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기이한 조합
“생각만큼 쉽지는 않네요.”
“라이가 평평한 곳이 별로 없어서 그럴 거야. 매번 트러블 샷을 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정말 그러네요. 하하하.”
연습 라운드를 진행했다.
대회를 준비하기 때문에 라운드에 제한을 뒀지만 미켈슨에 미스터 퍼펙트까지 합류한 팀을 말릴 수는 없었다.
코스 컨디션 점검이라는 미명 아래 일찍 도착한 혜택을 누렸다. 그런데 연습 라운드 성적은 의외였다. 상당히 난해한 것 같았지만 처녀 코스에서 이븐 파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역시 퍼펙트네!”
“왜 이러십니까. 선수끼리!”
“내가 겨우 2업으로 이겼거든.”
“하하. 혼자서 그걸 계산하고 계셨던 겁니까?”
“내 최근 컨디션을 감안해 예선전을 가볍게 통과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강적이 바로 자네잖아.”
“그럼 내일부터는 내기를 하시죠.”
“내기?”
“네. 1달러 내기.”
“하하하. 그거 좋지. 그런데 짐한테 1달러 받았어?”
“네. 스코어 카드 제출하러 들어갔는데 거기서 주더라고요.”
“타이거도 곧 기부할 거야. 만 달러.”
“기존에 하던 기부와는 별개로 하겠죠?”
“그럴 거야. 그런 건 확실한 친구니까.”
그런데 라운드를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들어오던 필상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멀리 클럽하우스 앞 벤치에 앉은 분이 너무도 눈에 익은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왜?”
“우리 엄마가…….”
필상의 뒷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말하다 말고 돌연 쏜살같이 달려갔기 때문이다.
미켈슨은 필상의 가족이 한국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뜬금없이 엄마를 언급하며 달려가는 필상의 뒷모습을 보더니 덩달아 그도 쫓아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만 오시지는 않았을 테고 미인으로 이름난 필상의 아내, 모모코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
“어? 필상아.”
무척 피곤하셨는지 벤치에 기대 눈을 감고 계셨던 분이 자신의 모친임을 확인한 필상은 부리나케 달려가 안았다.
1.4 후퇴 때 헤어진 가족을 상봉한 것처럼 부둥켜안은 두 모자(母子)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어린애들이 조르르 달려 나왔다.
“외삼촌!”
“이 자식들. 여기 어떻게 왔어?”
“비행기 타고 왔어요. 무진장 오래 걸렸어요. 크크크.”
뒤를 이어 누나들과 자형들, 그리고 마침내 모모코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와 떨어지기 미안했지만 필상은 냉큼 달려가 그녀를 먼저 안아 들었다.
“흐흥……. 어지러워요.”
“이 깜찍한 여자!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짜짠! 이벤트를 해 주려고 했죠.”
“성공했네. 나 엄청 놀랐으니까.”
“미국 온 거 뭐라 그러지 않을 거죠?”
“당연하지. 지난 주 우승 때 당신이 없어서 얼마나 서운했는데. 잘 왔어, 정말 잘 왔어.”
당황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았다.
온 가족을 몽땅 데리고 나타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그 먼 길을 다 데리고 온단 말인가!
물론 싫지 않았다.
자기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해 준 것이 오히려 고마워야 옳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다가오기 무섭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 이는 바로 미켈슨이었다. 그새 오면서 성호에게 인사말을 배운 것 같았다.
흐뭇한 것은 그가 가장 연장자인 엄마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이 아주 재미있었다.
“이 양반은 누군데 나한테 인사를 하지?”
미켈슨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누나나 자형들, 그리고 꼬맹이들도 알아봤다. TV 중계를 통해 낯이 익었던 것이다.
용케 큰 누나 아들, 규민이가 옆에서 코치를 했다.
“할머니, 외삼촌이랑 친한 골프 선수에요. 엄청 유명한.”
“어? 그러고 보니 낯이 익기는 하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서신 엄마는 미켈슨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이스 미추’라는 영어를 구사하시면서.
“하하하. 저는 공 프로가 형이라고 부르는 필입니다, 필! 그러니 당신은 제 어머니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영어를 알아들으실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가 강조한 것이 이름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아들으시고는 필이라고 부르시며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대충 의미는 전달된 셈이다.
별장으로 이동한 대가족은 급기야 별채를 개방했다.
미켈슨이 얼른 집주인에게 연락해 그가 직접 열쇠를 가지고 왔다. 그는 다른 얘기는 하지 않고 필상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성호야, 볼 좀 가져와.”
필상은 자신이 사용하는 공에 직접 사인을 해 건넸다. 그리고 필상은 물론 가족들과 함께 인증 샷도 찍어 줬다.
