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29화 (129/354)

129화. 80과 44

“고마워. 공 프로.”

더스틴 존슨은 84년생으로 필상보다 4살이 많다.

그래도 초면이기에 서로에게 말을 가볍게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더스틴의 친근한 어투는 전혀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

적어도 편견을 가진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상도 같은 길을 가는 선배의 예우를 갖추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한 수 잘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더 고맙죠. 우리가 하루 이틀 이 바닥에 머물게 아니잖아요.”

“하하하. 그야 그렇지.”

평소 필상은 경기 중에 동반자와 가급적이면 불필요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일단 그게 루키의 자세이고 외국 선수들과의 감정의 선이 다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가 더스틴처럼 예의를 지키고 서로의 플레이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점이 있다면 굳이 몸을 사릴 이유는 없다.

엄청 화려하게 출발했지만 의외로 스코어는 잘 줄지 않았다. 컨디션도 좋고 집중력도 발휘했지만 골프라는 것이 참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나마 586야드의 파5인 9번 홀에서 모처럼 둘 다 버디를 잡으며 그래도 기분 좋게 전반 홀을 끝마쳤다.

-16 리키 파울러, 짐 퓨릭

-15 PS KONG, 아담 스캇, 키건 브래들리

-14 타이거 우즈, 더스틴 존슨, 필 미켈슨

리키 파울러도 대단했지만 더 놀라운 선수는 역시 짐 퓨릭이다. 2010년에 3승을 거둔 뒤, 무려 5년이 지난 2015년 RBC Heritage에서 우승한 것이 그의 마지막 우승이다.

노장인 그는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가 272야드로 200위권에 들지 못하는 데도 매년 꿋꿋하게 시드를 유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 대회에서는 우승에 대한 가능성을 한껏 높였다.

필상도 더스틴도 후반 홀로 이동하며 리더 보드 최상단에 위치한 그의 이름을 확인했다. 두 명 모두 장타로 환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성적이 더욱 감동스러웠다.

“짐이 가장 무서운 경쟁자로군!”

“리키가 아니고요?”

“글쎄……. 만약 날씨가 좋다면 리키가 유리하겠지.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내일은 강풍은 물론 비까지 온다잖아.”

“비요?”

자신이 얼마나 시합에 집중하지 못했는지가 드러났다.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못한 필상이 되묻자 더스틴은 픽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경기에서 기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다른 문제로 인해 사소한 것도 챙기지 못한 필상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즈가 갑자기 타수를 잃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죠? 리키 파울러의 기세에 눌리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보기보다는 자신의 샷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전성기의 그를 보면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감이 넘쳐흘렀습니다. 지금의 우리 공 프로처럼 말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절대자와 같았던 모습이 현재 공 프로와 빼닮은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같은 굳건한 믿음, 1타 차로 뒤지고 있지만 반드시 역전시킬 것이라는 기대감은 이제 곧 황제의 보좌에 오른다는 전조가 아닐까 싶네요.

-저 또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세계적인 선수들과 기량을 겨루며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승을 바라지만 반드시 우승만이 최고의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다 소중한 밑천이 될 테니까요!

허덕호 위원은 필상이 지금처럼 당당히 경쟁하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웠다. 비록 늦은 나이에 골프를 시작했지만 아직 필상의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아 보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양한 코스에서 보다 실질적인 경험을 고루 쌓아야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골프가 반드시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독하게 겪고 있지만 PGA의 배타적인 분위기에 적응도 해야 하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강자들과 겨뤄 보면서 자신의 스윙을 보다 잘 가다듬는다면 그저 한 해에 1, 2승을 하는 선수가 아니라 절대 권좌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후반은 안전하게 가야 할 것 같아.”

“느낌이 안 좋아요?”

“그래.”

필상이 무심코 던진 말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익숙해진 성호는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실제 코스 세팅도 전반에 비하면 전장도 길어졌고 핀의 위치도 교묘하게 바뀌었다.

난이도를 높인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적어도 TPC 소그래스는 그런 코스가 아니었다. 약간의 변화만 줘도 팔색조처럼 난이가 바뀌는 마술이 펼쳐져 선수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간다.

그걸 그저 느낌만으로 잡아낸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 징후에 대한 결과는 후반 내내 이어졌다.

