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프로 스포츠의 꽃
-엄청난 탄도! 괜찮을까요?
임한석 캐스터는 이런 샷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늘 비거리가 각별해 갭 웨지로도 정확한 샷을 구사하리라 예상했는데, 이 탄도라면 결과를 바람에 맡기는 셈이 아니겠는가.
무모하다고 생각했는지 허 해설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더스틴마저도 치솟은 타구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로지 샷을 마친 필상만 여유롭게 다리를 꼰 채 지켜봤는데, 어느 순간 오른손을 들어 더 날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조금 더!”
“그래!”
웨지로 때린 타구는 아무래도 힘이 부칠 수밖에 없는 거리다. 하지만 바람은 45g에 불과한 공을 강하게 밀어붙여 결국 그린을 향하게 만들었다.
짧으면 곤란한 그린의 구조인데도 웨지를 잡은 것은 누가 봐도 과도한 선택으로 보였다. 하지만 타구는 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듯 둔덕을 넘어 깃대 앞 2m 지점에 떨어졌다.
살짝 우측인 것을 빼면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결과다. 믿기지 않는 신기한 장면에 비명과 같은 탄성이 터진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크게 튄 공이 다시 깃대 방향으로 굴렀다.
“겟 인 더 홀!”
딱히 왼쪽으로 기운 경사가 아니었음에도 깃대를 향해 움직이는 공을 보며 어찌 경악하지 않겠는가!
아쉽지만 홀컵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더도 말고 5cm가량 홀컵의 우측 옆을 스친 공이 탭인 버디 거리에 멈추었고 귀가 멍할 정도의 괴성이 3번 홀을 흔들었다.
티샷을 하러 걸어 나오던 더스틴도 축하의 말을 건넸다. 물론 그의 표정에는 어이없다는 불신의 생각이 엿보였다.
“나이스 샷!”
“고맙습니다.”
“바람의 신이 당신을 돕나 봐?”
“하하. 그런가 봅니다. 아주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다.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했다.
바람이 20야드 정도는 더 날려 줄 것이라는 느낌은 분명했지만 막상 그런 결정을 내리고 샷을 하는 내내 필상도 과연 자신이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뒷바람의 존재는 분명했기에 예상이 빗나가도 온 그린은 가능하고 퍼팅감도 좋아 모험을 해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너무 즐기는 거 아닌가요?”
“하하. 한 번 해 봤어. 느낌이 좋아서.”
“앞으로 또 이런 샷을 할 건 아니죠?”
“그래. 인상 풀어.”
성호는 필상이 과도한 시도를 반복하는 것이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캐디인 그로서는 필상이 구태여 위험부담이 큰 샷을 날리는 걸 만류하는 것이 옳다.
결과는 좋았지만 샷의 결과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맡기는 것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적절하다는 데 필상도 동의했다.
피치 못할 상황이라면 또 모를까, 아직 많은 홀이 남았고 선두와 1타 차까지 따라붙은 상황에 불확실성에 미래를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소득은 있었다.
자신이 집중해서 읽으려고 노력하자 바람의 세기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런 결과를 바란 거죠?”
“아니야. 바람을 회피하는 것도 좋지만 한 번 이용해 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시험해 본 거야.”
“그런 시험은 넉넉하게 이기고 있을 때나 하죠.”
“알았다니까.”
더스틴의 타구는 짧을 수밖에 없었다.
앞서 필상의 타구가 훨훨 날아가는 것을 보고 강하게 휘두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둔덕은 넘지 못한 공을 오르막 내리막까지 고심해 핀에 붙일 수 있을지 지켜볼 대목이었다.
딱히 퍼팅을 잘한다고 평가받지 못하는 그였지만 스스로 밝혔듯 경쟁심에 고취된 그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2퍼팅, 파로 위기를 극복해 냈다.
땅!
필상은 다시 1타를 줄여 3개 홀 만에 공동 선두에 이름을 올렸다. 월등한 기량에 현지 중계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락가락하던 평가가 더스틴 존슨이라는 강적을 만나서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이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타의 탄생은 프로 스포츠의 꽃이다.
그 주인공이 낯선 동양인이라는 것이 거부감으로 작용했지만 결국 관건은 팬들에게 어떤 감동을 전해 줄 수 있느냐이다.
보다 유연한 자세를 취할 수도 있지만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편견의 벽을 넘으면 오히려 더 큰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있다고 믿은 필상은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실이 서서히 필드에서부터 맺히기 시작했다.
-무섭네요. 정말.
-바람도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오후에는 바람이 강해 늘 선두권 선수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는데, 1:50에 출발한 우리 공 프로는 오전과 다를 바 없는 조건에서 타수를 파격적으로 줄여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이 대회 18홀 최저타 기록을 갈아치우는 거 아닐까요?
