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좋은 경쟁자
꽈아앙!
마치 폭탄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임팩트가 만들어졌다. 장타자인 더스틴에 비하면 슬로우 모션 같은 느리디 느린 테이크백이다.
하지만 잔뜩 힘을 머금은 클럽헤드가 내려올 때는 가차 없었다. 하체부터 시작된 체중 이동은 마치 도끼질이라도 하듯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엄청난 속도로 공을 부술 듯 내리찍었다.
필상도 절대 작은 키가 아니다. 게다가 풀스윙에 근접해진 스윙 아크는 업라이트한 궤적 때문에 더욱 크게 느껴졌다.
“와아아! 굿 샷!”
대부분의 골프팬들은 강력한 드라이브 티샷에 흥분한다. 스코어도 중요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모든 홀의 출발인 티샷이야말로 골프의 백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멀리 나가는 샷이고 결정적인 실수도 잦기 때문에 좋은 티샷을 보면 감출 수 없는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번 필상의 티샷은 일단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가슴이 후련한 장타였기 때문이다. 또한 1번 홀에서는 빗겨 갔지만 이제라도 더스틴과 정면 대결을 펼친다고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보여 주나요?
-350야드 이상 나갈 장타입니다. 그런데 방향이 너무 정직한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요. 353야드를 넘으면 러프, 그 뒤로 벙커와 호수가 이어지는데 설마 그렇게까지 멀리 나가기야 할까요?
-그럴 것 같다는 게 문제입니다. 제가 느끼건대 지금 공 프로의 티샷은 370야드 이상 날아갈 것 같습니…….
허 해설이 말끝을 흐린 이유는 스트레이트 구질로 날아가던 공이 최고점에 이르기 바로 직전에 드로우를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페어웨이가 길을 갈아타듯이 좌측으로 휘어져 다시 그린까지 이어진 형태를 감안해 필상이 드로우 구질의 티샷을 구사했던 것이다.
-우와아아아! 드로우 샷이었네요! 드로우!
-그렇다면 더욱 쭉쭉 뻗어 나가도 됩니다. 아예 400야드까지 날아가 웨지로 2온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하하하!
-안 되란 법도 없죠.
540야드 파 5홀에서 너무 과한 욕심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드로우를 먹은 타구는 생각보다 훨씬 멀리 날아갔고 걱정하던 지점보다 좌측으로 20야드 떨어진 지점에 떨어졌다.
놀라운 것은 캐리가 무려 364야드를 찍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직도 힘을 잔뜩 머금은 타구는 마치 물기 젖은 잔디에 떨어진 것처럼 힘차게 굴렀다.
“대체 몇 야드나 나간 건가요?”
“으음……. 400야드에 조금 못 미칠 거야.”
“400야드요? 허허허…….”
클럽을 받으러 다가온 성호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실 연습 중에는 400야드 이상을 날린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이제껏 필상은 단 한 번도 시합에서 그런 샷을 날린 적이 없다. 대략 90%의 힘을 쓰는.
아마도 실전에서는 정확성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님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마치 꼭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비장의 무기였던 것이다.
“그렇게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
“흐흐……. 형은 정말 괴물입니다. 괴물!”
“별로 좋게 들리지 않는데?”
“인간 같지가 않아요.”
“인간이 아니면 뭔데?”
“괴물이라니까요. 인간계에 나타난 돌연변이 몬스터!
“됐고. 더스틴의 샷이나 지켜보자.”
계속 대화를 나누기 부담스러웠다.
갤러리들의 요란한 소음 때문에 딱히 조용해야할 이유는 없지만 티 그라운드로 올라가는 더스틴의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이다.
한 방 제대로 맞은 그가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상대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오판이었다.
따앙!
미스 샷을 할 만한 여건이 충분하다고 봤지만 그의 티샷은 강력하고 정확했다. 왜 자신이 데뷔 이후 한 해도 우승을 거르지 않은 강자인지를 만방에 알리는 것 같은 멋진 샷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타구의 궤적이 필상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애초에 드로우 샷을 한다는 것이 너무 티가 났다.
필상의 어드레스는 딱히 드로우를 때리기 위한 자세가 아니었지만 그의 오른발은 반 뼘 정도 왼발보다 뒤에 있었다.
또한 에이밍도 아예 호수의 우측 끝을 봤다. 그래서 타구의 궤적이 더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 일단 방향은 페어웨이를 지켰으니 무의미했지만 누가 더 멀리 날렸는지 그게 궁금했다.
-우후! 둘 다 장난이 아니네요.
