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멀고 험한 길
“형. 문자 왔는데요?”
“내 폰이야?”
“네.”
“줘 봐.”
보통 경기 때는 핸드폰을 끄고 성호에게 맡겨 둔다.
하지만 필상은 기다리는 연락이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면 진동 모드도 꺼야겠지만 1번 홀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1번 홀에 도착하기 무섭게 폰이 부르르 떨었다. 아마도 TV 중계 화면을 통해 필상의 이동 상황을 체크한 누군가의 연락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왔다.
어쩌면 자신이 휴대폰을 확인하는 장면도 확인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메시지를 확인한 필상은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 하트를 날렸다.
“형!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와이프한테 사랑고백!”
“네?”
“총각은 몰라도 된다.”
모르긴. 성호도 대충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다.
한국을 뜨겁게 달군 필상과 이 대표의 스캔들은 모를 수 없었다. 오히려 필상보다 빨리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사실 아주 단순한 문자였다.
[오빠! 나도 사랑해. VICTORY!]
필상은 마음 한구석에 남았던 찝찝함마저 털어낸 것이다. 그 와중에 아너인 짐 퓨릭이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티잉 그라운드에 올랐다.
“짐 퓨릭은 안전하게 갈 것 같은데요?”
“그에게는 안전한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어. 여하튼 아직 비가 거세지 않을 때 간격을 좀 줄여야 할 것 같아.”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드라이브.”
오후 2시, 챔피언 조가 출발할 때까지도 먹구름만 잔뜩 몰려왔을 뿐 강우량은 그저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 수준이었다.
하지만 상당한 비가 예고된 상황이라 가급적 기회가 될 때, 선두와의 간극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예상한 대로 짐은 안전하게 좌측 페어웨이를 공략했다. 비거리는 281야드, 빗물의 저항을 감안하면 그래도 강한 티샷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첫 번째 티샷을 준비하는 필상의 기세는 사뭇 살벌했다. 일단 빈 스윙부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남달랐다.
까앙!
더없이 맑은 타격음이 울려 퍼진 가운데 힘차게 돌아간 클럽헤드에 맞은 공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치솟았다.
정확히 스위트 스팟에 맞았기 때문에 필상은 아예 타구를 쳐다보지도 않고 티잉 그라운드를 내려왔다. 하지만 클럽을 받아야 할 성호는 낙하하는 타구를 쳐다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보긴!”
“휴우! 나이스 샷!”
“잘 갔지?”
“아뇨. 러프로 튀어 들어갔어요.”
“러프?”
자신이 의도한 방향은 334야드만 넘으면 굽은 페어웨이가 쭉 이어지는 구간이다. 러프에 들어갔다는 말에 자신이 너무 들떴다는 것을 깨달은 필상은 공의 위치를 확인했다.
페어웨이에 잘 떨어진 공이 좌측으로 튀기는 했으나 랜딩 지점 자체가 자신이 원한 지점이 아니었다는 것에 놀랐다.
“드로우가 걸렸어?”
“네. 끝에서 살짝 휘었는데 바람의 영향일지도 몰라요.”
“우리가 파악한 건 슬라이스 바람이었잖아?”
“그니까요!”
흥분한데다가 바람까지 돕지 않은 상황이라면 지금 결과가 크게 나쁜 게 아니라고 자위하며 세컨샷 지점으로 이동했다.
짐 퓨릭의 남은 거리는 162야드, 8번 아이언 정도면 충분히 파온이 가능한 좋은 위치였다. 하지만 그의 샷은 그린에 오르지 못했다.
잘 맞은 것 같았으나 그린 앞 오르막 러프에 맞은 공이 좌측으로 튀어 벙커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추위 타나 본데요?”
“아니야. 바람이 1시 방향에서 부는 것 같아.”
“3시가 아니고요?”
어제까지는 10시 방향이었다.
야디지 북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고.
하지만 티샷의 결과를 보고 훅 바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 사이에 또 바뀐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필상은 얼른 피칭 웨지를 잡고 다소 빠른 템포의 샷을 가져갔다.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98야드 남은 거리를 펀치 샷을 하듯이 낮게 깔아 쳤는데 그린 앞 오르막 둔덕을 맞고 핀을 향해 잘 굴렀기 때문이다.
“정말 1시 방향이었네요.”
“그래. 한 가지 확실한 건 가급적 모든 샷을 짐보다 조금이라도 멀리 보내야 한다는 거야.”
“바람을 참고할 수 있겠네요.”
“그렇지!”
짐 퓨릭은 1번 홀부터 트러블 샷 상황에 놓였다.
평소라면 그리 어려운 벙커 샷이 아니지만 지금은 비가 내려 모래가 젖었다. 게다가 이제 첫 홀이다 보니 정확한 조준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도 그는 침착하게 벙커를 탈출했다.
