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최고의 매치 업
“두 사람 모두 형한테 걸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가?”
저녁 식사를 마친 필상은 호텔로 향했다.
연습하러 가지 않겠냐는 미켈슨의 제안에 오늘은 일찍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연습장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오늘 그가 이어준 인연은 추후 투어 생활을 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혹자는 한물 간 선수들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이 가진 경험은 언제까지고 길어지지 못할 전장의 거리가 한정되면 다시 꽃을 피울 거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나 미켈슨이나 우즈처럼 자신의 스윙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이어진다면 과거처럼 1년에 몇 승씩 거두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투어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즈가 상당히 아쉬워하는 것 같았어요.”
“나한테 걸지 못해서? 그 1달러 내기가 뭐라고!”
“그건 그냥 1달러가 아니라 자존심 아닌가요?”
필상과 짐 퓨릭의 대결에 미켈슨이 먼저 점을 찍었다. 3타나 뒤졌기 때문에 자신을 선택한 필상을 위해 한 수 양보하는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곧바로 우즈의 답이 나오지 않자 졸지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물론 결국 2:2승부처럼 되었지만 우즈의 표정은 그의 속내가 어떤지를 충분히 짐작케 했다. 특히나 헤어질 때 앞으로 자주 봤으면 좋겠다는 둥, 다음에 플로리다에 오면 자기 집에 머물러도 좋다는 둥, 그런 말은 적극적인 호감의 표시였다.
“직접 만나 보니 사람 괜찮더라.”
“저도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그렇게 선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스캔들 때문에……. 그 일로 이미지만 나빠지지 않았다면 더 많은 전설을 쌓았을 텐데, 안타깝더라고.”
“글쎄…….”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필상이 그 말에 동의하지 않자 성호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형 생각은 다른가요?”
“응. 나는 그가 할 만큼 했다고 봐.”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그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뽑아 썼어. 아니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과용해서 방전되었다고 봐야지.”
“그의 부상이 너무 무리했기 때문이라는 건가요?”
“응. 그걸 느꼈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스윙 교정을 했던 거고, 그런데도 답을 찾지 못한 거지. 몸이 무너지고 그에 따라 마음도 함께 무너진 거라고 봐.”
얼핏 설득력이 있지만 성호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필상처럼 타이거 우즈도 인간의 범부를 벗어난 괴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필상은 그런 일을 겪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우즈도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라고 믿고 싶었다.
여하튼 호텔에 도착한 필상은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해변이 더 좋지만 언제부터인지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이 자꾸 카메라를 눌러 대는 통에 집중이 흐트러지는 현상이 생겨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문득 아직 모모코와 통화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얼른 전화부터 걸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 전화로 연결했더니 엄마가 받았는데, 오늘 하루 종일 퉁퉁 부어 있었던 모모코가 지금 큰 누나 집에 놀러 갔다는 말을 들었다.
“무슨 일이 있나?”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뭔가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그걸 받아 줄 사람이 큰누나라도 있다는 것이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큰누나도 핸드폰을 받지 않았다. 누나 집 전화번호를 찾는데 문자가 하나 틱 도착했다. 문자가 아닌 신문 기사가 하나 전송되었는데, 첫 화면을 확인한 순간 뒷목이 뻐근했다.
“이런! 대체 어떤 놈이!”
하도 답답해 필상은 얼른 해당 기사를 검색해 봤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검색이 되지 않았다.
[미스터 퍼펙트! 석양에 빠진 것인가? 여인에 빠진 것인가?]
헤드라인이 너무 자극적이다.
사진은 이 대표와 함께 해변에서 같이 스노클링을 즐기던 장면을 찍은 것이었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문제는 악마의 편집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죽고 못 사는 연인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듯 스킨십이 이뤄진 장면만 골라서 연출한 고의성이 엿보였다.
순간 아찔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아니지 않은가?
필상은 당장 호텔 매니저를 호출했고 프라이빗 해변에서 벌어진 촬영이 기사화된 것에 대해 따졌다.
그런데 그는 침착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듯.
“안 그래도 법적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법적 절차요?”
“해당 기사는 이미 내려졌고 프로님의 매니저께서 LA에 있는 언론사를 방문해 정정 기사 개재와 사과를 받아 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저희의 책임 또한 막중함을 알기에 변호사를 통해 보상을 협의 중입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상황을 알고 보니 그 기사는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내려졌다. 하지만 한국의 유능한 네티즌들은 그걸 스크랩해서 사방에 뿌려 댔다.