-이러니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가 300야드도 되지 않는 선수들은 한계를 느끼는 겁니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와! 이겼어요. 천하의 더스틴 존슨보다 우리 공 프로가 무려 19야드나 더 멀리 보냈습니다.
이건 멀리 보내는 시합이 아니다. 하지만 필상의 티샷 비거리가 379야드를 날린 더스틴이 상대도 되지 않는 398야드로 찍히자 임 캐스터는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컨샷을 날리기 위한 공의 위치다. 필상은 핀에 이르기까지 페어웨이를 지나는 138야드를 남겼지만, 왼쪽으로 심하게 휜 더스틴의 공은 161야드가 남았는데 그린에 도달하기까지 러프와 벙커를 넘겨야 했다.
-서로에게 상승작용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상승작용이요? 굳이 뭐 그럴 필요까지 있나요? 1번 홀에서 한 번 당했으니 이번 홀까지 밀리면 우리 공 프로가 보다 편한 플레이를 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따라 바람이 잔잔하지만 그래도 동반자의 샷이 좋으면 그걸 참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실수가 많아 경기가 느슨해지면 공 프로에게도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닙니다.
-하기야 경쟁자는 더스틴 존슨이 아니고 타이거와 리키로군요. 위원님의 말처럼 더스틴이 우리 공 프로의 길잡이가 되라고 응원이라도 해야겠네요. 하하하.
필상은 자신이 상대를 너무 만만히 봤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번 홀에서 86야드 웨지 샷을 붙이지 못해 버디를 놓쳤지만 더스틴은 161야드의 세컨샷을 피칭웨지로 홀컵 2m지점에 먼저 붙여 버렸다.
장군을 치자 멍군이 날아온 셈이다.
1번 홀에서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으나 이내 자신의 페이스를 찾은 그의 샷에 필상은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집중했다.
만약 티샷을 기가 막히게 날린 이 홀에서 더스틴이 이글을 기록하고 자신은 놓쳐 버리면 오히려 기세를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허!”
살짝 긴장한 것인지 필상의 컨트롤 샷은 생각만큼 잘 붙지 못했다. 그래도 4m 퍼팅이면 이글 기회는 충분하지만 뒷바람을 탄 공이 의도한 것보다 길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왜냐면 내리막 옆 라인의 고약한 퍼팅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린으로 이동하던 필상의 곁으로 서둘러 다가온 더스틴이 진지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미스터 공. 당신 정말 대단해.”
“하하. 대단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동료들이 그러더라고. 당신이 정말 대단하다고. 하지만 난 솔직히 믿지 않았어. 그런데 오늘 같이 경기를 해 보니까 너무 좋아.”
“만만해서 좋은 건 아니죠?”
“물론이지. 이런 기분 참 오랜만이거든. 누구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느낌. 난 이게 정말 엄청나게 좋거든.”
변태라고 해야 하나?
그건 아니다.
경쟁을 달고 사는 프로 선수에게 그런 성향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다. 심장이 조여드는 긴장 자체를 즐긴다는 것, 그것보다 무서운 경쟁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상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좋은 경쟁자는 언제든 환영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깨닫자 자신이 방금 전에 긴장한 나머지 원하는 샷을 만들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부끄러웠다.
자신도 그처럼 얼마든지 팽팽한 경쟁을 즐길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 너무 어렵네요.
-네. 욕심을 부리면 훅 지나가 다시 옆 라인 퍼팅이 남기 때문에 너무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톡 건드려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워야 말이죠!
4m지만 그린 빠르기를 고려하면 2m를 보내는 스트로크도 위험했다. 그냥 경사를 잘 태우는 정도로 가볍게 밀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부담스러운 방향을 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필상의 표정은 담담하다 못해 차가웠다.
앞뒤로 라인을 확인한 필상은 공의 라이를 정리하고 뒤에 서서 스트로크 크기를 조절하기 위해 빈 스트로크를 몇 번 반복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너무 강해 보였다. 들어가면 좋지만 들어가지 않으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결과가 나오지 않을지 지켜보는 이들의 입안이 바짝 마를 정도였다.
스으윽…….
필상의 실제 퍼팅은 연습한 그대로였다.
또한 생각만큼 라인을 많이 보지도 않았다.
너 나 할 것이 없이 그냥 붙이는 게 어떨지 걱정하는 표정들뿐이었다. 그런데 경사를 타고 쭉쭉 굴러가던 공이 그냥 홀컵으로 쑥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동시에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나이스 퍼트!”
“퍼펙트! 퍼펙트! 퍼펙트!”
