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1달러 내기
미켈슨과 필상의 친근한 대화에 우즈의 표정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봐도 부러운 관계였기 때문이다.
투어를 전전하다 보면 좋은 친구의 존재는 절실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만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 막 투어에 뛰어든 필상이 가진 것은 출중한 기량만이 아닌 것 같았다.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 그걸 미리 알아보고 친구가 된 미켈슨이 부러웠다. 자신 또한 동양인의 피가 섞인 몸, 새로운 강자로 부상할 필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서른이 넘어 골프를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네. 그렇다 보니 엉성한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하하. 엉성하다니요. 공 프로의 시합 내용을 봤는데, 정말 무시무시하더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언론이 설레발을 떨던데 그건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곧 수그러들 겁니다.”
“그럴까요?”
필상은 그가 걸어온 길을 안다.
골프가 가장 늦게 대중에게 개방된 스포츠였기 때문에, 스타의 탄생을 간절히 바라던 골프계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더욱 큰 차별과 편견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는 당당히 실력으로 수많은 경쟁자들을 누르고 최고의 권좌를 차지했다. 그의 경쟁자는 오로지 전성기의 자신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그가 이룬 업적은 위대했다.
“2013년 기준, 난 참가한 대회의 25%를 우승했습니다.”
“25%? 놀랍습니다.”
“공 프로는 1전 1승이니까 100%로군요.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매번 대회를 나갈 때마다 우승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악착같이 최선을 다했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사람들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군요.”
그의 말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흑인이었던 그가 골프 선수가 되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학창시절엔 집단 따돌림에 폭행까지 당한 적도 있다. 흑인이 무슨 골프냐며.
하지만 모든 분노를 골프채에 담으라고 배웠다. 골프 클럽으로 상대를 때리라는 것이 아니라 실력으로 당당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이었다.
“열정적이셨던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그리우시겠습니다.”
“부모님의 존재는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큰 힘이었지요.”
“저도 저를 응원하시는 어머님이 계십니다. 자식들이 모두 골프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분은 골프의 룰도 잘 모르시지요.”
“아! 그렇군요. 하지만 공 프로의 눈빛을 보니 그분을 많이 사랑하시는군요.”
“물론이지요.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매일 술만 퍼마시던 저를 위해 남의 집 밭일까지 하러 다니셨으니…….”
뜻하지 않게 우울한 과거의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이다.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현재의 자신이 존재한다. 그분의 고통을 보지 못했더라면 자신은 일어설 용기마저 얻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미켈슨이나 우즈의 부모님처럼 골프를 가르쳐 주지는 못하셨지만 하나뿐인 아들의 성공을 바라는 지극정성은 그 누구에 비해도 초라하지 않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고 무거운 주제였는지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은 그때, 마지막 손님이 들어섰다.
“이거 분위기가 왜 이래?”
“어서 와. 짐.”
“우리 슈퍼루키한테 노땅들이 합세해 겁을 주고 있는 건 아니지?”
“하하. 그게 통할 인간이 아니라는 건 곧 알게 될 거야.”
놀랍게도 마지막 손님은 내일 필상과 맞대결을 펼칠 짐 퓨릭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투어를 뛴 노장들끼리 친한 것은 당연하지만 설마 이런 자리가 마련될 줄은 몰랐다.
필상도 얼른 일어나 인사부터 했다.
“공 필상입니다.”
“아주 잘 알지. 필이 얼마나 침을 튀기며 자네 얘기를 하는지 난 아주 귀찮았다니까.”
“본의 아니게 불편하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자네 같은 좋은 후배를 알게 되어 나로서도 아주 기분이 좋다네. 하하하.”
짐 퓨릭은 커리어 총상금 4위에 해당하는 거액을 번 선수다. 그의 앞에서는 우즈, 미켈슨, 그리고 비제이 싱뿐이다.
하지만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역시 독특한 스윙이다. 흔히 8자 스윙이라고 부르는 그걸 한 토크쇼 진행자는 ‘높은 나무에서 떨어진 문어’라고 조롱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스윙으로 PGA 통산 17승을 거뒀으며 꿈의 59타, 기적의 58타를 기록해 ‘미스터 58’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눈에 익숙한 스윙이 정말 좋은 스윙인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다. 그의 스윙은 이상하게 보이지만 임팩트 구간에서 가장 오랫동안 스퀘어 상태를 유지한다.
남들과 다르고 흉내 내기 어렵지만 좋은 스윙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세 분 모두 아버님이 골프를 사랑하셨군요.”
