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39화 (139/354)

139. 확 집어 던지고 싶은 욕망

그런데 이 수더분한 인상을 지닌 백인 선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것인지 코스를 공략하는 방법이 치밀하고 또한 차분했다.

어제 어떻게 샤르마에게 패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어진 185야드의 파 3홀에서 더 가깝게 붙인 버디가 홀컵을 외면하는 순간, 필상은 오늘 하루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왔다.

370야드 파4, 5번 홀에서는 나란히 버디를 잡았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6번 홀은 590야드 파5 홀이지만 페어웨이만 지키면 2온을 노릴 수 있는 내리막 경사의 홀이기 때문이다.

“341야드 정도 날린 것 같아요.”

“제법이네!”

아너인 슈펠레도 여차하면 2온을 노리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러프에 빠진 공은 생각만큼 구르지 않았다.

약간 틀어졌기 때문에 남은 거리는 253야드의 러프라서 쉽게 2온 트라이를 할 수 없다고 봤다.

때문에 필상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힘차게 휘둘렀다.

따앙!

정확성을 놓치지 않는 범위에서 가용한 힘의 전부를 쏟아부어 휘둘렀다. 임팩트 되는 순간, 잘 맞았다는 감이 왔다.

-와아아! 엄청나네요. 저러다 400야드도 날아가겠어요.

-필요할 때 터지는 장타, 드디어 공 프로가 비밀 병기를 꺼낸 것 같습니다. 제발 페어웨이를 잘 지켜야 하는데요!

-걱정 마세요. 완벽한 스트레이트 구질입니다!

까마득히 떠오른 공이 페어웨이 정중앙에 떨어질 때까지 정말 지루한 느낌이 들 정도로 체공 시간이 길었다.

현지에서 잡은 화면에 공의 궤적이 뒤에서 파란 선으로 그려졌는데 올라가기만 했을 뿐 내려온 흔적이 없었다. 왜냐면 그냥 일직선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현지 미국 중계진들도 찬탄을 금치 못했는데 화면에 찍힌 비거리에 또 다시 놀랐다.

-421야드! 이건 공 프로의 새로운 기록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내리막이 있기는 했으나 캐리가 401야드였고 런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장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슈펠레, 야코가 좀 죽었겠는데요!

-어? 야코는 외래어 아닌가요?

-아닙니다. '콧대'를 이르는 순우리말이죠. 다소 속된 의미는 있지만 전 지금 그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봅니다.

-아! 그렇군요. 슈펠레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한데 아마 속은 좀 불편할 겁니다. 본인은 2온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좀 벅찬 상황이니까요.

-그래도 2온 시도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임 캐스터는 슈펠레가 무리수를 두다가 차라리 잘라 가는 것만 못한 결과를 기대한 것 같았다.

하기야 어차피 매치플레이는 스코어가 중요한 게 아니다. 버디를 해도 상대가 이글을 하면 아무 소용이 없고 파를 하고도 이길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떤 공략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세컨샷 지점을 향하던 필상은 슈펠레의 공이 놓인 라이를 확인했다. 러프라도 얼마든지 좋은 타구를 만들 수 있는 상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애매했다.

공이 살짝 떠 있기는 한데 우드로 공략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상이 미들 아이언으로 공략 가능한 170야드를 남겼기 때문에 그의 공략이 정말 궁금했다.

“어허! 유틸리티를 잡네요?”

“잘라 가네!”

“저걸로 올릴 수도 있지 않나요?”

“아니야. 그냥 깔끔하게 걷어 내서 200야드 정도 보낼 것 같아. 상당히 심지가 굳은 선수네.”

필상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는 무리하지 않고 깔끔하게 공만 쳐 냈다.

무리하게 휘두르면 정타가 나지 않아 타구가 춤을 출 수도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한 정략적인 공략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그의 샷은 잊고 자신의 샷에 집중했다. 9번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8번을 잡고 컨트롤 샷을 했다.

-아! 조금 아쉽네요.

-6번 홀을 연습 라운드 이후 처음 쳐 봐서 그런 겁니다. 내리막처럼 보이지만 그건 앞에 보이는 산 때문에 일어난 착시입니다. 평지였습니다!

-한라산 브레이크가 있나요?

-네. 티샷은 내리막이 맞지만 지금 세컨샷은 절대 내리막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버한 겁니다.

결과를 확인한 필상도 다소 황당했다.

짧게 떨어뜨려 오르막 이글 퍼팅을 할 요량이었다. 조금 강하게 맞기는 했으나 그래도 홀컵을 오버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뒷바람이 있었나 봐요!”

“아니야. 산 때문에 그린이 낮아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진즉에 체크해 놓고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가 있지?”

