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TPK 사단
-역시 브랜든도 우리 공 프로의 상대는 아니로군요!
-그렇습니다. 한두 번은 페이스가 떨어질 만도 한데, 공필상 프로는 정말 한결같습니다.
-리그 경기지만 오직 1명만 16강에 진출하기 때문에 한 경기만 삐끗해도 문제가 생기죠. 하지만 일단 2승을 거둬도 슈펠레가 이긴다면 결국 내일이 조별 리그 결승전인 셈이죠?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경기 결과는 지켜봐야 합니다.
-와! 환상적인 아이언 샷이 또 터졌습니다.
필상은 이미 전반 나인에 3업으로 앞섰다.
하지만 후반 들어서자마자 바로 버디를 낚아 내며 승기를 완벽하게 잡았다. 브랜든 그레이스가 나름 이를 악물고 쫓아왔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가끔 터지는 장타와 정확한 아이언 샷, 그리고 그린을 놓친 경우에도 위협적인 어프로치로 상대를 압박해 결국 12번째 홀에서 도미 상황을 만들어 냈다.
남은 홀을 모두 이겨도 겨우 무승부 상황에 몰리자 브랜든은 드라이버 티샷이 심하게 감겨 언플레이어블을 선언할 상황에 빠졌고 결과를 보지 않은 그가 패배를 선언했다.
-7&5. 이거 그다지 좋은 결과는 아닙니다.
-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어젠 7번 홀에서 시작해 11개 홀 만에 경기가 끝나 18번 홀에서 6번 홀까지는 구경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5번 홀에서 시작했는데, 역시 18번 홀부터 4번 홀까지는 플레이를 하지 못했습니다. 내일은 하필 1번 홀에서 출발하는데, 그 홀들이 낯설지 않겠습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경기를 일찍 끝내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더욱이 한국에서 가족들이 왔다던데, 같이 시간을 보내도 괜찮죠.
-그건 입장이 좀 다릅니다. 물론 공 프로가 잘 알아서 하리라 믿지만 2연승을 했다고, 가족들이 미국까지 왔다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찌 보면 매정한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미국에 온 이유가 뭔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다. 이미 필상은 파죽지세로 PGA를 휩쓸고 있다.
아직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데뷔전에서 우승한 선수가 바로 다음 출전에서 연승을 한 사례는 없다.
나이가 어리지는 않지만 서른 넘어 골프를 시작한 루키의 다승도 드문 현실에, 준비된 스타라는 평가를 받던 필상이 이번 대회마저 우승한다면 빅스타의 탄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한 번만 어그러져도 무너지는 매치플레이라서 그 파급력은 이미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한국 골프 방송 채널들이 먼저 움직이자 일본에 이어 아시아 각국들도 거금을 들여 PGA 경기 중계권을 구입하는 도미노 현상이 벌어졌다.
또한 더 플레이어스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PGA 경기 속보를 전하고 관련 특집까지 편성했다. 자국 투어 외에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던 아시아 각국의 안방에 PGA가 깃발을 꼽게 된 것이다.
“필 형도 무난히 이길 것 같아요.”
“얼른 씻고 타이거 경기나 보러 가자.”
“밥은요?”
“매점에서 파는 샌드위치 맛있던데?”
“샌드위치요?”
“부족하면 2개 먹든지.”
성호는 투덜거렸지만 필상의 마음을 이해했다.
어제 자신이 뭔가 조치를 취했던 우즈가 과연 어떤 스윙을 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씻고 나오자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기다린 가족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함께 식사하느라 오후 경기가 이미 시작되었다.
다소 늦게 움직였으나 가까이 가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난리 법석이네요.”
“그러게.”
578야드 파 5홀에서 타이거가 352야드의 강력한 티샷을 페어웨이 정중앙에 꽂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데뷔 때부터 인정받은 장타자였지만 타이거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거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필상과 비슷한 이유인데, 아이언 샷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부상에 시달리는 몸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강하게 때리고 싶어도 한 번의 샷으로 경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서 늘 조심하고 힘을 비축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걱정에서 해방된 시원시원한 샷을 터트렸다. 오랜 전에 봤던 스스로에게 만족한 표정, 그걸 지켜보던 필상은 더 이상 지켜볼 이유를 찾지 못했다.