-바람만 도와준다면 못할 것도 없죠. 흥미롭게도 이 대회 18홀 최저타 기록은 -9에 불과합니다. 재작년 브룩스 켑카를 비롯해 무려 8번의 -9가 나왔지만 단 한 번도 두 자리 수 언더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 공 프로 그 기록을 깰 수 있는지 그걸 지켜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가 되겠네요.
모두를 흥분시킬 대단한 경기력을 보였지만 4번 홀의 퍼팅은 상당히 아쉬웠다. 티샷에 이어 세컨샷도 완벽했지만 2.2m 퍼팅은 공을 받아들이지 않고 토해 냈다.
홀컵 왼쪽을 타고 들어갈 줄 알았던 공이 반 바퀴를 돌고 다시 튀어나오자 팬들의 탄식이 그린을 가라앉힐 것 같았다.
5번 홀의 공략도 아쉬웠다.
티샷은 훌륭했지만 잘 친 타구가 그린 앞 러프에 맞고는 묘하게 좌측으로 튀어 벙커에 빠진 장면은 마치 신이 장난을 치는 것 같은 착각이 일게 했다.
그러나 6번 홀에서 6m 롱 퍼팅을 버디로 연결하며 기세를 올린 필상은 핸디캡 2번인 432야드 파4, 7번 홀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이젠 걸렸다 하면 350야드네요.”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네. 제 생각도 그래요.”
장타를 날리면 오히려 더 정확했다.
그건 통상적인 이론에 반하는 결과다. 때문에 은근히 불안하다는 성호의 의견에 필상도 동의했다.
한 번쯤 실수가 나올 때가 되었다는 공감, 그게 더 집중력을 높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또다시 354야드를 날린 필상의 티샷에 팬들의 환호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놀라운 것은 그 와중에도 더스틴은 꿋꿋하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348야드를 날리며 간발의 차이지만 자신의 장타력에 정확성까지 보탰다.
-우승 경쟁이 정말 뜨거워지네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공 프로와 더스틴 존슨의 가세가 불을 지핀 것 같습니다.
-세계 랭킹 1위! 그거 절대 함부로 볼 수 없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한때 장타자는 정확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만연했지만 그걸 보란 듯이 깬 선수입니다. 오늘 미스터 퍼펙트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만나 더 강한 투지를 끌어올리는 모습,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리키와 우즈의 자존심을 건 근성 있는 플레이도 눈에 띄네요. 쫓아가면 도망가고 또 쫓아가면 도망가는 술래잡기가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라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경쟁이다.
하지만 중계하는 캐스터가 술래잡기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필상에 대한 두터운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6번 홀까지 5타를 줄여 -13까지 올라섰지만 리키와 우즈는 나란히 2타를 줄이며 다시 성큼 달아났다. 그래도 추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경기를 지켜보는 것이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그 와중에 80야드를 피칭으로 러닝 어프로치를 시도한 필상의 공이 깃대를 때려 버리자 관중들의 흥분은 끝을 모르게 치솟아 올랐다.
“아휴! 그냥 꽉 들어갔어야 하는데!”
“깃대 안 맞았으면 어쩔 뻔했냐! 운이 좋았어.”
바람의 영향을 최소화시키려고 굴렸다.
하지만 에이프런에 떨어뜨리고자 했던 타구가 그린에 떨어지는 순간, 필상은 등에 소름이 돋았었다. 너무 길어 오르막 경사를 타고 그린 반대편까지 구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깃대에 맞지 않았다면 아찔한 내리막 퍼팅을 남겼을 것이다. 깃대에 맞고 뒤로 튕겨 나온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렇다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3m 오르막 훅 라인 경사가 제법 크지만 필상은 과감하게 밀었고 정확히 홀컵 중앙을 향한 공이 홀컵 속으로 사라졌다.
타앙!
더 놀라운 것은 이어진 238야드의 파3, 8번 홀의 티샷이었다. 7번 유틸리티로 컨트롤 샷을 한 이유는 바람이 뒤에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린 앞 러프에 떨어진 공이 그린을 타고 오르더니 또다시 힘차게 굴러 깃대를 강타하는 신기를 보여준 것이다.
이번 홀의 티샷도 실은 너무 길었던 것이다.
그러나 팬들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그 먼 거리에서 깃대를 강타한 정확한 방향성에 전율을 느낀 팬들은 급기야 필상의 닉네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미스터 퍼펙트! 미스터 퍼펙트!”
