것이 아니고 부상으로 인한 기권이었죠. 그가 직접 결정한 게 아니고 정신을 잃어 경기를 속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기위원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공 프로의 정신력은 바로 우리 한국인의 불굴의 기상을 나타내는 것 같아 감개무량합니다!

임 캐스터는 다소 오버했다.

홀인원이 골프의 꽃이라 할 수 있지만 그걸 이룬 것과 한국인의 기상을 연관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한 설정이었다.

하지만 감동에 젖은 팬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를 응원하는 모든 팬들은 필상이 샷을 하는 매순간, 자신이 플레이를 펼치는 것처럼 감정 이입하기 때문에 홀인원은 바로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손짓 발짓을 다해 가며 최고의 결과를 기대했던 팬들은 격한 감동에 사로잡혀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눌 뿐이었다.

“나이스 샷!”

“고맙습니다.”

“이런 홀에서 페이드를 구사하다니 전 정말 놀랐습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하하하.”

이 홀의 승패는 결정 났다.

슈펠레는 버디 퍼팅을 잘해 3업까지 앞서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기에 충분한 좋은 샷을 날렸다.

하지만 필상이 이 난해한 홀에서 홀인원을 기록하자 박수를 치며 다가와 축하했다. 속내는 쓰리겠지만 승패를 떠나 멋진 샷에 대한 예우를 갖춘 것이다.

하지만 인사가 끝나자 서둘러 앞장서 걸었다. 축하는 하지만 이 경기는 결코 놓칠 수 없다는 다부진 각오를 한 것이다.

“자식! 어안이 벙벙할 거다!”

“성호야. 한국 분들도 많아.”

“그분들도 다 저랑 같은 생각일 걸요?”

“그래도 상대를 존중하는 게 좋지. 속이 상하지만 축하하는 거 봐라.”

“알았어요. 이제 어떤 샷을 할지 궁금하네요.”

“흔들리지 않을 거야. 그보다 더 좋은 샷을 하는 수밖에!”

비록 홀인원으로 차도 한 대 얻고 한 홀을 따라 붙었지만 필상이 느낀 슈펠레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18번 홀에서 필상이 오르막인데도 331야드를 날려 45야드 어프로치 샷을 남겼음에도 차분하게 296야드를 날린 그는 남은 81야드를 핀에 바짝 붙여 오히려 필상을 압박했다.

-어! 지독한 친구네요.

-지독하다는 표현, 그만큼 슈펠레가 좋은 기량을 지닌 선수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설마 제가 상대 선수를 험담하겠습니까!

-하하하. 여하튼 이 경기는 우리 공 프로에게 아주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평균적인 기량이 앞서도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동하는 프로들이 한 번 불이 붙으면 어떤 경기력을 보이는지 생생하게 체험하는 셈이니까요.

-아! 정말 기대 이상의 선전입니다. 전 이렇게 빡빡한 하루를 보낼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나름 재미는 있네요.

-역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지 않으신 거죠?

-물론이죠. 하하하.

버디에 버디가 18번 홀에 이어 1번 홀에서도 일어났다.

이제 남은 홀은 하나, 슬슬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이었다. 지켜보는 팬들의 표정에도 웃음기는 사라졌다.

470야드 파4, 승패를 결정지을 2번 홀 티 그라운드에 올라선 필상은 안전한 샷을 선택했다. 수풀이 우거진 골짜기를 지나 공략해야 할 페어웨이가 310야드를 지나면 좌측으로 급격하게 휘면서 좁아지는 도그렉 홀이기 때문이다.

좌측으로 그린까지 이어진 해저드가 위협적이지만 350야드 이상을 날리면 다소 넓은 페어웨이도 보인다. 그러나 막판에 몰린 스스로에게 긴장하지 않았냐고 묻기 싫었다.

작은 실수라도 나와 페어웨이 뒤쪽의 러프에 들어갈 경우 세컨샷이 어렵기 때문에 티샷이 아닌 세컨샷에 승부를 걸기로 결정했다.