자신은 필상의 팬이라며 너무도 좋아하는 모습에 가족들이 모두 흐뭇해했다. 그날 저녁 대가족은 오스틴 시내의 유명 레스토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미켈슨이 제대로 한 턱 쏘겠다고 호의를 베푼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눈도 맞추고 말도 섞어 주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런 모습을 지켜본 미켈슨은 굉장히 부러워했다.
이런 대가족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것이다.
“이 대표님은요?”
“모레쯤 합류하실 거야.”
“같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요란한 저녁 식사와 수다까지 흠뻑 나눈 가족들은 각자 침실로 향했다. 그제야 모모코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서로 통화해 오해는 풀었지만 아직 얼굴을 대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달이 발생한 걸 안 그날 아침부터 LA로 떠나 아직도 관련된 일을 처리하느라 오스틴에 합류하지 못했다는 말에 상당히 안타까워했다.
“그녀도 피해자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자신보다는 내 이미지가 손상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 같더라고. 일부 몰지각한 이들에게는 법적인 책임도 묻겠다는 걸 말리느라 힘들었어.”
“그래도 일단 액션은 취하는 게 좋죠. 다시는 그런 일이 재현되면 안 되잖아요.”
“재현되지 않을 거야. 아주 비싸게 배웠으니까.”
모모코는 그걸로 기사화되었던 내용에 대해서는 끝을 냈다. 이미 오해도 풀었지만 이 대표의 근황을 얘기하며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은 것으로 만족한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여길 올 생각을 다 했어?”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고 어머님도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당신은 아니고?”
“그야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서 안아 줘요.”
“으음……. 당신이 품이 그리웠어.”
수다를 떠느라 금쪽같은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게 아쉬웠던 필상은 아주 오랜만에 모모코와 뜨겁게 달아올랐다.
***
“가족들은?”
“투어 나갔어요.”
“같이 가지 왜?”
“가고 싶다고 그랬다가 엄마한테 한 소리 들었습니다.”
“한 소리?”
“여기 뭐 하러 왔냐고 물으시더라고요.”
“하하하. 정확한 말씀이시네.”
미켈슨은 이른 아침을 먹고 바로 연습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필상은 이 대표와 통화해 가족들의 일정을 잡아 주느라 지체했던 것이다. 하루 앞당겨 이 대표가 오늘 저녁에 도착하면 이후 일정은 알아서 할 것이라 한숨 놨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요.”
“많이 뺀 것 같은데 아직도 그렇게 보여?”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 그래요. 강하게 치려는 의지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힘이 아니라 스피드라는 걸 자꾸 잊어버리는 거죠.”
세게 치면 빠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상체에 힘이 잔뜩 들어가면 오히려 스피드에는 방해가 된다. 스윙 스피드를 올리려면 단지 다운 블로우 때 왼손이 당겨 주는 힘만 강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 이론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몸에 배었던 습관을 버리는 게 결코 간단치가 않았다. 그래서 어제와 달리 오늘은 필상이 코치가 되었다.
“서로 상승작용을 하는 것 같아요.”
“흑돈아. 내가 훨씬 이득이야.”
“왜요?”
“내가 더 오래 투어에서 버틸 거잖아.”
“하하하. 그것도 말이 되네요.”
미켈슨의 평가에 따르면 필상의 가장 큰 장점은 나쁜 습관이 없다는 것이다. 골프를 오래 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치 않는 버릇이 생기는데, 그게 묘하게도 일정한 패턴을 이루며 반복된다고 했다.
그런데 필상은 적절한 시기에 탁월한 감각을 얻어 스스로 자신의 스윙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좋아졌다.
그래서 일관성이 높은 레벨에서 일정하게 유지되었고 웬만해서는 미스 샷이 나오지 않고 정확한 샷의 구현이 가능했다.
“어서 오세요.”
“제가 기다리다가 맞이했어야 하는데 너무했어요.”
“기밀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 저희들이 오는 걸 알면 바로 오빠가 눈치챌 것 같았거든요.”
“아! 여하튼 미국에 온 걸 환영해요. 어머니, 잘 오셨어요.”
이 대표가 별장에 도착했다.
모모코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누나들도 다들 반겼지만 유독 엄마는 냉랭했다.
스캔들이 모두 허구였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여전히 불편하신 것 같았다. 어쩌면 며느리의 편을 들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이 대표가 온 뒤로 필상은 오로지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얼마나 자신에게 소중한지 확인시켜 준 대목이었다.
***
WGC 델 테크놀로지는 세계 랭킹 64위까지만 출전이 허용되는 PGA에서 가장 유명한 매치플레이 방식의 대회다.
WGC시리즈는 상금 규모가 워낙 커서 이 대회 출전이 확정된 선수들은 한 주 전에 열리는 발스파 챔피언십을 건너뛰며 컨디션 조절까지 한다.