모호한 것은 하필 그 타구가 필상의 공 바로 옆에 섰다는 것이다. 거의 비슷한 거리가 남았기 때문에 누가 먼저 퍼팅을 하느냐가 중요했다.
나중에 치는 선수는 비로 인해 그린스피드가 어떻게 변했는지 참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곧바로 퍼팅 루틴에 들어갔다.
이 순간, 머뭇거리면 상대의 마음은 상하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팬들의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 공 프로가 더 가깝지 않나요?
-현명한 선택입니다. 설사 가깝다고 해도 지금은 먼저 플레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여러 규정을 바꾼 이유가 바로 경기의 지루함을 덜고 빠른 진행을 위해서니까요.
-준비된 선수부터 플레이한다. 그 룰이군요.
-그렇습니다. 또한 루키로서 대선배와 경기하며 그 정도 예의는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라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측 반 컵, 내리막에 이어진 오르막이라 평지라고 생각하면 무난하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어렵게 만든 기회였기에 집중력을 발휘했다.
“우우우…….”
이미 퍼팅 연습을 하고 경기에 나선 터라 힘 조절은 좋았지만 라이가 전혀 먹지 않은 공이 홀컵 우측을 그냥 스쳤다.
라인을 잘못 설정한 게 아니라 물기에 젖은 그린의 컨디션이 그 정도의 경사는 그냥 무시해 버린 것이다.
아쉬웠지만 파로 물러난 필상은 짐의 퍼팅을 확인했다.
혹시 자신의 퍼팅에 실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상의 라인을 참조한 그의 퍼팅은 좌측으로 흘렀다. 이상하게도 그의 라이는 경사를 탄 것이다.
“허허. 모호하네, 모호해.”
“좀 더 면밀하게 라이를 살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게 정답이다.”
자신은 무지의 소치라고 치더라도 경험이 풍부한 짐의 경우는 기분이 상할 결과였다. 앞선 퍼팅을 참조하고도 타수를 잃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여하튼 필상은 1타를 줄였기 때문에 더 이상 만족스러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소중한 배움까지 얻었으니.
2번 홀, 534야드 파5 홀에서 타수를 줄이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는 순간, 종잡기 힘든 바람이 불러와 안전하게 갈 수밖에 없었다.
“어허!”
2온을 포기한 아쉬움이 마음에 남았던지 세컨샷을 너무 가볍게 친 것이 문제였다. 설마 피칭으로 150야드를 못 넘길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물론 거리보다는 방향성에만 신경을 썼다. 하지만 날아가던 공이 마치 누군가 마법이라도 건 것처럼 뚝 떨어져 궤적 아래에 있던 페어웨이 벙커에 들어갈 줄은 미처 몰랐다.
그나마 스탠스도 불안정한 상태에서 멋지게 퍼 올려 아까와 비슷한 4m 남짓한 버디 기회를 맞이한 것은 좋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퍼팅이 말을 듣지 않았다. 더도 말고 딱 반 바퀴만 더 구르면 들어갈 공이 홀컵 바로 앞에 멈추자 갤러리들의 탄식이 눅눅한 마음까지 짓눌렀다.
“인정해야 하나?”
“뭘요?”
“경험이 부족하다는 거.”
“어울리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그냥 평소처럼 해요.”
“하하하. 알았어. 오늘은 좀 캐디답네.”
성호 덕분에 기분을 전환시켰지만 최종 라운드의 고난은 3번 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바람까지 강해졌다.
이런 날씨라면 과연 경기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여하튼 필상은 미리 대비한 대로 안전한 공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 날씨가 아주 엉망이네요.
-중요한 것은 낙뢰 경보는 없다는 겁니다.
-그럼 그냥 이대로 진행된다는 건가요?
-비와 바람은 골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공 프로가 아주 좋은 경험을 쌓게 될 것 같습니다.
-경험도 좋지만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되죠! 어차피 모두 똑같은 조건이고 바람은 익히 잘 극복했던 이력도 있으니까 독하게 마음먹고 잘해 줬으면 좋겠네요.
-하필 산전수전 다 겪은 짐 퓨릭과 상대한다는 것이 좀 걸리지만 만약 그마저 극복한다면 더는 엉뚱한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아마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바람에 비까지 더해지자 필상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사전에 계획을 잡았는데도 그 안전한 샷을 이어 가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4번 홀에서 그린을 오버한 공이 좁고 깊은 벙커에 빠져 보기를 기록했고 5번 홀에서는 급기야 드라이버 티샷이 벙커에 박혀 에그 프라이가 되는 황당한 상황도 겪었다.
물론 그 홀에서도 타수를 잃었지만 상심하지는 않았다.
필상 혼자만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반을 마친 필상은 2타를 잃었지만 짐 퓨릭과 나란히 공동 선두에 이름을 올렸다.