“드로우 샷입니까?”

“아니.”

“네.”

에이밍을 확인한 성호가 우측을 보고 있는 필상에게 물었다. 그는 필상이 과감한 샷으로 장타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로우 샷이 아니라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늘 필상의 판단이 옳았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도리어 혼란만 부추긴다고 봤다.

필상이 가진 다양한 무기 중에 장타도 한몫하지만 이런 긴박한 순간에 쓰지 않는 것은 이미 철칙처럼 지켜 왔음을 상기했다.

-아! 305야드.

-좋습니다. 페어웨이에 안착했습니다. 남은 거리는 정확히 165야드, 공 프로가 확실하게 붙여 주기를 바랍니다.

-슈펠레도 안전하게 가겠죠?

-그럴 겁니다.

-…….

슈펠레에 대해 묻던 임 캐스터는 갑자기 말이 없었다.

방송 사고라도 난 것처럼 보였지만 시청자들은 그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긴장한 그가 티샷 미스를 하지 않나 그걸 지켜보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친구네요!”

“아니야. 미스 샷이야.”

“미스 샷이라고요?”

“내가 볼 때 지금 저 친구가 287야드를 보냈어. 그럼 세컨샷이 얼마나 남은 것 같아?”

성호는 슈펠레의 남은 거리를 재면서도 필상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페어웨이에 잘 들어간 공을 왜 미스 샷이라고 하는지.

“음……. 183야드 아닌가요?”

“그러니까!”

“아!”

프로라도 180야드를 넘는 거리는 부담이 된다.

슈펠레라면 7번이나 8번 아이언 거리일 테지만, 170야드 이하와 180야드를 넘는 아이언 샷의 정확도는 차이가 크다.

게다가 승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스윙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그를 짓누를 추가적인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필상은 그가 300야드를 목표로 쳤다고 봤다. 하지만 실수가 두려워 정확하게 맞추는 것에 매몰된 나머지 힘이 실리지 못한 것이다.

성호는 필상의 말을 이해했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슈펠레의 표정이 그 모든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운의 신은 그의 편에 선 것일까?

핀이 좌측 벼랑 쪽에 붙었는데, 그의 타구 방향은 그린 우측에 너무 치우쳤다. 버디는커녕 파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러프를 강타한 공은 기가 막히게도 좌측으로 튀었다. 그러더니 비실비실 굴러 깃대 방향으로 향했다.

“우이 씨! 저게 대체 뭐죠?”

“라이도 좋은 것 같은데?”

필상이 선 곳에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파는 물론 집중하면 버디도 나올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희망이 사라지고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 같았으나 필상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최선의 샷을 구사했다.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아! 정말 쉬운 상대가 아니군요. 잰더 슈펠레.

-두 선수의 라이는 어떻게 되죠?

그린을 향하던 필상은 두 공의 위치를 확인했다.

자신의 공이 조금 더 짧기는 했다. 하지만 필상은 우측으로 휘는 3m 퍼팅이고 슈펠레는 라이가 거의 없는 평지의 3.4m 퍼팅이었다.

그가 넣으면 이 경기는 그냥 끝난다.

만약 샤르마가 브랜든을 이긴다면 셋이 2승 1패 동률이 되어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최악의 상황까지 몰릴 수 있다.

필상으로서는 상당히 반갑지 않은 스토리 전개였다.

여하튼 마지막 홀까지 승부가 이어졌기 때문인지 그린 주변에는 갤러리들이 벌떼처럼 운집한 상태였다.

그린에 올라서는 두 선수에게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지만 미국 선수인 슈펠레를 향한 열광은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다. 추론컨대 떠오르는 슈퍼루키를 패배 직전까지 몰고 온 것에 대한 찬사 같았다.

“저 자식. 열광하는 팬들한테 인사도 안 하네요?”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거겠지.”