반면 세계 랭킹을 높이기 위해 발스파 대회에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도 있다. 만약 부상이나 여타의 이유로 출전하지 못하면 차순위 선수에게 기회가 주워져 보통 랭킹 70위까지 이곳에 와서 출전 대기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헛물만 켜다 돌아가는 선수들도 있다면서요?”
“그렇다고 하더라.”
“그러고 보면 형은 참 축복받은 인간이에요?”
“인간? 아주 기어오르네?”
“그 말이 아니잖아요. 어? 타이거가 도착했어요.”
필상도 타이거라는 이름이 나오자 연습장 입구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역시 필상을 향해 손을 흔들며 곧장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미켈슨과 나란히 타석을 잡고 연습하고 있어서 그의 발걸음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의 뒤로 기자들 몇 명이 따라붙은 광경은 부럽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서 오십시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닌가?”
“필 형한테 한 수 지도 받고 있습니다.”
“내가 들은 말과는 좀 다른데? 그렇죠? 필.”
“내 밑천이 짧아서 곧 그렇게 될 것 같기는 해. 잡담하지 말고 어서 몸이나 풀어. 연습 라운드 나갈 거니까.”
“저도 끼워 주십니까?”
“끼워 달라고 미리 연락한 거 아니었어?”
“하하. 들켰네요.”
보통 경쟁 관계에 있는 선수들은 함께 라운드를 하지 않는다. 더욱이 타이거와 미켈슨은 천하에 둘도 없는 경쟁자였기 때문에 늘 견원지간처럼 비춰졌다.
하지만 둘 다 인생의 쓴맛을 보고 난 뒤, 어쩌면 더는 최고의 선수가 아님을 인정하기 시작한 뒤로는 부쩍 친해졌다.
재작년 마스터스를 앞두고 함께 연습 라운드를 나간 장면은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니라 같은 길을 가는 동반자처럼 보였다.
흑인과 백인, 우타와 좌타, 냉정한 카리스마와 서글서글한 미소, 맹렬한 어퍼컷 세리머니와 차분하게 엄지손가락만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 둘은 참 많이 다른 스타일의 선수다.
하지만 오늘 필상과 함께 셋이서 연습 라운드를 나갔다.
[타이거와 필, 그리고 Mr. 퍼펙트. 이 조합은 대체 뭔가?]
가십성 기사였지만 많은 골프팬들이 관심을 보였다.
일단 지난 대회에서 타이거와 필이 전성기 때처럼 화려한 경기력을 보이며 살아났고 하필이면 그들의 바로 위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필상과 어울리는 것이 기이했던 것이다.
경쟁할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처럼 함께 연습하고 동반 라운드까지 같이 나가는 것이 적절치 않아 보였다.
그래서 기자는 기상천외한 추론을 나열했다.
두 명의 대선배는 슈퍼루키인 필상에게 자신들의 비기를 모두 전수해 후계자로 삼으려고 한다는 게 골자다. 필상을 통해 자신들의 명예를 지속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 기사에 달린 댓글 중에 눈에 띄는 것이 몇 개 있었다.
-두 괴물의 뒤를 이을 나이 어린 천재 골퍼는 수없이 많다. 하필 30대 동양선 수에게 그럴 이유가 뭐지? 말도 되지 않는 판타지 소설 쓰지 마라.
-헛소리! 타이거와 필은 아직 PGA 최고의 선수들이다. 그들의 명예에 흠이 가는 낙서 따위는 사절한다.
-타이거와 필의 위대한 업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위대한 영웅의 명예를 더 이상 더럽히지 말기를 충고한다.
-미스터 퍼펙트의 출중한 기량은 인정하지만 그는 아직 증명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았다. 필이나 타이거와 견주는 당신의 어리석음에 조의를 표한다.
여전히 우즈와 미켈슨의 아성을 높게 평가하며 감히 필상을 그들과 견주는 것 자체를 혐오하는 댓글들이 많았다.
매년 촉망받는 선수들이 등장하지만 아직 그들을 뛰어넘는 슈퍼스타가 나오지 않는 것이 그 증거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국적을 의심케 하는 호응도 높은 댓글들도 보였다.
-둘의 기술까지 몽땅 흡수하면? Mr. 퍼펙트는 골프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건가? 부드러운 카리스마? 그거 좋다!
-지난주에 이미 증명되지 않았나? 루키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완벽했다. 우즈의 정교함, 필의 과감함을 그는 이미 갖췄다. 비기는 개뿔!
-가정 무서운 적은 가까이 두라고 했다. Mr. 퍼펙트의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굳이 갓 데뷔한 한국 선수와 어울릴 이유가 없다. 둘은 누가 지존이 될지 알아본 것이다.
-기자의 통찰력에 한 표!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