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34화 (134/354)

134. 오스틴

“여보. 나 우승했어!”

본인도 이런 촌스러운 멘트를 날리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넘쳐흐르는 감동을 달리 전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답이 없어 가슴이 철렁한 순간, 모모코의 음성이 들렸다.

‘지금 전 화상 통화하고 있어요. 오빠의 모습이 다 보여요.’

“그래? 꼴이 말이 아닐 텐데?”

‘아니에요. 이렇게 멋진 남자가 또 어디 있다고. 오빠,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다시는 당신 걱정 끼치지 않을 게.”

[2전 2승 미스터 퍼펙트! 새로운 황제의 등극인가?]

[더 플레이어스. 악천후에도 최고의 시청률과 관중 수 기록. 세대 교체의 신호탄인가? 이런 루키는 없었다.]

[전성기의 타이거 우즈를 방불케 하는 완벽한 경기 운영, 더 이상 그를 과소평가할 전문가는 없다.]

모든 스포츠 언론들이 일제히 필상의 극적인 우승 소식을 알렸다. 예상하면서도 설마 했던 일이 정말로 실현되자 그 반향은 더욱 강력했다.

특히나 경기를 함께 치렀거나 경쟁했던 선수들의 증언은 하나같이 골프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완성된 최고의 테크니션입니다. 완패를 인정하고 다시 만나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하하하.” -짐 퓨릭

“그와 경쟁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무엇보다 대단하게도 자신을 향한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을 극복하고 당당히 우승한 그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냅니다.” -타이거 우즈

“미스터 콩은 제 친구입니다. 겸손한 그는 제게 형이라고 부르지만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배웁니다. 그가 PGA에 더 많은 출전 기회를 갖도록 격려하고 응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위대한 영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 미켈슨

그 외에도 여러 선수들이 필상의 우승에 대한 코멘트를 남겼는데 대부분 두려울 만큼 대단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시상식이 끝난 뒤 우승 인터뷰에 응한 필상은 여전히 몸을 낮췄다. 2위 미켈슨과 3위 우즈가 함께 참석해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오히려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우승 소감부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를 믿고 성원해 주신 팬 여러분, 또 골프를 사랑하시는 모든 골퍼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이해되는데, 미스터 퍼펙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골프 팬도 많지 않았나요? 굳이 그런 분들에게도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들의 관심과 성원이 저를 향하지 않더라도 결국 제가 좋아하는 골프를 계속할 수 있는 근간이기 때문에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덕분에 제가 먹고사니까요.”

-하하하. 그분들의 성원까지 독차지하고 싶은 거겠죠?

“물론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프로입니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고 그에 보답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분위기 좋은 인사말들이 오간 뒤, 드디어 민감한 화제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건 피치 못할 관문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 출전해서 두 번 모두 우승을 거뒀는데, PGA 프로들의 기량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경기에 집중했고 특히나 오늘은 어떻게든 타수를 잃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팬들이 보시기에 답답해 보이지 않았을지 솔직히 걱정도 했습니다.”

-아주 냉정한 승부사라는 평가가 있던데, 사실은 떨리고 두려웠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최근 제가 컨디션이 좋기는 하지만 기본 기량이 앞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더욱 가다듬어 옆에 계시는 두 분처럼 PGA 역사에 오래 남을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입을 열 때마다 너무도 빈틈이 없어 꼬투리를 잡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차라리 건방진 모습을 보였다면 어떻게든 물고 늘어졌을 텐데 두려워 이를 악물었다는 루키에게 무엇을 더 따지겠는가!

그러나 필상이 피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이미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올 시즌 한국과 일본 투어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데, 그건 PGA 시드를 확보하지 못했을 때 발언이고 이제는 생각을 좀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제 개인적인 신념이고 또한 팬들과의 약속입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자신의 말을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꾼다면 그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한국과 일본 투어를 함께 뛰면 비는 주간이 거의 없는데 그건 PGA 대회에 거의 출전하지 않겠다는 말씀 아닌가요?

그 대목에서는 타협이 필요했다.

당장 겨울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투어가 열리지 않아 기회를 얻었는데 실속만 쏙 빼먹고 빠지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입에 올리는 것이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미리 염두에 뒀던 계획을 밝혔다.

“KPGA가 가장 기본이 될 겁니다. 아쉽지만 많은 대회가 열리지 못해 6개 대회에 출전할 계획이고 JGTO도 그 기준에 맞출 생각입니다. 때문에 확정된 대회는 대략 12개, 남은 주간에는 최대한 미국 팬들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와우!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네요.