“그 덕을 봤다고 해야겠지? 인정!”
짐 퓨릭의 부친도 티칭 프로였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스윙을 교정하려 들지 않았다. 대학 시절 골프 선수로 활동하면서도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음에도 교정은커녕 다른 코치의 가르침도 과감히 거부했다.
최종 목표는 아마추어 시절의 성적이 아니라 프로 선수로 성공하는 것이라며 서두르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량을 가다듬고 묵묵히 연습하라 조언했다.
결과적으로 그건 옳은 결정이었다.
짐 퓨릭은 비록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대기록을 만든 프로 골퍼로 남았기 때문이다.
“일단 식사부터 시키지.”
“한 분이 아직 안 오신 거 아닌가요?”
“아니야. 저 자리는 라일리의 자리였어.”
“아!”
애초 필은 식당을 예약할 때 이 대표도 포함시킨 것이다. 그런데 라일리라는 이름이 나오자 짐 퓨릭도 반응했다.
“라일리가 못 온다고?”
“응. LA에 갔다더군.”
“LA? 설마…….”
“아니야. 그 녀석하고는 진즉에 인연을 끊었어. 아마 공 프로의 계약 때문인 것 같으니까 신경 끄자고.”
“아! 보고 싶었는데. 하하하.”
미켈슨은 물론 짐 퓨릭도 이 대표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기야 동갑이고 둘은 애리조나에서 대학을 나왔다.
이 대표도 애리조나 대학교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고 골프 매니지먼트 일을 했으니 과거에 알던 사이라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또한 둘 다 이 대표의 전 남편을 잘 알고 있는 것도 참으로 공교로운 부분이었다. 서로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서인지 잡다한 주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은 내일 승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주제였다. 흥미로운 것은 불을 지핀 사람이 짐 퓨릭이라는 것이다.
“타이거. 이번에는 이겨야지?”
“하하하. 그러고 싶습니다.”
“필. 최근 맞대결에서 2연승했으면 내일은 살살 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수없이 졌던 그 많은 기억은 다 어딜 갔는데?”
“하하하. 그렇다면 내일도 불꽃이 튀겠군!”
평생 2인자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미켈슨은 최근 우즈와의 맞대결에서 2번 모두 이기며 상승세였다.
전부 아니면 아무 것도 없는 이벤트 대회가 2번이나 열렸는데 팬들의 예상을 깨고 미켈슨이 다 이겼던 것이다. 투어에서의 성적은 눈에 띄지 않지만 그 둘의 이름값은 아직도 쟁쟁하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준 이벤트였다.
하지만 필상이 본 것은 그걸 부러워하는 짐 퓨릭의 묘한 심리였다. 63년생인 비제이 싱이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지만 그와 자신은 그 둘의 명성에 눌려 부수입마저 없지 않던가.
그런데 갑자기 화살이 필상에게로 향했다.
“공 프로. 자넨 누가 이길 거라고 보는가?”
갑자기 우즈와 미켈슨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결과는 나와 봐야 안다.
굳이 3자가 이러쿵저러쿵 끼어들 일이 아닌데, 괜히 자신을 물고 들어가는 짐 퓨릭이 얄미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눈빛은 필상의 대답을 강요했다. 그게 뭐라고…….
하지만 필상은 영리한 대안을 찾았다.
“짐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
“네. 저는 반대편에 걸겠습니다.”
“하하하. 이런, 이런! 한 방 먹이려다 도리어 당한 건가?”
필상에게로 향했던 시선이 졸지에 짐 퓨릭에게로 향했다. 필상은 이미 선언했다. 반대편에 걸겠다고.
그런데 그 말은 묘한 어패가 있었다.
무조건 반대편에 걸겠다는 말은 당신의 판단이 옳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도발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되새긴 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장군을 부른 자신에게 다시 멍군을 부른 필상이 절대 만만한 적이 아님을 스스로 밝힌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짐의 첫 마디도 의외였다.
“좋아. 그럼 나랑 내기를 하지.”
“내기요? 불법적인 건 사양하고 싶습니다만.”
“불법은 무슨!”
그 말을 하며 그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 하나가 1달러인지, 100달러인지, 아니면 100만 달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필상은 가볍게 받았다.
“10달러라면 저도 괜찮습니다.”
“하하하. 10달러라네? 10달러.”
그 말에 그뿐만 아니라 다들 크게 웃었다. 졸지에 바보가 된 것 같았으나 그 상황을 구제한 것은 미켈슨이었다.
“우린 주로 1달러 내기를 하거든.”
