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WCG 델 매치플레이
연습 라운드를 마치고 들어오는데 상당수의 기자들이 몰렸다. 그저 코스를 점검하는 연습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필상과 타이거는 기껍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미켈슨은 특유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보이며 기자들에게 다가갔다.
“우린 좀 빼 주세요.”
“오케이. 지구는 내가 지킬게. 먼저들 들어가.”
과연 필 형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지만 필상은 타이거와 함께 기자들의 인터뷰를 피해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미켈슨이 따라가려는 기자들을 손짓해 기삿거리는 자신이 제공하겠다고 너스레를 푸는 바람에 무사히 빠져나왔다.
“설마 우리 내기한 거 발설하지는 않겠죠?”
“하하. 늘 예상을 뛰어넘는 분이니까……. 오늘 자신이 1등을 했으니 그 자랑을 빼먹지는 않을 걸?”
“설마요.”
“두고 보라고. 하하하.”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가 돼서야 필 형이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그는 싱글벙글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왜 그렇게 기분이 좋으십니까?”
“스포츠 언론들이 맛있게 먹을 저녁 기삿거리를 제공해 줬어.”
“뭔데요?”
“저녁 먹을 때쯤이면 다 알 수 있을 거야. 기다려 봐.”
다른 사람의 입이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있던가?
적어도 필 형은 필상이 믿고 따르는 선배다. 뒤통수를 때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의 미소가 영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저녁을 먹으러 가기도 전에 이 대표가 달려왔다.
“필과 골프 사업을 같이 하기로 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번뜻 스치는 것이 있긴 했다.
그는 필상의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언급했었다. 하지만 확정된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놀란 이 대표의 이어진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필 미켈슨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면 성공 가능성은 한결 높아질 것 같아요.”
“구체적인 얘기는 아직 못 했습니다. 충분한 자금이 확보된 것도 아니고 이제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더더욱 사업은 뒤로 미뤄질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이 대표는 그 사업에 자신도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동안 필상의 사업 구상을 검토하며 여러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중요한 것은 자금이 아니라 경쟁력이다.
필상이 아시아 최고를 넘어 PGA를 대표하는 선수로 거듭나면 그 이름은 골프에 관한 대명사가 될 게 분명했다. 뭘 해도 골프와 관련된 사업은 잘될 수밖에 없다.
아시아 국가 중에 골프 인프라가 좋은 몇몇 나라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사실 빛 좋은 개살구인 경우가 허다하다.
화려한 외면에 비해 수익성은 최악인데도 계속 골프 코스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파산하는 곳도 흔할 수밖에 없다.
“골프장 체인 사업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고 싶어요.”
“이미 여러 회사가 있잖아요.”
“네. 하지만 한국과 일본, 태국과 같은 아시아 골프 주요 국가를 연계하는 다국적 골프 체인은 유명무실하죠.”
“너무 덩어리가 큰 거 아닌가요?”
“그래서 일단은 무리하지 않고 거점 클럽을 먼저 몇 개 만들고 추이를 보면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체인을 늘리는 방안이 적절할 것 같아요.”
“거점 클럽이라…….”
얼핏 잡아도 한국, 일본, 태국처럼 인프라 좋은 곳은 적어도 3개의 코스는 있어야 할 것 같고 중국이나 요즘 뜨고 있는 베트남도 골프를 즐기기 위해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소위 한국의 명문 클럽 멤버십이 얼마나 하는지 알죠?”
“엄청 비싸더군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지 않는데.”
“모든 비용을 회원들에게 분담시키는 구조이기 때문이에요. 대기업이 운용하는 곳을 빼면 죄다 거품이라고 봐야죠.”
“폭락한 회원권 소송이 많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골프 클럽의 회원권을 거금을 들여 사지만 자산의 가치로 인정받지 못하고 폭락할 경우 골프장이 파산하기도 한다.
애초에 골프장을 만들어 운영하는 구조가 수익을 내기 위한 기업적인 마인드로 출발하는데, 실제 소요 자금은 회원들이 부담하는 아주 기이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회원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적극 경영에 참여해 이익이든 손해든 함께하는 서구의 스포츠클럽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운영된다.
“멤버십 클럽은 회원이 주인이어야 하는데 설립 운영자는 꿀만 쪽쪽 빨아먹으면서 회원을 돈만 내는 호구로 보는 게 가장 큰 문제죠.”
“거금을 내고도 회원 대우를 못 받는 셈이네요.”
“애초에 프라이빗 클럽이라는 이름을 내거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인 거죠. 돈을 낸 이들이 직접 운영을 하거나 대리 경영을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물주인 거니까요.”
“그런 폐쇄적인 멤버십 클럽은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도 아닙니다. 하지만 멤버십을 팔아야겠지요. 전혀 다른 개념의!”