“죄송합니다.”

성호는 자신이라도 짚어 줬어야 할 사항을 그냥 넘긴 것을 확인하고는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어제 술을 마셨기 때문이라고 자책했지만 필상도 부주의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이틀 동안 너무 편하게 승리를 거둬 보다 진중하지 못했던 자신을 되돌아봐야 했다.

그래도 퍼팅은 자신이 있어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슈펠레의 웨지 샷은 끔찍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홀컵을 지나는가 싶었던 타구가 백스핀을 먹어 샷 이글이 나올 뻔했다. 탭인 거리에 바짝 붙인 것이 필상에게 압박감으로 작용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당당한 태도였다.

‘넣어야 해!’

폭발적인 티샷을 날리고도 홀을 따지 못하면 그의 기세를 누르기 힘들다고 판단했기에 정성을 다 모았다.

그러나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은 오히려 평상심에 악영향을 미쳤는지 퍼팅 스트로크 순간, 페이스가 미세하게 닫혔다.

그래도 기대를 했건만 그린은 그 어떤 오류도 용서하지 않았다. 홀컵 좌측을 타고 들어갈 것도 같더니 그냥 흘렀다.

결국 둘은 버디로 이 홀에서 비기면서 필상은 본의 아니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위축되거나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지도 않았지만 최고의 플레이를 펼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대로 끌려가나요?

-아직 기회는 충분합니다. 우리 공 프로의 플레이가 좋지 않다기보다는 슈펠레가 좋은 경기를 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매홀 비길 수가 있죠?

첫 홀에서 만들어진 1DN이 참으로 오래도 지속되었다.

금방이라도 올 스퀘어를 만들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슈펠레는 환상적인 숏 게임으로 필상의 승리를 제지했다.

그래도 기회는 찾아왔다.

슈펠레의 14번 홀 세컨샷은 누가 봐도 미스 샷이었다. 168야드를 피칭으로 공략한 타구가 밀려 우측 벙커 턱에 걸렸다.

“드디어 빈틈을 보이네요.”

“그래. 침착하자.”

필상은 좌측으로 해저드가 쭉 이어졌음에도 과감한 티샷을 날려 남은 거리는 124야드에 불과했다.

필요 이상의 긴장을 하지 않기 위해 호흡까지 가다듬은 세컨샷은 기가 막히게 붙었다. 1m를 조금 넘지만 라이도 없는 오르막 버디 퍼팅을 남긴 것이다.

게다가 슈펠레의 공은 차라리 벙커에 빠지는 게 나을지도 모를 아주 스탠스가 불편한 위치였다. 벙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잡은 자세는 공을 오른발보다도 10cm는 뒤에 둔, 아주 기이한 자세에서의 칩샷이었다.

그런데 에이프런에 떨어진 타구가 빠르게 굴러 홀컵에 박힌 깃대를 정통으로 맞췄다. 튀어 나갈 수도 있는 강한 타구였지만 제자리에서 한번 튄 공이 그냥 쏙 들어가고 말았다.

“와아아아! 나이스 버디!”

“슈펠레! 슈펠레!”

필상을 응원하는 팬들의 입에서도 찬탄의 비명이 터졌다.

버디 기회를 맞은 필상으로서는 힘이 쪽 빠질 엄청난 칩인 버디가 나온 것이다. 물론 필상이 버디 기회여서 그로서는 무조건 넣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너무 강했건만 행운의 여신이 그를 비추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문제는 필상이 너무 서둘러 퍼팅을 한 것이다.

라이도 없어 그냥 쭉 밀면 그만인데, 테이크백이 흔들린 퍼팅을 그냥 강행한 것부터 잘못이었다. 페이스가 열린 결과는 홀컵 우측을 스치는 외면이었다.

그 순간 들고 있던 퍼터를 확 집어 던지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치민 것이다.

“형!”

“그래…….”

“아직 6홀 남았어요.”

“뒤집을 수 있을까?”

“비기기만 해도 되잖아요. 설사 진다고 해도 플레이오프가 남았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그래. 평정심을 잃으면 안 되지.”

“어머님이 보고 계세요.”

“아!”

모모코를 비롯한 가족들이 경기를 관전 중이었다.

신경 쓰지 않게 한다고 시선에 잡히는 곳에서 지켜보지만 사실 필상은 가족들의 동선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애써 털어 버리고 경기에 집중했지만 이런 바보 같은 장면을 보여 드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빠! 쑤쑤!”

2개 국어가 합성된 그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오직 모모코뿐이다.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태국 골프장에서는 캐디들이 간혹 사용하기도 하지만.