“이기고 나서 난리를 치려나?”

“흑돈아. 아직 장갑 안 벗었어.”

“아! 자진 납세하겠습니다.”

흑돈은 제 퉁퉁한 볼을 한껏 잡아 당겼다.

금기인 실언일 수도 있으나 그 정도 대화는 가능한 사이였다. 오히려 장난스럽게 행동하며 필상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그의 행동에 필상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슈펠레는 그린을 두 바퀴나 돌았다.

라이도 별로 없는 퍼팅인데, 무조건 넣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기보다는 긴장한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는 행동이었다.

“어?”

그냥 쭉 밀면 될 것 같았는데 공은 홀컵 좌측을 스치고 그냥 지나갔다. 18번 홀 세컨샷까지 굉장한 선전을 펼쳤으나 마지막 순간의 긴장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페이스가 닫혔어.”

“네. 미쳐 돌아 버리겠네요. 저 친구.”

“이제 공은 내게로 넘어온 건가?”

그의 실패에 사방에서 무겁고 긴 한숨이 터졌다.

하지만 필상은 차분하게 그가 파 퍼팅까지 마무리하는 것을 보고난 뒤에 천천히 움직였다. 라이는 보지도 않았다.

이미 공이 굴러갈 라인은 확정지었기 때문이다.

-바로 어드레스를 하나요?

-힘 조절을 위한 빈 스윙은 하겠죠. 라이는 이미 살폈고 이럴 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그린 라인대로 그냥 밀면 됩니다.

-그래도 너무 빠른 것 아닌…….

임 캐스터는 말을 잇지 못했다.

빈 스윙을 한 번만 휘저은 필상이 어드레스를 하자마자 바로 스트로크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앞선 슈펠레와 너무도 비교되는 다소 성급한 진행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 준다.

홀컵 좌측 2cm 지점을 향해 밀었던 공은 정확한 라인을 타고 구르더니 지면에서 사라졌다.

텅!

“축하합니다.”

“오늘 경기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슈펠레. 당신은 패한 게 아니잖습니까!”

“하하. 그러네요. 우린 비겼네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식사 한 번 하시죠?”

“초대해 주신다면 기꺼이.”

“제 나라 한국은 아름답습니다. 기왕이면 KPGA 메이저 대회 때 뵈면 좋겠습니다.”

“네. 그러지요. 하하하.”

정말 팽팽한 승부였다.

그로서는 이겨야만 16강 진출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 게다가 상대가 하필 모두가 두려워한다는 미스터 퍼펙트였기에 더더욱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의 경기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에게 말했다시피 필상은 오늘 경기를 잊으면 안 된다. PGA가 어떤 곳인지 절절하게 체득한 경기였기 때문이다.

존중하되 기를 살려 주면 그게 자신에게 감당하기 힘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 가볍게 여길 상대는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아직 갈고 닦아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이다.

“오빠! 16강 진출 축하해요.”

“응. 고마워.”

진한 포옹으로 모모코의 격렬한 축하를 받았다.

하지만 필상의 눈길은 수척해지신 엄마에게 닿아 있었다. 결국 16강 진출이라는 목표는 이뤘지만 너무도 죄송했다. 보다 확실한 승리로 안심시켜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주섬주섬 다가가 엄마의 손을 덥석 맞잡았는데, 얼마나 애를 태우셨는지 축축해진 느낌에 괜히 울컥했다.

“엄마……. 피곤하지 않으세요?”

“수고는 네가 다 했는데 내가 왜 피곤해.”

“저 얼른 씻고 나올게요. 오늘은 식구들과 밥 먹고 싶으니까 절대 그냥 가지 마세요?”

“얼른 씻고 별장으로 와.”

무슨 말인가 했더니 엄마가 누나들과 함께 아침 내내 장을 봐 한국 음식으로 거한 식탁을 차렸던 것이다.

아들을 위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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