한국만 해도 국외로 골프를 치러 나가는 골퍼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실제 구매력이 높은 골퍼들이 이제 보다 다양한 코스에서의 플레이를 원한다.
고객의 취향에 따라 적절한 대가를 지불받고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골프 체인이 가진 장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고객의 신뢰일 것이고 실질적으로 경제적인 골프를 즐길 수 있도록 좋은 코스를 보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 코스를 만들 수도 있고 적절한 매물을 인수해 새롭게 단장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경영의 묘이지, 한 번에 왕창 벌려고 하는 기회주의적 마인드는 금물이다.
“아주 흥미로운 얘기네.”
“관심이 있으십니까?”
“나도 인생의 끝자락으로 향하고 있으니까. 하하하.”
타이거도 관심을 보였다.
신중한 그는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의사는 밝히지 않았으나 그가 골프 코스 설계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은퇴는 정해진 수순이고 명예롭게 떠날 시기를 저울질할 때가 아직은 아니기 때문에 관망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필상은 느꼈다.
그가 여생을 그냥 가진 것을 소모하며 살지는 않을 것임을.
골프와 관련된 일을 할 것이고 그가 가진 영향력을 고려하면 그의 관심은 아무리 적어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
“콩. 오늘 오후 조지?”
“네. 두 분은 오전에 나가시나요?”
“응. 가볍게 이기고 응원하러 갈 거니까 기다려.”
“저도 심심하면 구경 가겠습니다.”
“샤르마가 편한 상대라고 너무 무시하면 큰 코 다칠 수도 있어. 조별 리그에서는 1차전이 가장 중요하거든.”
“월드컵을 통해 진즉에 깨닫고 있습니다.”
“하하. 그러고 보면 한국은 작은 나라인데, 축구는 항상 월드컵에 고개를 내밀더라고?”
“미국보다야 훨씬 낫죠. 랭킹은 낮지만.”
“어허! 축구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 여하튼 나중에 얘기하자고.”
드디어 대회가 개막되었다.
4명씩 한 조를 이뤄 3일간 조별 예선을 치른다. 오로지 1등만 16강에 진출해 토요일에 4강까지 확정을 짓는다.
그리고 일요일 오전에 준결승을 치르고 오후에 3, 4위전과 우승자를 가리는 결승전을 치르는 상당히 긴 여정이다.
우승하려면 총 7번의 경기를 치르는데 예선에서는 전승이 필요 없지만 토너먼트로 넘어가는 16강부터는 지면 바로 짐을 싸야 한다.
2승을 기록한 필상은 어느새 세계 랭킹 7위까지 치솟았다. 만약 이번 대회를 우승하고 상위권이 흔들리면 루키가 2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너무 설렁설렁 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런가?”
오늘 16경기는 오전에 16경기는 오후에 열린다.
때문에 아침부터 연습을 시작한 필상은 다소 무료했다.
매치플레이는 1타라도 더 줄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냥 맞상대하는 선수보다 잘 치면 그만이기 때문에 경기에 대한 압박감이 훨씬 덜했다.
어떤 선수는 매치플레이에 유독 약해 평소와는 다른 경기력을 보이기도 하지만 필상은 자신 있었다.
오늘 자신이 상대할 슈방카 샤르마는 23살의 신인으로 특이하게도 인도 출신이다. 주로 아시안 투어에서 활동하고 인도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유러피언 투어에서 2승을 거두며 PGA 대회에 가끔 초청받았는데 모두 컷을 통과했다. 10위를 기록한 적도 있어 랭킹 62위로 턱걸이 했다.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밝히길 이번 대회에 출전해 필상과 겨루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정말 편안한 하루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도저히 좀이 쑤셔 안 되겠다.”
“오늘 따라 왜 이러세요?”
“필 형 응원이나 가자.”
“정말이요?”
“경기 모습을 직관하면 그것도 나름 도움이 될 거야.”
라이더 컵과 같은 단체 대항전이 아닌 경우, 대회에 나서는 선수가 갤러리로 참가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도 오후에 경기가 잡힌 필상이기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상은 성호와 함께 8번 홀에 접어든 미켈슨의 경기를 보러 갔다. 갤러리들의 환호성에 경기 중인 미켈슨이 필상을 확인하고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올 스퀘어라니. 믿기지가 않네요.”
“찰스 하웰 3세는 결코 녹록한 선수가 아니야. 저 엄청난 딜레이 히팅을 봐. 이번 시즌 아이언 정확도가 투어 2위던가 그럴 거야.”
“그래도 투어 20년차인데 3승은 좀 너무 얄팍하지 않나요?”
“우승은 적지만 꾸준한 선수라고 봐야지. 프로는 상금 순위가 중요하잖아.”
