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33화 (133/354)

133. 승부의 호흡

“와아아아! 퍼펙트! 퍼펙트!”

이번에는 놓칠 수 없었다.

경쟁자가 갑자기 무너졌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했다. 본인에게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1타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과감한 스트로크를 이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날 첫 버디가 10번 홀에서 터졌다.

다들 지키기에 바쁜 와중에 얻은 버디이기에 더욱 값졌다.

[-16 PS KONG]

리더 보드 최상단에 당당히 자리한 자신의 이름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11번 홀로 이동하는데 엄청난 환호성이 들렸다.

진원지는 11번 홀 그린이었다.

타이거 우즈가 8야드의 롱 이글 퍼팅을 성공하고 멋진 어퍼컷 세러모니를 날리는 모습이 생생히 보였다.

-16 타이거 우즈, PS KONG

-15 필 미켈슨

-14 짐 퓨릭

-12 아담 스캇, 리키 파울러

“아직 죽지 않았네요. 타이거.”

“짓궂은 날씨가 자신의 인생처럼 느껴졌나 봐.”

“그의 인생이 어때서요? 전 부럽기만 하구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골프팬들의 기억에 남을 테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떠난 그의 크고 화려한 저택은 무척 썰렁하지 않을까?”

“썰렁해도 좋으니까 전 제발 그런 대저택에 살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 대목에서 필상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같은 사실도 보는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호가 바라보는 세상과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른 것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고 지금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골프를 하지 않았다면 너랑 다르지 않았을 거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들 한다.

골프를 시작한 뒤 찾아온 삶의 변화는 스스로를 당당하게 만들었다. 구차한 일을 당하면서도 직장 생활을 이어 가기 위해 그게 세상의 이치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는 사라졌다.

감히 만져 볼 수 없는 경제력을 갖췄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에 많은 팬들이 성원을 보낸다. 더 중요한 것은 그걸 이룰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보다 넓게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얼마 전 본인은 아주 난처한 상황에 처했었다. 무엇을 하든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가족인데,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변함이 없는데, 찾아온 음란마귀에 당당히 맞서지 못했다.

그게 나약하고 사악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핑계, 이 대표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는 합리화도 약자의 변명에 불과했다.

‘다시는 우물쭈물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했다.

그 사실을 모모코에게 고백하는 것이 합당한 건 알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억마저 혼란시키는 그런 상황이 닥치면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맞서 싸울 것이라는 각오였다.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 유혹의 도구가 되었던 이 대표, 마음속의 배신을 알았다면 크게 상심했을 모모코에게는 더 큰 신뢰로 보답할 수밖에 없다.

축복의 뒤안길에 모든 것을 망칠 저주도 함께 찾아온다는 무서운 사실을 인지한 필상은 타이거의 삶 또한 위험의 경계선에 발을 한 번 잘못 디딘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생 내내 지나치게 열심히 일했고, 내 주변의 모든 유혹을 받아들여 즐겨도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느꼈다. 돈과 명예 덕분에, 그 모든 것들은 내 주변에 항상 있었다. 이 모든 건 틀린 생각이었다. 나는 어리석었다.]

모든 사실이 드러났을 때 타이거는 그렇게 말했다.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정작 그 위치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은 행간의 상황들을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다.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의외로 많다.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이들의 주변에는 거기서 떨어지는 나락을 줍고자 하는 이들이 몰리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자신들의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행동을 포장하고 법의 테두리를 교묘하게 빠져나가 웬만해서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타이거는 모든 것을 시인했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어리석었다고 모두 앞에 고백할 정도의 기본은 갖췄다.

그로 인해 그가 치른 대가는 금전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쌓은 명예는 물론 아내와 아이, 가족들에게 고립되는 인간으로서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의 패륜적인 행동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그를 구원한 것은 골프 황제라는 명성이 아니라 그 자리에 오를 때까지 그를 지탱했던 부모님의 가르침, 끊임없이 스스로를 연마한 노력과 열정이었다고 필상은 생각한다.

다시 필드에 돌아와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 프로 골퍼를 마치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기 위해 편협한 기득권을 남용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또한 필상이 스스로 지나치게 가진 자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음도 인정한다. 하지만 겪고 지나온 세월이 그러했으니 어쩌겠는가.

“필 형도 버디는 잡았네요.”

“3온 1퍼팅. 그게 더 정상적인 공략이지.”