누군가 ‘미스터’를 선창하면 다수의 갤러리들이 ‘퍼펙트’라는 단어를 외치는데 그들의 뇌리에 필상의 샷은 완벽하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또 버디 기회를 잡았네요. 하하하.
-4.5m 이번 퍼팅은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길면 그냥 프린지까지 굴러 내려가는 경사입니다. 애당초 처음부터 내리막이면 좋은데 평지를 지난 뒤에 내리막 경사가 이어져 과연 정확한 거리를 보낼 수 있을지 그게 걱정입니다.
-아이고! 우리 허 위원님 걱정도 팔자십니다. 현재 우리 공필상 프로의 평균 퍼팅 수가 참가 선수 중에 1위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전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하하하.
-물론 저도 공 프로의 침착하고 치밀한 성격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선 퍼팅들이 모두 과감했던 것이 왠지 마음에 걸립니다. 이번 스트로크는 절대 과감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일단 지켜보시죠.
허 해설위원의 걱정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퍼팅에 관한한 큰 실수가 없었던 데이터가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오늘 필상의 퍼팅은 대부분 과감한 시도였다.
다행히 의도한 대로 잘 들어갔지만 이번 퍼팅은 절대 만만치 않다는 경고를 필상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인지했는데 필상이 몰랐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필상은 마치 허 위원의 충고라도 받은 듯 굉장히 진지하게 라인을 살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스틴의 티샷이 더 짧아 그가 먼저 비슷한 라인의 퍼팅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참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그의 퍼팅은 조급한 그의 심리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스트로크였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굉장히 담담하고 투지에 불탔지만 자신의 단점이 드러날 대목에 이르렀다는 걱정이 그를 불안의 구덩이에 담가 버린 것 같았다.
-에계! 저게 뭐죠?
-으음……. 뒤땅입니다. 살짝 밀어야 할 퍼팅인데 테이크 백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렇다면 당황하지 말고 얼른 자세를 풀고 다시 정렬을 했어야 하는데, 너무 긴장한 것 같습니다.
-세계 1위도 저런 터무니없는 실수를 하는군요. 퍼터로 뒤땅을 때리다니요!
그가 오늘 지금까지 보여 준 출중한 기량이 한 방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보내야 할 거리는 5.5m, 그런데 3m를 조금 지난 거리에 멈춰선 공은 다시 위험천만한 내리막 퍼팅을 남겨 두게 된 셈이었다.
마크를 하고 물러서는 그의 표정에 당황함을 넘어 자괴감이 깃든 것을 보며 필상은 조용히 자신의 퍼팅 루틴을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한 마디 격려라도 해 주고 싶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정확한 라인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비록 자신의 퍼팅에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남의 일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으흐!”
떨어졌어야 한다.
하지만 공은 홀컵 위를 스쳐 뒷부분을 맞았지만 그냥 퉁 튀어 뒤로 흘러 버렸다. 더 이상 부드럽게 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훌쩍 넘어가는 것을 보며 필상은 속이 쓰렸다.
-저, 저게 왜 안 들어가죠? 결국 내리막에서는 홀인이 불가능하다는 말인가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론적으로는 롤링을 하지 말고 백스핀이 먹도록 밀어야 합니다.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퍼터로도 스핀을 먹일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보통 좋은 퍼팅은 공을 굴리는 롤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공의 아랫부분을 때려 공이 구르지 않고 밀려서 들어가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정확한 이론을 설명했지만 임 캐스터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런 경사에 핀을 꼽는 것 자체에 대해 성토를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린이 빠르고 경사가 있어도 퍼팅한 공이 오르막에서 멈춰선 뒤에 다시 뒤로 구르지 않도록 세팅하는 것이 통상적인 그린 경사에 대한 규정이다.
그게 지켜지지 않는 그린 경사라면 승부라는 것이 기량보다는 운에 좌우되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필상의 퍼팅을 참조한 더스틴이 허 위원이 언급한 퍼팅을 직접 몸으로 시현했기 때문이다. 스트로크 피니시를 자연스럽게 들어 올리지 않고 끝까지 꾹 눌렀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다소 강하게 밀리는 것 같았던 공이 내리막에서도 현격히 속도가 줄며 홀컵 안으로 쏙 사라졌다.
“와아아아! 나이스 파!”
잔뜩 실망했던 팬들이 지르는 환호성에 그제야 비로소 더스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 뒤에 퍼팅의 고수인 필상도 하지 못한 환상적인 퍼팅에 성공했으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필상도 남은 퍼팅을 구겨 넣으며 나란히 파를 기록했다. 같은 성적이지만 시작과 끝의 분위기는 완전히 상반되어 괜히 찜찜했다.
하지만 9번 홀을 향하던 와중에 더스틴의 음성이 들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