1년은 52주다.

매주 대회가 열리는 것은 아니지만 산술적으로만 본다면 아시아 대회를 12개만 참가하면 남는 주간이 상당히 많다.

실제 이동 시간이나 전지훈련을 제외하면 생각만큼 많을 수 없지만 그래도 여러 대회에 출전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을 오가면 앞뒤로 한 주씩 비워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아는 전문가들은 대략 10여 개 대회에 출전한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거기에 누구나 참가를 원하는 메이저 대회들을 제외하면 결국 평범한 투어 대회의 출전은 아주 선별적일 수밖에 없다. 그걸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는 순간, 필상의 매니지먼트 회사는 수많은 전화에 시달릴 것 같았다.

“전에 무슨 회사를 다닌 거야?”

“왜요?”

“혹시 비싼 물건 팔러 다녔어?”

“비슷한 일을 하기는 했죠. 근데 그건 왜 물어요?”

“너무 말을 잘해서.”

“영어가 짧아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씨!”

원래 미켈슨은 바로 오스틴으로 갈 계획이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집에 들려 며칠 쉬다가 WGC 델 매치플레이에 참가할 생각이었는데 필상과 합류했다.

그는 짧지 않았던 여행 내내 필상의 과거를 캤다.

아무리 봐도 전직이 의심스럽다나?

***

“필상이가 기겁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모모코랑 같이 가는데 설마 구박이야 하겠어요. 미국까지 건너갔는데 쫓아낼 수도 없잖아요.”

“그래도…….”

인천공항에 대부대가 떴다.

대략 세 가족 이상으로 보이는 그들이 향한 곳은 달라스를 경유한 오스틴이었다. 필상이 출전하는 대회를 관전하기 위해서였다.

큰누나, 둘째 누나, 막내 누나와 자형들, 그리고 어린 조카들도 4명이나 따라붙었다. 물론 그 대부대를 이끄는 인솔자는 시어머니 곁에 딱 붙은 모모코였다.

그녀를 알아본 골프팬들이 사방에서 카메라를 눌러 댈까 두려워 완전 변장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는 했지만 대부대의 인파에 가려 무사히 비행기 탑승에 성공했다.

***

“120년이 된 코스라더니, 멋지네요.”

“내 기억에는 그다지 멋지지 않아.”

“그럼 올해 새로운 기억을 만드시면 되겠네요.”

“그래야지.”

오스틴 컨트리클럽에 도착했다.

숙소로 잡은 별장이 멀지 않아 일단 코스부터 확인코자 왔는데 전통 어린 클럽답게 독특한 레이아웃이 눈에 띄었다.

거대한 석회암 석판 위에 코스를 조성했기 때문에 홀의 경계나 해저드 주변의 바위가 끔찍한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언듈레이션이 상당히 심하네요.”

“항아리 벙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일단 스케일이 무척 크다는 느낌부터 받았다.

그린이 농구장처럼 커서 파온은 어렵지 않아 보이는 대신, 잔디의 기복이 심하고 러프는 관리가 안 된 것처럼 거칠었다.

미켈슨이 얘기한 항아리 벙커는 자비를 허락하지 않는 형태였다. 거기 빠지면 키가 큰 필상도 다음 샷의 방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깊었고 그라스 벙커도 상당히 많았다.

전반은 파 35, 후반은 파 36 코스로 대체적으로 전장이 길고 자연과 잘 조화된 친환경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120년이라는 세월은 인위적인 코스를 주변 환경과 완벽히 동화시키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전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렇지. 이런 코스에 오면 욕심이 나. 갖고 싶다는.”

“능력이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

“자신이 없어. 욕심은 있지만.”

골프 선수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코스를 갖고 싶어 한다. 평생 남이 만들어 놓은 무대에서 경쟁만 하는 것이 때로 피에로처럼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프를 좋아하고 즐기는 것과 골프장을 운영하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다. 쉽게 보고 함부로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본 선수들이 많았기에 미켈슨도 마음은 간절하나 포기한 것 같았다.

“전 골프 코스를 만들고 있습니다.”

“정말이야? 어디에? 한국에?”

미켈슨은 단숨에 관심을 드러냈다.

미처 자신도 엄두를 내지 못한 영역에 젊은 필상이 손을 댄 것이 놀랍고 또 걱정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태국 가 보셨습니까?”

“가 봤지. 좋은 코스가 많은 나라더라고.”