확신이 없는 한 안전한 선택을 이어 간 필상은 후반 나인에 2타를 줄인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컨디션이 나빴던 더스틴은 오히려 2타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야! 정말 아쉽네요. 저것만 들어갔으면 18홀 최저타 기록을 갈아치웠을 거 아닙니까!

-8m 퍼팅이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입니다. 저는 공 프로가 무리하지 않고 거리를 정확히 맞춰 파를 기록한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대기록을 눈앞에서 놓쳤는데 그런 말씀이 나오세요? 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선수들의 후반 9홀 기록을 보십시오. 언더파를 기록한 선수는 단 9명뿐입니다. 그것도 -3은 1명, -2는 3명뿐이라고요.

필상이 18번 홀 버디 퍼팅을 놓친 걸 임 캐스터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아니, 마치 1m 퍼팅을 놓친 것처럼 억울해했다.

물론 그는 필상이 18홀 최저타 기록을 갱신하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며 한 홀 한 홀 중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스코어는 상대적인 기록, 오늘 결선에 오른 78명 중에 2번째로 잘 쳤다면 만족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나!

하지만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3을 기록한 선수가 단독 선두인 짐 퓨릭이고 아직 2홀이나 남았다는 거잖습니까!

-하하하. 어차피 내일 우리 공 프로와 챔피언 조에서 만날 겁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 공 프로의 탁월한 경쟁력을 믿어야지요.

-그건 그렇지만 여하튼 날씨도 좋은데 두 자리 수 언더를 놓친 것은 정말 아깝네요.

짐 퓨릭이 남은 두 홀에서 1타 정도를 잃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 확인해 보니 그는 그 어렵다는 17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 한 발 더 도망갔다.

-20 짐 퓨릭

-17 PS KONG, 리키 파울러

-16 아담 스캇, 타이거 우즈, 필 미켈슨

“내일 빅 매치가 여러 개 잡혔다고 아주 난리입니다.”

“우즈와 필 형의 대결이 더 관심을 받겠네.”

“그것도 그렇지만 형이랑 짐 퓨릭의 대결도 굉장히 흥미로울 것이라고 보는 것 같아요.”

“장타자 더스틴이 하지 못한 일을 짐 퓨릭이 대신 할 거라고 보는 건가?”

“그런 거 같아요. 노장과 신예의 대결!”

필상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짐 퓨릭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은 이미 신예라는 이름으로 묶이기에는 우승 경험이 너무 많다.

무려 11승을 거둬 웬만한 중견 선수들보다도 승수가 많다. 단지 PGA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만으로 평가받는 것은 많이 아쉬운 대목이었다.

결국 3타 차를 뒤집고 실력을 보여주는 수밖에.

“근데 왜 이 대표님이 안 보이지?”

“그러게요.”

“얼른 전화해 봐.”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빨리 확인하라고 독촉했다. 딱히 지은 죄도 없건만 왜 가슴이 쿡쿡 찔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써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어젯밤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것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이곳에 없었다.

중대한 일이 있어서 LA로 급하게 날아갔다는데 얼핏 들어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기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오늘 공동 2위로 올라선 필상의 내일 마지막 라운드의 결과는 추후 일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다.

“금요일에 오스틴으로 오겠답니다.”

“금요일에?”

WGC 델 매치플레이 출전까지는 한 주간의 여유가 있다.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리기 때문에 어차피 이번 대회가 끝나면 텍사스로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 대표가 미국에 함께 온 이유는 필상의 미국 생활을 직접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작 더 플레이어스의 최종 라운드도 보지 않고 일 때문에 떠난 것도 기이했지만 미국은 처음인 두 남자만 오스틴으로 가서 적응하라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직접 통화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필상은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오죽 바쁘면 그랬을까 합리화시켰지만 사실은 마음속에 남은 묘한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은 심리도 작용했다.

“콩!”

“콩이 아니고 공이라니까요!”

“그래. 콩. 콩이 아니라 콩!”

“에이!”

“오늘 아주 펄펄 날았던데?”

“형도 6타나 줄였잖아요. 그에 비하면 제가 -9를 친 것은 그다지 잘한 게 아니죠.”

“하하하. 나 필이야. 필 미켈슨!”

미켈슨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천하의 타이거 우즈도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왠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문제는 콧방귀도 뀌지 않은 필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봐, 콩. 저녁 같이 먹자. 내가 산다니까.”