“가자.”
“겨우 한 홀 보고요?”
“찍어 맛을 봐야 된장인 줄 아냐?”
“큭! 알았어요. 그런데 너무 배려해 준 거 아닌가요?”
그 말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필상의 마사지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한 말이다. 또한 그가 경쟁하고 있는 김시우에게는 불리한 조건을 준 것이 미안하지 않느냐는 의미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필상의 대답은 간단했다.
“모든 게 다 운명인 거지. 오전에 김시우가 우드랜드도 잡았잖아. 타이거는 자존심을 찾은 것에 만족해야 할 거야.”
“형은 김 프로가 다음 스테이지에 오른다고 보는 거군요.”
“자격이 충분하더라고…….”
그걸 맞추면 용한 무당일 것이다.
하지만 성호는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도 김 프로가 뛰어난 선수인 것은 알지만 가장 살벌한 PGA 정글에서는 언제 자신을 잡아먹을 맹수가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상이 타이거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며 잡생각은 버렸다.
“오늘 우리 패밀리가 모두 이긴 거네요?”
“우리 패밀리?”
“하하. 아닌가요? 내가 볼 때 패밀리라고 해도 될 정도의 신뢰와 친분은 서로 쌓인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나야 영광이지.”
“지금까지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그게 아닐지도 모르죠.”
참으로 운이 좋았다.
슈퍼루키 운운하지만 PGA 시드를 가진 선수들은 모두 잠재적 경쟁자들이다. 특히나 명성이 높은 선수들은 좀처럼 서로 유대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평가는 엄연하지만 서로 비교되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이나 팬들의 눈에는 끝없이 경쟁하는 투사로 비치는 것이 유리하다.
타이거처럼 철저히 경기 외적인 부분은 공개하지 않는 신비한 이미지 관리가 더 호평을 받고 사생활이 침해받지 않기 위해서도 그런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아직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이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것도 자신이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맺어졌다는 것이 필상에게는 굉장한 행운이었다.
그런데 성호의 그런 시각은 마치 기고라도 한 것처럼 그날 저녁 한 언론에 비슷한 시점으로 부각되었다.
[TPK 사단 전승! K의 마법인가?]
T는 타이거 우즈, P는 필 미켈슨, K는 바로 필상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오랫동안 부진을 겪었던 TP에게 필상이 합류하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는 논조였다.
미켈슨은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자신이 필상의 다이내믹한 스윙을 따라 하기 위해 함께 연구하고 있다고. 필상을 자신의 코치라고 한 적도 있다.
그러니 필상의 등장이 미켈슨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이거는 그런 언급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가 본 시각은 이러했다.
자신의 전성기와 같은 강하고 정확한 필상의 스윙을 본 뒤, 각성한 것이라고.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함께 어울리는 사진을 그 증거로 첨부했다.
“콩. 밥 먹으러 가자.”
“저는 간단하게 때울 생각입니다.”
“타이거가 한턱 쏘겠다고 자네를 꼭 데려오라던데?”
“타이거가요?”
“응. 어제 마사지 효과가 대단했던가 보던데?”
“그럴 리가요. 하하하! 여하튼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으니 같이 가야겠네요.”
일단 짐을 챙겨 움직였다.
오후에 연습을 이미 충분히 했기 때문에 저녁을 거하게 먹는 것은 부담이 없었다. 그래도 가족들이 와 있어 다른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자제하려 했으나 타이거의 초대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타이거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공 프로.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나도 좀 끼워 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업 파트너가 되고 싶다고.”
그 말에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미켈슨이었다.
마치 기득권을 가진 사람처럼 살짝 흥분한 톤이었다.
“타이거. 우리 사업에 관심이 있나?”
“하하. 아직 우리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좀 이른 거 아니었습니까?”
그 말에 미켈슨은 당황했다.
먼저 말을 꺼내 긍정적인 대답은 들었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번 대회가 끝나면 구체적으로 논의를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타이거가 끼어들자 혼란스러웠다.
꼼꼼한 타이거가 저간의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 화두를 꺼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예상이 그를 난감케 했다.
하지만 필상은 그의 난처함을 덜어 줬다.
“필 형은 이미 저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같이 사업을 함에 있어 계약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서로에 대한 신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하. 역시!”