-15 짐 퓨릭, PS KONG,
-14 아담 스캇, 타이거 우즈, 필 미켈슨
“아저씨한테 잡히겠는데요?”
“어느 아저씨?”
“호랑이요.”
“필 형이 아니고?”
“어제 표정 못 봤어요? 형이 필 형한테 베팅을 하자 이를 꾹 악물더라고요.”
“느낌이 그랬다는 거겠지. 미소를 잃지 않던데?”
“아니에요. 제가 볼 때는 완전히 독심을 품은 것 같았어요.”
“기부 좀 하지 뭐.”
“만 불인데요?”
“기부한 거는 다 세금 공제돼. 어차피 이 땅에서 번 건 이 나라 사람들한테 얼마간은 남겨 줘야지.”
없이 살던 시절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당시에는 허황된 꿈이었지만 자신이 부자가 되면 인색하게 살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는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아집과 횡포로 병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태생적, 역사적 한계일지 모르나 한국만큼 가진 이들이 큰 소리 치는 나라는 없다.
역사의 단죄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혁명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가진 것을 다 빼앗긴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는 오히려 부자가 몸을 사리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 사회는 그런 이들이 아직 활개를 친다.
그들만의 굳건한 사회적 자산이 엄연한데, 표로 심판해야 할 없는 이들이 되레 그들의 장단에 놀아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득권 세력의 배를 불려 주느라 자신들의 삶이 피폐해졌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게 왜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조장되고 왜곡된 반목과 대립의 나날은 쉬이 사라지기 어려울 것 같다.
“굿 샷!”
“역시 깔아야 해.”
“하하. 오늘 버디가 하나도 없는 거 알아요?”
“9홀에 38개를 친 것도 신기록이지.”
“그러니까요. 이번에는 좀 넣어 봐요.”
410야드 파4, 10번 홀은 핸디캡 2번이다.
하지만 3번 우드로 271야드를 날려 페어웨이를 잘 지킨 필상은 136야드를 9번 아이언으로 파온에 성공했다.
이번에도 또다시 4m 버디 퍼팅을 남긴 게 찜찜했지만 필상은 당당하게 그린을 향했다.
세컨샷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앞 조의 아담 스캇이 벙커에서 철퍼덕대는 것을 봤고 짐 퓨릭의 세컨샷이 바로 그 자리에 떨어지는 것도 봤기 때문이다.
-드디어 단독 선두로 올라서나요?
-일단 상황은 그럴 것 같습니다. 짐 퓨릭의 벙커샷과 상관없이 이번 퍼팅을 넣었으면 좋겠는데 두고 봐야죠.
그런데 화면이 바뀌면서 나타난 11번 홀, 타이거 우즈가 236야드를 3번 아이언으로 2온에 성공하는 장면이 나왔다.
바람에 빗줄기까지 거센데 우측으로 이어진 호수와 벙커의 위험도 마다한 굉장히 용감한 샷이었다. 선두와 1타 차이기 때문에 졸지에 선두로 올라설 기회를 얻은 것이다.
2온을 포기하고 잘라 간 미켈슨의 표정, 담담해 보였으나 그건 담담한 게 아니라 심각한 표정이라고 봐야 했다.
그는 적어도 두 사람과 싸우는 중이다.
눈앞의 타이거, 그리고 자신이 인정하고 가장 두려운 선수 미스터 퍼펙트, 그 둘을 염두에 두고 있어 더 진지해질 수도 있지만 심한 압박감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아이고!”
“듣겠다!”
“안 들려요. 벙커 탈출을 실패했는데 뭐가 들리겠어요.”
“그래도 우린 갤러리가 아니잖아. 매너는 지켜.”
그리 어렵지 않은 벙커샷이었지만 사실은 그게 녹록한 샷이 아니었다. 앞선 아담도 42야드를 날려 그린에 올리려는 마음이 앞서 미처 벙커 턱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짐 퓨릭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저 아저씨 지금 후끈 달아오른 거 같아요.”
“추워서 벌벌 떠는 게 아니고?”
“매너 지키라면서요?”
“큭!”
전반에 무려 5타를 잃은 그가 제정신일 가능성은 낮다.
날씨 탓을 할 수도 있지만 무려 5년 만에 맞이한 우승 기회다. 작년에도 이 대회에서 아쉽게 로리에게 1타 차로 밀려 2위를 했던 것이 자꾸 떠오를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3타 차로 최종라운드를 출발했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로웠다. 그런데도 프런트나인에 동타를 허락한 그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그럴수록 차분하게 돌아가야 하는데 필상이 파온을 성공한 것이 그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4번째 샷은 너무 강해 그린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스스로 우승 경쟁에서 멀어졌다고 느꼈는지 그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