매니지먼트 회사는 물론 필상의 팬들이 적극 옹호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강을 건넌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이 대표와의 통화를 미룰 수 없었다. 엉뚱한 걱정을 했지만 그건 허구였고 그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던 것이다.
‘미안해요. 공 프로님.’
연결되자마자 그녀의 진심이 담긴 사과가 이어졌다.
자신 또한 함께 저지른 죄가 있으니 반드시 그녀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화를 표출한다면 자신은 무책임하고 아주 옹졸한 남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으면 저랑 상의하시지 그랬어요.”
‘시합에 집중해야 할 필상 씨가 조금이라도 늦게 아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모모코에게서 연락이 왔죠?’
“네. 삐친 것 같아요.”
‘제가 밤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가니까 직접 가서 해명하고 그녀의 마음을 풀게요.’
그랬던 것이다.
그녀는 상상 속의 일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악의적인 기사가 필상에게 영향을 미칠 게 걱정되어 LA로 날아갔던 것이다.
여하튼 일은 같이 저질러 놓고 그녀에게만 책임을 미루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시간이 흐르면 오해는 풀릴 것이고 그녀가 한국에 들어간다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대표님. 그냥 내일 오스틴으로 가세요. 저희가 묵을 호텔부터 점검하시고 연습 라운드 할 코스도 알아봐야죠.”
‘모모코는 어쩌고요?’
“제 아내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 정도 믿음도 없다면 앞으로 허구한 날 떨어져 지낼 텐데, 그건 안 되죠.”
극구 가겠다는 그녀를 만류한 필상은 통화를 마친 뒤, 잠시 고심했다. 얽힌 매듭을 어떻게 푸는 것이 현명한지.
모모코의 마음은 이해한다.
입장을 바꿔 자신이라도 그런 기사가 뜨면 참기 어려울 것이다. 우린 신혼이고 그녀는 아이까지 가지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마음을 잡지 못한 자신의 잘못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만큼 크지만 자신의 본심마저 배신한 것은 아니다.
축복에 대한 부작용,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자신은 모모코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그녀와의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깰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연락하기 전, 필상은 깊이 반성부터 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 설사 더 큰 부작용이 발생하더라도.’
처음이었기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지만 추후 이런 일이 생기면 이젠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한 확고한 결심을 세운 필상은 급기야 모모코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중에는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만큼 반복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라인으로 문자를 넣어도 되지만 굳이 전화를 반복해서 거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국제전화 요금이 얼마나 비싼데 자꾸 이래요!’
“사랑해.”
‘……저 삐쳤어요. 제가 전화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세요.’
“사랑해. 모모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통화음이 끊겼다.
잠시 눈을 감고 의미를 되새긴 필상은 이내 토납을 시작했다. 구차한 변명보다 진심을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때때로 단순해 자신에게 필요한 말만,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어차피 헤어질 마음이 아니라면 그녀는 결국 사랑한다는 말에 집중할 것이다.
***
“일찍 나왔네?”
“네. 필 형한테 아침 일찍은 몇 시입니까?”
“그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 오늘 같은 날은 푹 자야 하니까 8시면 아침 일찍 아닌가?”
“설마 제가 10,000달러를 기부하는 걸 바라시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난 반드시, 필히, 오늘 이길 거야.”
“그럼 연습 시작하시죠.”
필상은 새벽 6시에 일어나 뛰어서 골프장에 왔다.
성호는 장비를 챙겨 미리 연습장의 좋은 자리를 잡았고, 어젯밤 충분한 토납과 숙면까지 취한 필상은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그걸 직접 샷으로 확인한 필상은 우중 경기를 위한 특별한 대비를 시작했다. 강풍에 비까지 온다면 여러 상황을 한꺼번에 고려해야 한다.
“나한테는 연습을 하라더니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야디지 북이요.”
“이제 안 봐도 다 외우지 않았어?”
“특별한 경우를 고려해 가장 안전한 샷을 미리 검토하는 겁니다. 티샷부터 아무 생각 없이 치면 수습이 안 될 수도 있거든요.”
“오늘 비가 온다는 것 때문에 그런 거야?”