“정신없는 이 험악한 상황에서 2온을 노려 성공하다니, 우즈가 정말 대단한 선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인정! 하지만 지금은 장타가 득이 됐지만 그 성공의 달콤함을 잊지 못할 경우, 그를 함정에 빠뜨릴 독이 될지도 몰라.”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죠. 하지만 타이거 우즈라면 그런 것도 염두에 두지 않을까요?”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골프는 상대적인 기록으로 우승을 가리는 스포츠지만 실제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보다 도전적인 샷부터 가장 안전한 샷까지, 매 샷마다 다양한 옵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오늘처럼 악천후일 때는 참는 자가 이긴다고들 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전적인 샷이 성공하면 당사자는 물론 경쟁자들도 그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일단 드라이버를 잡았어요. 우즈가 강력한 티샷에 이어 3번 우드로 2온에 성공했는데, 우리 공 프로도 그렇게 가야죠?

티 그라운드에 올라서는 필상의 공략에 대해 다들 궁금해했다. 이미 장타 능력은 보여 줬고 그 정확성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에 정면 승부를 기대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런 의견을 대변하는 이가 바로 임 캐스터였다.

그러나 허 해설은 그 불에 찬물을 확 끼얹었다.

-혹시 임 캐스터는 공 프로의 우승을 바라지 않습니까?

-네? 그 무슨 황당한 말씀이세요. 제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너무 공격적인 공략을 바라는 것이 무리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런 엉망인 날씨에서 한 홀 뒤에 쫓아가는 선수가 유리할까요? 앞서 나가는 선수가 유리할까요?

-그야……. 동타라면 앞선 선수가 유리할 것 같습니다만 이 홀은 우즈가 이글, 미켈슨도 버디를 잡은 홀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 침착하게, 아주 냉정하게 타수를 줄여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이글을 노리다 파 이하를 기록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까요?

굳이 최악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아 보였다. 부정적인 발언을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허 위원이라고 모를 턱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 경기를 하고 있는 선수들의 실전 심리에 밝은 그는 필상이 타수를 줄이지 못할 경우, 필상의 기세가 꺾이는 것뿐만 아니라 경쟁자들의 기가 산다는 것까지 감안했다.

바람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는 최악의 날씨는 그 어떤 것도 보장하지 못한다. 9분 간격으로 티타임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타이거가 티샷을 할 때와 필상의 티샷은 산술적으로 18분의 시간 차이가 발생한다.

그사이에 바람의 방향과 세기, 비의 양이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말까지 더하자 끝까지 우기고 싶던 임 캐스터도 더는 사족을 달지 못했다.

“굿 샷!”

“입으로는 굿 샷을 부르면서 표정은 왜 그래?”

“제가 뭐요!”

“흑돈. 내가 300야드를 보낸 게 불만이냐?”

“낮게 깔아도 조금 더 보낼 수 있지 않았나요? 대략 320야드까지는 안전한 것 같았는데…….”

“내 스스로 유혹에 빠질까 봐 그랬다. 왜?”

“230야드 정도는 아이언으로도 충분히 보낼 수 있잖아요.”

“왜? 지금 남은 251야드도 유틸 잡으면 못 갈 거 없으니까 2온을 노리라고 하지?”

“아쉬워서 그러죠. 아쉬워서.”

“네 마음은 알지만 좀 더 냉정해야 해. 이건 결국 누가 더 잘 버티느냐의 문제거든.”

상대가 짐 퓨릭이었다면 보다 공격적인 시도를 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그는 이미 상실감에 젖어 있으니까.

하지만 우즈와 미켈슨이 쫓아오고 있다.

나이를 무색케 하는 최상의 컨디션과 비교할 수 없는 노련함으로 무장한 그들은 필상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빈틈만 보이면 바로 자신들의 페이스로 몰고 갈 것이고 거기에 걸려드는 순간, 어쩌면 자신의 의지대로 풀어나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염려라고 생각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와 충분한 기량을 갖췄다고 믿지만 상대 또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골퍼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유종의 미를 거둘 자세였다.

-버디! 드디어 1타 차로 앞서갑니다.

-아니죠. 12번 홀 우즈의 티샷이 해저드에 떨어졌습니다. 어쩌면 2타 이상으로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파4를 298야드로 그냥 세팅한 이유가 다 있었던 거군요. 그 정도 거리면 3번 우드도 가능하지 않았나요?

-맞바람이 있어서 드라이브를 잡았는데, 훅 바람을 탄 공이 마치 악성 훅이 걸린 것처럼 그냥 휘어 버렸습니다.

이글을 기록하자마자 곧바로 큰 미스 샷이 나왔다.

맞바람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2시 방향으로 바뀐 것을 알 도리는 없었다. 그래도 부담스러운 거리는 아니었기에 정확하게 치려고 집중했다.