“그렇긴 하네요.”
“그전 같으면 오히려 필 형이 더 쉽게 잡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자신이 가다듬으려고 하는 샷을 가장 잘하는 상대를 만났기 때문에 당황스러울 거야. 그게 너무 눈에 잘 보일 거거든.”
필상의 지적은 정확했다.
79년생인 찰스는 나이가 적지도 않다. 신장도 179cm이니까 결코 덩치가 좋은 선수도 아니다. 하지만 드라이브 비거리가 쳐지지 않으며 아이언은 상당히 정교하다.
바로 핸드퍼스트를 철저히 지키는 교본 같은 스윙, 그리고 체중 이동이 상당히 잘 이뤄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보다 정교한 스윙을 원하는 미켈슨의 눈에는 그것들이 너무 잘 보였을 것이다. 때로는 자신도 시원하게 보여 줬고 때로는 이전 스윙이 나오면서 오르락내리락 했던 것이다.
8번 홀 공략도 그런 양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티샷을 346야드나 날리고 141야드 세컨샷을 그린에 올리지 못하다니!”
“찰스가 316야드에 173야드를 너무 쉽게 올리니까 그 영향을 받은 거지.”
“형의 시선이 부담스러운가 봐요. 늘 여유 만만한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어요.”
“하하. 칩샷 볼만하겠네!”
필상의 예상은 적중했다.
미켈슨은 23야드 칩샷을 아예 처음부터 넣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그린의 라이까지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말 확 넣어 버렸다. 칩인버디!
정말 어려운 걸 성공한 그에게 갤러리들의 뜨거운 환호가 터졌지만 그저 씩 웃으며 공을 집으러 가는 모습, 언제 심각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여유 그 자체였다.
“가자. 더 볼 것도 없어.”
“잠깐만요. 찰스 퍼팅은 봐야죠.”
“뭘 봐. 나라면 모를까, 넣지 못한다에 1달러, 오케이?”
“요새 전염된 겁니까? 툭 하면 1달러야!”
결과는 또다시 필상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알다가도 모르는 게 골프라지만 이런 경우를 극복하는 선수는 극히 드물다. 기선이 제압당한 것인데 만약 그 와중에 어려운 퍼팅을 성공하면 오히려 미켈슨이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필상이 떠나는 것을 보며 손을 흔들어 보인 미켈슨의 이후 경기는 보지 않아도 리드를 이어갈 게 뻔했다.
“어디로 갈까요?”
“14번 홀.”
“호랑이 아저씨요?”
“아니. 김시우.”
“아! 맞다. 김 프로가 타이거랑 1차전에서 붙죠!”
“김시우가 작년에 강적들을 누르고 16강에 올랐잖아. 생긴 건 곱상해도 샷은 아주 날카롭다는 거지.”
“형 빼고 한국 선수 중에 랭킹이 가장 높은 선수는 안병훈 프로이고 그 다음이 김 프로더라고요.”
“95년생이면 앞길이 창창하네. 그런데 임성재가 요즘 좀 밀렸나 보네. 톱 10에도 몇 번 드는 것 같더니.”
“2년차가 원래 생각처럼 잘되지 않잖아요. 하지만 잠재력은 굉장한가 보더라고요. 전문가들의 평도 좋고요.”
“전문가? 됐다 그래!”
그놈의 전문가라는 자들에게 참으로 많이도 당했다.
일본에서, 또 미국에서 스스로 기득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편파적인 재단에 적잖은 파편을 맞았던 필상은 과연 그들이 골프를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골프를 자신들의 밥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행태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다 크게, 보다 멀리 본다면 골프 저변의 확대가 더 중요한 과제이고 배타적인 행태가 얼마나 제 살 깎아 먹기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골프 역사와 인프라를 생각하면 아직도 후진적인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양한 국적과 인종이 최고의 자리를 위해 각축하는 것이야말로 골프의 세계화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다.
“와우! 이거 뭐죠?”
“하하. 타이거가 한국 선수에게 징크스라도 있나?”
“그럴 만도 하죠. 3라운드까지 선두를 유지했을 때 단 한 번도 역전을 허용치 않았던 불패신화가 양 프로님에게 깨졌잖아요. 그 해에 대형 스캔들이 터졌고.”
샷건 방식이라 이제 겨우 9개 홀을 마쳤는데 의외로 김시우 프로가 2업으로 앞서 있었다. 우즈가 최근 살아나는 기미를 보였기 때문에 그 결과는 팬들에게 더 충격이었다.
물론 아직 남은 홀은 많다.
그러나 2홀을 앞선 김시우는 상대가 천하의 타이거임에도 흥분하는 모습은 일체 없었다. 침착하게 파온에 성공한 뒤, 우주와 똑같이 파를 지켜 승리에 한층 다가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