“코스를 관리하기도 좋은 풍토를 가진 나라지요.”

“그럼 방콕이나 파타야, 푸켓 같은 곳에 골프 코스를 만드는 건가?”

“아닙니다. 일단 아담한 코스를 하나 인수했습니다. 콘깬이라고 태국 중북부의 거점 도시입니다.”

“콘깬?”

수도인 방콕과 대표적인 휴양도시는 알지만 관심이 없었던 콘깬이라는 도시는 처음 들어본 것 같았다.

하기야 한국을 비롯한 겨울이 추운 나라 선수들은 동남아에 전지훈련을 가지만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어 미국 내에서도 얼마든지 겨울에 연습할 장소를 구할 수 있다.

그냥 대회에 참가하거나 휴양을 위해 방문했기 때문에 그가 아는 곳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걸 파악한 필상은 자신이 구상하는 계획의 일부를 털어놨다. 그런데 그는 생각보다 훨씬 큰 관심을 드러내며 별장에 도착할 때까지 꼬치꼬치 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나도 같이 끼어 줘. 원하는 만큼 투자할게.”

“하하하. 한 번 가 보지도 않아 놓고 너무 성급하시네요.”

“그야 가 보고 나서 결정하면 되지. 그렇게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라면서.”

“저야 형이 합류한다면 언제든 환영이죠. 필 미켈슨이라는 이름만 갖다 걸어도 대박이 날 테니까요.”

“대박?”

“큰 성공을 할 거라고요.”

“손해만 안 보면 난 기꺼이 투자할 용의가 있어. 내가 볼 때 자네 계획은 그게 끝이 아닐 것 같거든.”

“전직이 세일즈맨이었다니까요.”

“하하하. 세일즈맨? 그래 평생 골프만 한 나보다는 낫겠지.”

숙소로 잡은 별장이 어딘가 했더니 골프 코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4번 홀 그린 뒤에 위치한 언덕 위의 대저택이었다.

평소에는 집주인이 거주하지만 대회가 열리는 기간에 목돈을 주고 아예 집을 통째로 빌려 사용한다고 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저택에 들어선 필상은 주변에 감돌고 있는 자연의 기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텍사스의 주도(主都)라고 해서 은근히 걱정했는데 굳이 토납을 할 다른 장소를 찾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침실이 1층에 2개, 2층에는 4개야.”

“전 2층 테라스 있는 방으로 쓰겠습니다.”

“거기 바람이 장난이 아닌데, 괜찮겠어?”

“어? 이거 라일리가 예약한 거 아닙니까?”

“내가 소개해 줬지. 방 하나 얻어 쓰는 조건으로.”

“캐디는요?”

“방 많잖아, 왜 이래. 어제 225만 달러를 번 사람이.”

“미국 시민권이 없는 제가 얼마나 많은 세금을 내는지 아시잖아요. 135만 달러를 챙긴 형보다 실제 통장에 찍히는 금액은 더 작을 걸요?”

“알았어, 알았어. 먹는 데 쓰는 경비는 내가 다 댈게. 됐지?”

“이 저택에 머무는 사람 전부 책임지는 겁니다.”

“오케이!”

그래 봐야 선수 둘, 캐디 둘에 나중에 이 대표가 합류해 5명이니 크게 부담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방이 모자라 별채까지 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은 푹 쉬었다.

비를 맞으며 팽팽한 승부를 이어갔던 필상이나 미켈슨, 성호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다들 조용히 잠든 밤, 홀로 일어난 필상은 별이 총총 빛나는 밤하늘을 보며 토납을 했다.

평상적인 움직임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으나 마지막 라운드에서 상당한 내력이 소모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만약 토납을 통한 급격한 성장을 이루지 못했더라면 2주 연속 출전이 아니었음에도 경기 중에 기력이 소진되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

“노. 노. 그렇게 쳐서는 공이 안 나가.”

“정말 그러네요.”

“미국 남부 코스의 러프는 주로 세인트 오거스틴그라스를 쓰는데, 이놈의 TPC의 버뮤다 그라스하고는 달라. 쓸어 치지 말고 찍어 쳐야 해.”

“아!”

페어웨이나 그린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잔디의 길이가 짧고 이미 적응이 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페어웨이를 벗어난 지역에 넓게 깔린 러프는 생각만큼 길지는 않았는데 샷의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왔다.

최근 추세와 다른 품종을 오래전에 식재했기 때문인데, 미켈슨은 필상을 가르치는 재미에 아주 푹 빠졌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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