“아! 금액보다는 자존심이라는 거군요. 그렇다면 조금 더 금액을 올리죠. 10,000달러.”
“어허! 자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그 대신 이기는 사람이 먹는 게 아니고 지는 사람의 이름으로 기부하는 거로 하죠. 좋은 일에.”
보통 사람들에게는 거금이지만 지금 성적만 유지해도 이 자리에 있는 4명은 적어도 40만 불 이상을 받는다. 아무리 성적이 망가져도 만 달러를 벌지 못할 일은 없다고 봤다.
때문에 거액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지는 사람의 이름으로 기부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좋은 일에 쓰자면 거액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금 공제도 받을 것이고.
중요한 것은 루키인 필상이 그런 제안을 할 여유가 있다는 점이었다. 분명 난처한 입장에 몰린 것 같았는데, 매번 슬기롭게 돌파하는 모습에 다들 기이한 미소를 보였다.
이제 남은 것은 짐 퓨릭의 선택뿐이었다.
어차피 내기한 금액을 가지는 게 아니고 기부한다고 하니 훨씬 부담을 덜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애매했다. 자신이 누구 한 명을 선택하는 순간, 나머지 한 명은 서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을 이해한 것일까?
미뤘던 선택을 필상이 먼저 했다.
“전 우리 형한테 걸겠습니다.”
“형?”
“네. 우리 필 형!”
“으하하하. 들었지? 미스터 퍼펙트가 날 선택했다고. 역시 나의 형제라니까! 하하하.”
미켈슨의 반응이 뜻밖에도 너무 요란했다. 마치 정말 이긴 것처럼 좋아하는 태도는 승부와는 상관도 없어 보였다.
오로지 필상의 인정을 받은 것이 즐거운 것 같았다. 반대편에 서게 된 우즈와 퓨릭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에 본인도 좀 쑥스러웠는지 구차해 보이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요즘 공 프로의 레슨을 좀 받았거든.”
“레슨?”
“응. 스윙 메커니즘을 전체적으로 다듬고 있어. 힘이 아니라 스피드! 자세한 건 경기에서 직접 보여 주지. 하하하.”
필 미켈슨은 한 시대를 풍미한 프로 골퍼다.
그의 스윙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무기로 수많은 승리를 일궜다. 그런데 갑자기 레슨을 받았다니, 그것도 이제 갓 데뷔한 루키한테.
그걸 자랑이랍시고 떠드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짐 퓨릭은 뼈 있는 대꾸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냥 생긴 대로 살지. 성형 수술을 한다고 미인이 될 나이는 아니잖아?”
“미인이 되고 싶은 욕망은 할머니라고 없는 건 아니야. 다만 남의 시선이 두렵고 용기가 없을 뿐이지.”
대체적으로 노장들의 태도는 완고한 편이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좋은 추억을 버리고 싶지 않은 고집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윙을 바꿔 좋은 결과를 낸 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건 최근 비거리가 엄청난 젊은 선수들과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것과도 무관치 않다. 스윙을 교정하고 근육을 늘이면 단기적인 효과는 나온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굳어진 스윙의 한계는 단기간의 교정으로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통설로 굳어진 상태다.
“여하튼 용기는 가상하네.”
짐 퓨릭의 그 말은 결국 스윙 교정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우즈가 나섰다.
“제가 부치와 결별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난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스윙이 필요했습니다.”
“그건 대성공이었지. 하지만 자네의 부상은 여전했잖아.”
“아닙니다. 교정을 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클럽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겁니다. 전 개인적으로 필의 시도는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봅니다. 만약 그가 자주 변화를 꾀했던 선수라면 모를까, 아마 처음이죠?”
우즈의 긍정적인 평가에 미켈슨의 표정은 더욱 밝아졌다. 훌륭한 적은 친구보다 소중하다는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맞아. 난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 아주 교만했던 거지. 그런데 우연히 이 친구의 경기를 보며 느꼈지. 그러고 보면 자넬 보고 진즉에 느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해.”
“하하하. 내일은 정말 버거운 하루가 될 것 같네요.”
“그런데 우리만 내기의 대상이 되는 건 너무 불공정한 거 아닌가?”
우즈와 미켈슨의 맞대결에서 갑자기 화제가 전환되었다.
챔피언 조에서 만날 두 사람의 대결이 사실은 더 주목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앞에 두고 승부를 논하는 것이 필상도 당황스러웠지만 짐 퓨릭은 더 황당했을 것이다.
이미 둘은 3타 차였기 때문에 우승자를 논하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씁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