미켈슨의 호탕한 웃음은 마치 매치플레이에서 우승 퍼팅을 집어넣은 사람처럼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게다가 형이라는 호칭은 그 모든 것을 떠나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래 봐야 이제 투어에 합류한 한참 후배에 불과한데 지금 그의 태도는 다소 지나친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정감 어린 태도는 타이거에게도 무척 중요했다. 한 언론에서 표현한 TPK 사단이 필드에서뿐만 아니라 사업 부문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의 그런 마음가짐이 내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아. 민폐를 끼치지는 않을 테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해 줬으면 해.”
“저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아니, 오히려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두 분이 도와주시면 골프에 관련해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하. 뭉치면 더욱 강력하겠지.”
그게 중요했다.
각자 쌓은 명성과 업적도 거대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은 없다. 타이거만 해도 치명적인 아픔이 있고 그로 인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제한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서로 힘을 합친다면 그 파괴력은 골프계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섣불리 움직일 생각은 없습니다. 두 분이 합류하신다면 자금을 조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고요.”
“그렇겠지. 온갖 날파리들이 날아들 가능성도 높지.”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업을 주체적으로 이끌 수 있는 좋은 인력 풀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이미 준비된 것 아니던가?”
“네?”
“J&L의 라일리 대표라면 나도 신뢰할 수 있지. 실질적인 결과를 통한 검증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은 남지만.”
“하하하. 많이도 알아보셨네요.”
“자네는 사업을 추진할 인력 체계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리더의 생각이라고 봐.”
리더라는 표현이 나왔다.
그것에 대해 논의한 적은 없지만 암묵적인 동의는 이뤄진 셈이다. 미켈슨이나 타이거가 이번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가 바로 필상과의 친분에서 시작되었다.
때문에 필상이 구상하는 것이 바로 이 모든 일의 근간이 된다. 고로 자연스럽게 리더는 필상인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부담스럽기보다는 과분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인생을 산 경험이나 골프계의 지분을 생각해도 자신은 감히 견줄 수 없는 위대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아직 첫발도 떼지 않았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심스러운 이유였다. 여전히 너무 오지랖 넓게 일을 벌이는 게 아닌지 불안했지만 좌 미켈슨 우 타이거라면 뭐가 두렵겠는가!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자네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하군. 그러니까 오늘은 뭐든 마음껏 들라고. 하하하.”
이번에도 역시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또 한 명의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필상은 여러 사안에 대한 두 사람의 조언을 들었고 특히나 태국 국적의 모친을 둔 타이거에게 태국 골프에 대한 다른 시각도 접했다.
피부색은 흑인이지만 여러 민족의 피가 섞인 그가 순혈을 숭상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잘 대변한다고 필상은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지이지, 국적이나 피부색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오래전에 증명했음에도 세상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
-어허! 이거 아주 흥미롭네요.
-흥미롭다고요? 그렇게 접근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어제 샤르마에게 덜미를 잡힌 슈펠레가 한 홀 앞서고는 있지만 우리 공 프로를 누를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죠.
-골프는 상대적입니다. 버디에 버디로 맞받아치고 오히려 트러블 상황에서 칩인 버디를 기록한 슈펠레를 무시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공 프로가 임 캐스터처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아이고. 너무하세요! 우리 공 프로가 패하기를 제가 바라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전 무조건 공 프로가 멋지게 역전시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구박하셔도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두 중계진의 농담 어린 해설을 듣는 시청자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혹시 자만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댓글은 필상의 역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경기 양상은 조금 이상하게 흘렀다.
허 위원이 어제 걱정했던 상황이 단초가 되었다.
대회가 시작된 이래 처음 찾은 3번 홀에서 출발한 필상은 드라이브 티샷이 페어웨이 중앙을 가로지르는 카트 도로에 맞고 우측 러프로 튀었다.
아예 넘길 수도 있었으나 안전하게 때린 타구의 캐리가 324야드가 나온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희박한 확률이 적용되어 도로공사 협찬을 받는 줄 알았건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길고 질긴 러프에서 2온에 성공하지 못하자 슈펠레는 바로 핀에 붙여 버디를 잡아 냈다. 1다운에 불과하지만 지고 있다는 기분은 아주 찜찜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