이곳에 온 이후 가장 큰 응원의 함성을 들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필상의 닉네임을 부르짖었다.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하기 힘든 과감한 퍼팅을 성공한 필상의 용기에 대한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만약 실패했다면 오히려 경솔하다는 인식이 더 강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경을 뚫고 성공한 한 번의 퍼팅은 기대 이상의 환호성을 불러 일으켰다.
-아! 정말 멋지네요. 우리 공 프로!
-하하. 원래 저런 선수였습니다. 누가 그를 알았고 기대나 했나요?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참가한 대회마다 전문가들의 분석마저 무색케 하는 기적의 행로를 지나왔습니다.
-그렇죠. 18홀 최저타, 72홀 최저타 기록을 갱신했고 13번의 대회에 참가해 12번의 우승을 거뒀죠. 그게 다 9개월 사이에 이룩한 전대미문의 기록입니다.
-1년 안에 지구촌에 존재하는 가장 큰 5개 투어의 시드를 모두 확보했습니다. 이건 절대 깨어지지 않을 신화라고 생각합니다. 신화(神話)!
필상에 대한 환호성이 2번 홀 그린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요란했지만 그 와중에도 더스틴은 조용히 자신이 해야 일을 했다.
라인을 살폈고 자신의 루틴대로 차분하게 어드레스를 취했다. 그리고는 과감한 스토로크로 홀컵 뒷벽을 때리며 이글을 만들어 냈다.
-12 타이거 우즈, 리키 파울러
-11 PS KONG, 아담 스캇, 키건 브래들리
-10 더스틴 존슨, 짐 퓨릭, 필 미켈슨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선두권의 리더 보드에 필상과 더스틴의 이름이 함께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아마 미켈슨은 섬뜩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3번 홀로 이동했다.
“오늘은 159야드에요.”
“거리는 좋은데 핀 위치가 아주 지랄이네. 좌측에서 몇 야드나 되지?”
“좌측에서 3야드, 뒤에서 3야드에요.”
“그린 중앙을 둔덕을 넘으면 내리막이잖아.”
“짧으면 더 고약해요. 쓰리 퍼팅이 우수수 나올 겁니다. 차라리 벙커샷이 나아요. 그래도 오르막이니까.”
“…….”
필상은 느닷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하늘을 보며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필상은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느껴 보려고 노력했다.
지면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공중에는 분명히 바람이 존재했다. 탄도를 띄울 샷이기 때문에 바람의 영향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갭 웨지.”
“52도요?”
“응.”
잠시 뜸을 들인 성호는 일단 필상이 원한 갭 웨지를 건넸다. 하지만 표정은 영 마뜩찮아 보였다.
설사 뒷바람이 분다고 하더라도 평소 140야드로 조준된 갭 웨지는 너무 짧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분명히 말했다. 짧으면 아주 안 좋다고.
하지만 감히 개길 수 없었다.
자신이 뭐라든지 필상은 클럽을 바꾸지 않을 테고 오히려 구박을 받을 확률이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어허! 화면에 잘못된 정보가 뜬 거 아닌가요?
-52도 웨지를 잡았군요. 아주 좋습니다.
-159야드인데요?
-앞서 경기한 선수들의 티샷 탄착군을 보세요.
허 해설은 앞선 66명이 날린 티샷의 랜딩 지점이 표시된 화면을 임 캐스터에게 보여 줬다. 잠시 후 그건 시청자들이 보는 화면에도 같이 떴다.
그런데 159야드의 비교적 짧은 파3 홀인데도 탄착군은 마치 어리어리한 신병의 영점사격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이걸 보고 대체 무엇을 확인할 수 있는 거죠?
-심하게 흩어져 있는 것 같지만 엉뚱한 지점들을 빼고 보면 크게 두 개의 탄착군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 네. 그렇긴 하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할 것은 바로 아너로 나선 선수들이 대체적으로 타구가 길어 벙커샷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짧아서 중앙의 둔덕을 넘지 못한 점들은 대부분 두 번째로 샷을 한 선수들의 것이로군요!
-바로 그렇죠! 뒷바람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공 프로는 그걸 어떻게 캐치한 거죠? 공중에 올라가 보지도 않고.
-그게 바로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강자의 특징입니다.
그 말은 이성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은근히 공감이 됐다. 임 캐스터도 필상이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떤 말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샷의 결과다. 마침 루틴을 밟아 나가던 필상의 웨지가 힘차게 휘둘러졌다.
평소보다 임팩트가 조금 강하다는 느낌은 들었으나 더 놀란 것은 타구의 탄도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높이 치솟은 것이었다.
바람이 강한 날, 대다수의 선수들은 가급적 낮은 탄도의 샷을 구사한다. 필상도 그 방면에는 일가견이 있어 이번 샷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