하지만 그린 우측의 좁고 깊은 벙커들이 의식됐던 우즈는 스윙 궤적이 지나치게 인 아웃으로 구사된 것을 느끼는 순간 얼른 오른손을 놨다.

그만하면 그린 좌측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예상을 벗어났다. 야속한 바람은 타구를 더 왼쪽으로 밀어내 결국 러프에 맞은 공이 해저드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허허. 바로 걸려들었네요?”

“필 형 봐. 아마 아이언을 잡았을 거야.”

“그런 거 같아요. 진짜 얄밉게 보였겠다.”

“그랬겠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지는 거야. 아마 타이거도 그 심리는 잘 알고 있을 거야.”

“지금이라도 핀에 붙여 파를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되느냐 안 되느냐, 그게 관건이네.”

중간에 한 조가 끼어 있지만 우즈와 미켈슨 조의 경기 진행이 조금 느린 편이라서 12번 홀 티 박스에 도착한 필상은 그들의 숏 게임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파가 가능하다고 말은 했지만 미켈슨이 파온에 성공하는 순간, 우즈의 어프로치는 붙기 힘들 것 같았다. 실전 심리상 그게 순리다. 하지만 우즈는 역시 우즈였던가!

“와아아아! 타이거! 타이거!”

“나이스 어프로치!”

공을 드롭 한 거리는 34야드, 게다가 러프가 제법 길어 어떤 어프로치를 구사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피칭웨지를 잡은 우즈는 그냥 헤드를 툭 떨어뜨렸다.

말이 쉽지, 결코 간단한 샷이 아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맞은 타구는 퉁 튀어 오르더니 그린에 떨어져 정확하게 홀컵을 향해 굴렀다.

다들 칩인 버디가 나오는 줄 알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에 왼쪽으로 살짝 휘는 라이가 아니었다면 들어갔을 아주 멋진 범 앤 런이었다.

-진짜 무시무시하군요. 전 소름이 돋았습니다.

-우즈가 전성기 때의 기량을 회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전성기 때도 우즈의 티샷은 가끔 춤을 추곤 했습니다. 흔히 미켈슨더러 숏 게임의 마술사라고 하지만 실제 우즈의 숏 게임 능력도 미켈슨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기야 미켈슨은 아주 기묘한 트러블 샷을 잘하죠.

-그만큼 샷이 불안했다는 증거입니다. 그에 비해 안정적인 플레이를 펼친 우즈의 숏 게임 능력이 과소평가가 된 측면이 강할 뿐, 우즈는 꼭 필요할 때 환상적인 숏 게임을 보여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2005년 마스터스 최종일 16번 홀의 칩샷은 더 마스터스 역사에 길이 남을 ‘the shot’으로 방영된 적도 있지 않던가!

오랜 시간을 뛰어넘은 지금 그가 보여 준 샷이 들어갔다면, 그리고 그가 이 대회를 우승했다면 그에 못지않은 명장면으로 꼽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즈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했던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았다.

수많은 갤러리들은 환상적인 어프로치에 열광했지만 팽팽한 승부의 호흡 안에 있는 두 선수의 그런 생각은 결국 더 플레이어스의 승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승부처가 되었다.

“4번 아이언.”

필상은 미켈슨처럼 안전한 선택을 했고 펀치 샷으로 210야드를 공략한 뒤 남은 90야드를 1m에 붙여 버디를 완성했다.

졸지에 2타 차로 벌린 필상은 그 기세를 그대로 이어 갔다. 필상이 타수를 잃지 않고 버티자 우즈는 마의 17번 홀에서 홀컵을 바로 공략하다 더블보기를 기록하며 자멸하고 말았다.

아쉬웠지만 필상도 화려한 플레이를 하지는 못했다. 17번 홀의 경우, 핀이 우측에 꽂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린 중앙을 공략할 수밖에 없었다.

3타 차로 앞서고 있지만 바람이 심술을 부려 타구를 호수로 끌고 들어가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우와아아아!”

“미스터 퍼펙트! 미스터 퍼펙트!”

마지막 우승 퍼팅이 홀컵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두 팔을 높이 치켜든 필상은 포효했다.

참고 참았던 가슴 속의 울분을 마음껏 표출했다.

적잖은 우승을 거뒀지만 마치 첫 우승을 하는 것처럼 기뻤다. 지금 이 감격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없는 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미켈슨과 우즈를 비롯해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이들이 모두 몰려나와 샴페인을 퍼부으며 축하했지만 필상은 성호에게서 건네받은 휴대폰을 켜고 버튼을 눌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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