그제야 발걸음을 멈춘 필상이 돌아보며 씩 웃었다.

“좋은 와인도 사실 거죠?”

“알았어. 근데 오늘 초대한 손님들이 좀 있어. 같이 어울려도 되겠지?”

“물론이죠.”

필상은 플로리다 해변의 풍경이 아주 멋지게 내려다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필상을 안내했다. 일행은 아직 오지 않았는지 일단 그와 성호, 셋이 예약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세팅된 좌석의 수를 세어 보니 무려 6개였다.

성호는 어딜 가든 같이 움직인다는 것을 미켈슨이 알기에 함께 저녁을 즐길 만찬의 손님은 3명인 것 같았다.

누군지 심히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냥 갑자기 나타날 그들을 직접 만나는 것이 더 흥미진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라일리가 LA에는 왜 갑자기 간 거야?”

“비즈니스가 있답니다.”

“자네 메인 스폰서는 나이키잖아. 아! 서브 스폰서 계약이라도 있나 보군.”

“제게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늘 알아서 잘하죠.”

“그럴 거야. 워낙 깔끔하고 똑똑한 여자니까.”

“그런데 우리 이 대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음……. 자네가 오해를 좀 한 것 같던데, 그런 건 아니고. 그녀의 헤어진 남편이랑 내가 좀 알지.”

“전 남편이요?”

“응. 지금도 LA에서 왕성한 사업을 하고 있지. 그녀의 전 직장 상사이기도 하고.”

“그렇군요…….”

그 대목에서 필상은 말이 없었다.

LA에 간 것이 그와 연관된다는 보장도 없고 자신과는 무관한 개인사인데 왜 신경이 쓰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기이한 분위기를 확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켈슨은 몇 마디 말을 첨부했다.

“라일리에게는 한참 모자란 남자였어. 아마 이젠 거들떠보지도 않을 걸. 나도 이젠 만나고 싶지 않은 자니까.”

“그렇군요.”

괜히 마음이 놓이는 자신을 느끼며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그녀와 가졌던 이해하기 힘든 고난은 극복하지 않았던가!

다시 그 굴레로 스스로 빠져드는 것은 필히 경계해야 할 사안이었다.

“오! 타이거!”

“내가 좀 늦었나요?”

“아니야. 우리도 지금 막 왔어. 콩, 인사 나누지.”

“아, 네. 안녕하십니까? 공 필상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미스터 퍼펙트. 오늘 저녁을 함께한다고 해서 제가 좀 끼어들겠다고 부탁을 했습니다.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항상 만나고 싶었던 분인데, 영광입니다.”

“한물 간 나를 아직도 이렇게 봐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하하하.”

“콩. 어째 나를 대하는 것보다 더 깍듯한 거지?”

“80과 44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그게 뭔데?”

“하하하. 농담입니다.”

얼렁뚱땅 넘기려 했지만 미켈슨은 금방 알아들었다. 그건 바로 우즈와 미켈슨의 PGA 공식 경기 승수였다.

우즈는 그 외에도 유러피언 투어 40승, 심지어 JGTO 2승도 거둔 말이 필요 없는 살아 있는 골프계의 전설이다.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자리매김했던 미켈슨도 대단하지만 역대 최고의 골프 선수를 꼽으라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제치고 타이거 우즈라는 이름을 꼽는데 주저하는 전문가는 드물다.

특정 부류에게만 허용되던 골프를 전 세계인이 즐기는 인기 스포츠로 변화시킨 그의 역할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이미 오래전에 골프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고 또한 골프를 통해 가장 많은 돈을 번 지극히 부러운 프로 골퍼다.

“콩. 자넨 이제 겨우 1승이잖아.”

미켈슨은 마음이 편치 않아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가장 아픈 부분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평생 2인자란 말을 듣고 산 그에게 우즈와의 비교는 역린이나 다름이 없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필상이 굳이 우즈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 농담이라는 것은 알지만 섭섭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필상의 말에 그의 표정에는 미소가 떴다.

“그러니까요. 그래서 제가 형님으로 모시는 거 아닙니까!”

“그럼 승수만 많으면 다 자네 형인가?”

“그렇지는 않죠.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에게만 형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으하하하! 어서 와인부터 골라. 아주 비싼 거로.”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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