‘쑤쑤’는 싸워 이기라는 태국의 응원 구호다. 그래서 다음 홀로 이동 중이던 필상은 모모코의 음성이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나들과 자형들, 조카들도 모두 파이팅을 외쳤지만 오로지 한 분, 엄마는 두 손을 꼭 마주 쥔 채 아무 말이 없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눈빛에 담긴 의미는 전율이 일 만큼 정확히 느껴졌다. 엄마는 아들이 당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셨다.

고교를 졸업하던 해에 목표하던 대학에 떨어져 실의에 빠진 자신을 바라보시던 바로 그 눈빛, 그때 하셨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어깨 펴! 아들, 너 여기서 그냥 포기할 거야?’

대학에 떨어질 수도, 승부에서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의기소침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지금은 아직 승부가 끝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분을 참지 못하고 지레짐작한 자신이 평정심을 잃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게 무척이나 실망스러우셨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절대 이대로 허무하게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보행 중에도 토납이 가능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이야말로 절실했다.

-아쉽네요. 차분하게 버디를 잡고 기다렸어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저는 오히려 공 프로의 어이없는 퍼팅을 보며 인간미를 느꼈습니다. 그도 사람이구나……. 뭐 그런.

-지금 우리 공 프로가 눈을 감고 있네요. 아마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시도겠죠?

-그렇습니다. 본인도 방금 전의 실수를 되새기며 각오를 다지고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이제부터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죠. 지고 이기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포기하지 않는 근성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네. 슈펠레가 깜짝 놀랄 멋진 샷으로 시원하게 복수하기를 기원합니다.

스포츠 중계 중에 복수를 운운하는 것은 다소 과했다.

어느 선수가 지기 위해 필드에 나온단 말인가?

아마 현지 중계였다면 편파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한국 골프 채널이었다.

토납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킨 필상이 자신의 장점을 살려 장타에 이은 정교한 샷을 선보였지만 기세가 오른 슈펠레도 15, 16번 홀을 연이어 버디로 장식했다.

필상의 추격에 찬물을 끼얹는 그의 멋진 샷에 현지 중계진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을 것 같던 필상을 상대로 완벽한 경기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임자는 따로 있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149야드에요.”

“앞에서 5야드, 좌측에서 4야드에 붙여 놨네!”

티 그라운드에서 그린까지 페어웨이가 없다.

그나마 그린 우측 앞에 세로로 긴 벙커가 하나 있고 그 뒤로 다시 항아리 벙커가 2개나 파여 있다. 러프가 있지만 그건 벙커로 안내하는 경로일 뿐이다.

더 위협적인 것은 티 박스 왼쪽에서 시작된 벼랑이 그린을 향한 중간 지점을 다 파먹고 그린 좌측으로 길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짧거나 감기면 여지없이 벼랑 아래 해저드로 처리되어 레이디 티에서 3번째 샷을 해야 한다. 감겼던 선수 중에 이 홀을 이긴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안전하게 가겠네요.”

“그렇겠지.”

6개 홀을 남기고 2업인 선수가 모험을 할 리는 없다.

차분하게 파를 염두에 두고 공략하면 오히려 추격하는 선수가 제풀에 지쳐 무너지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펠레는 그 와중에도 좋은 샷을 구사했다. 오르막까지 감안하면 155야드는 봐야 할 까다로운 홀인데, 그린 중앙을 노리지 않고 그 와중에도 짧게 쳤다.

10cm만 짧았어도 항아리 벙커로 들어갈 타구가 프린지에 맞아 그린에 올랐고 오르막 4야드 버디 기회를 남겼다.

“저 인간 운도 좋네요.”

“피칭.”

“네.”

고개를 좌우로 돌려 몸을 풀며 걸어 나가던 필상은 홀인원 상품으로 진열해 놓은 자동차에 시선이 닿았다.

그런데 그걸 보자 강한 욕구가 일었다.

‘지프 그랜드 체로키?’

아주 좋은 승용차는 있지만 그걸 타고 태어날 아이와 함께 바닷가로 여행을 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강렬한 욕망을 그 차에 던졌다.

필히 내 차로 만들 것이라고.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이야말로 홀인원이 꼭 필요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으흠!”

빈 스윙을 하며 이미지를 그리던 필상의 시야에 아름다운 포물선이 하나 그려졌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스트레이트 구질이 아니었다.

이미 정해진 사전 공략은 분명 직선이었는데, 그나마 자신감 있는 드로우 구질도 아닌 너무 위험천만한 페이드가 요구되는 그 궤적에 잠시 머뭇거렸다.

아예 그린에 떨어지기 직전까지 골짜기를 건너가는 모험적인 샷을 구태여 감행할 필요가 있나 망설인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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