“네. 이 대회가 열릴 때 비가 온 적이 거의 없었다면서요?”
“음……. 그런 거 같아.”
“제 생각에 이 코스는 강풍에 비까지 오면 절대 언더파를 칠 수 없습니다. 드라이버는 아마 독이 될 겁니다.”
“너무 엄살을 부리는 거 아냐?”
그 말을 하면서도 그는 클럽을 놓고 필상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야디지 북을 꺼내 필상과 똑같이 뭔가 연구하기 시작했다.
가끔 생각에 잠기거나 무릎을 탁 치는 걸 보면 그만의 묘책을 찾은 것도 같았다. 언뜻 보면 무슨 짓을 하나 싶지만 야디지 북을 보며 공략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실전 연습과 다르지 않다.
수없이 많은 이미지 스윙을 병행하기 때문이다.
전쟁 때 포로로 잡힌 군인이 생환된 뒤, 첫 라운드에서 자신의 베스트 스코어를 갱신했다고 한다. 그는 힘든 감옥 생활 내내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이 코스를 매일 한 바퀴씩 돌았는데, 상상 속의 라운드가 다 연습이었던 것이다.
그 얘기를 전적으로 믿기는 어렵지만 그만큼 이미지 스윙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드디어 우리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매치가 시작됩니다.
-마지막 3개 조는 역대 최고의 매치 업이라고 불리더군요. 우즈와 미켈슨, 공 프로와 퓨릭은 말할 것도 없는데, 13승의 아담에 비해 이제 겨우 5승인 리키는 다소 처지는 매치 업이 아닌가요?
-두 선수의 사적인 악연에 대해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이번 대회 들어 최고의 샷 감각을 자랑하던 리키는 5승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14번의 준우승을 조금이라도 만회할 기회라고 보고 있으며 어제 인터뷰에서 오늘 매치 업에 자신감을 드러내면서 아담을 자극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을 것 같아서 의도적인 도발을 한 거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평소 차분한 아담 스캇도 반드시 이기겠다는 언급을 한 걸 보면 말이죠.
-그나저나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이젠 제법 굵어졌어요. 많은 전문가들이 이 비가 우승자를 결정할 것 같다던데, 동의하세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선수가 우승할 것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하하하. 그게 그 말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
자연은 위대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다.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대한 자연을 인간이 어떻게 대하느냐가 승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의미다.
뒤에서 3번째 조에 속한 우즈와 미켈슨이 나타나자 1번 홀 주변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수많은 명승부를 연출한 그들이 오늘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멋진 승부를 이어 주기를 바라는 올드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이어진 리키와 아담의 매치 업, 역시 많은 팬들이 모였지만 티샷을 마친 선수들과 함께 이동하는 갤러리들의 수가 현격하게 줄었다.
본인들 스스로 느꼈을 것이다. 자신들의 매치보다 챔피언 조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기다린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와! 정말 많이도 모였네요.
-미스 샷이 나오면 절대 안 될 것 같습니다. 좌우의 나무숲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서 있습니다.
-하하. 걱정도 팔자십니다. 볼 스트라이킹이 최정상인 두 선수의 매치에요! 설마 갤러리들을 맞추기야 하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현역 PGA 선수 중에서 볼 스트라이킹이 가장 뛰어난 선수는 로리 매킬로이입니다.
-아! 디펜딩 챔피언인 그는 예선에서 컷을 당했지 않습니까! 지난 멕시코 대회에서 공 프로에게 망신을 당하고 첫 출전이었는데, 아직 그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다고들 하더군요.
-선수의 개인적인 사정을 함부로 엄단하는 것은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로리의 티샷이 예선에서 좌우로 넓게 분사된 것을 참조하면 좋겠습니다.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게 좋다더니,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언급이었다. 첫날 워낙 샷이 좋지 못해 하위권에 처진 그의 경기 내용은 거의 팬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중계 화면에 아예 나오지 않아 로리를 좋아하는 팬들도 컨디션이 좋지 못했구나, 그러려니 넘어갔다.
하지만 허 해설의 정확한 언급 때문에 그날 그가 사방팔방으로 등산을 다닌 게 몽땅 드러났다. 하여튼 허 위원이 꺼낸 그 말은 곧, 짐 퓨릭을 향한 경고였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필상의 볼 스트라이킹이 흔들릴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