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26화 (126/354)

126. 더스틴 존슨

이 대표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좀 찜찜하기는 했다.

막상 얼굴을 보면 굉장히 쑥스러울 것 같지만 그래도 어제와 오늘의 이 대표는 다르게 느껴졌다.

마음속의 찜찜했던 욕망을 잠재운 것은 만족스러우나 그 상대가 하필 이 대표였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보기 드물게 세련되고 고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차이도 제법 나지만 언감생심 다른 마음을 품기는 어려웠다. 뭔가 노는 물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함부로 넘볼 상대가 아니라고 여겼었다.

물론 깊은 패배 의식에서 막 벗어날 시점과 지금 자신의 위상은 다르다. 또한 사랑하는 여인이 생겨 가정까지 꾸리지 않았던가.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할 텐데…….”

그녀의 개인사에 대해 아는 바도 없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젯밤의 경험이 전보다 그녀를 더욱 각별하게 느끼게 만든 것 같았다.

비록 사실이 아니고 그런 일이 현실에서 재현될 일은 없다고 믿지만 그녀는 이제 자신의 기억 속에 특별한 여인으로 각인이 되었다.

물론 그 일로 인해 앞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여전히 자신은 가정을 잘 지킬 것이고 그녀와의 사업적인 파트너십도 공고하게 이어갈 것이다.

다만 행동을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은 분명히 했다.

***

“안녕하십니까?”

“어? 이게 누군가?”

“하하하. 안병훈입니다. 진즉에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아니지. 루키인 내가 투어 선배를 먼저 찾아가 인사했어야 하는데, 알다시피 내 코가 석 자다 보니. 하하하.”

이번 대회에 출전한 한국 국적 선수는 필상을 포함해 5명이다. 2017년 챔피언인 김시우, 안병훈, 강성훈, 임성재다.

워낙 신경 쓸 일이 많아 미처 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지난해 신한동해오픈에서 안면을 텄던 안 프로가 필상의 연습 타석으로 찾아온 것이다.

아직 통성명 외에는 인연이 없지만 91년생인 안 프로는 인상에서 느껴지듯 털털하고 꾸밈이 없는 성격이었다.

“어제 바람 때문에 고생을 좀 하셨죠?”

“나한테만 부는 바람도 아닌데 뭘.”

“하하하. 공 프로님이 오셔서 전 한결 힘이 납니다.”

“왜? 내가 여론의 방패가 되어서?”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동양 선수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계시잖아요.”

“그래 봐야 톱 10에도 들지 못했는데 쑥스럽게 왜 그래.”

“첫 대회 출전에 우승했고 이번 대회도 우승권에 계시잖아요. 이쪽 애들이 과하게 반응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공 프로님에게 공포를 느낀다는 거거든요.”

“공포?”

“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아무리 상위권에 올라가도 기사가 나지 않잖아요. 하하하.”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안 프로는 오히려 부러워했다. 또한 그런 말을 함으로써 필상이 보다 편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라는 격려이기도 했다.

4살이나 어리지만 보다 많은 투어 경험을 지닌 그가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보태고 싶어 찾아왔다고 생각하니 기특했다.

경쟁자지만 선의를 가진 그를 보자 기분이 좋았다. 이역만리에 나와 작은 따스함이라도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같이 연습이나 할까?”

“그러죠.”

필상은 연습하면서 안 프로의 샷을 주의 깊게 봤다.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힙턴이 좋아 타구에 힘이 제대로 실렸다. 본인 스스로 강조하길 스윙 스피드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 스윙도 그랬다.

덩치도 건장하고 좋은 스윙에 필요한 근육도 적절해 보였다. 다만 티샷의 방향성은 그다지 좋지 못한데, 그건 비거리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손해 본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샷이 아주 좋네!”

“정말이십니까?”

“그래. 내가 볼 때 더 이상 좋기는 힘들 것 같아.”

“그런데 왜 성적이 나지 않죠?”

“그건 자신의 기량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닐까? 아니면 물러 터졌던지.”

“하하하. 꼭 새겨듣겠습니다.”

사실 필상이 분석한 바로는 퍼팅이 좀 아쉬웠다.

그러나 퍼팅은 함부로 코치할 수가 없다. 뭔가 얘기해도 그걸 당장 시합 중에 적용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머리만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보여 줬듯이 필상도 일단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독심을 품으라는 말도 보탰다. 흔한 내용이지만 현재 골프계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주인공의 말이기에 보탬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안 프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내 티오프 시간이 되어 먼저 연습장을 떠났다.

“안 프로의 성적이 어떻게 되지?”

“으! 기껏 같이 연습해 놓고 성적도 몰랐단 말이에요?”

“그럴 여유가 없었어. 대회 기록에 대한 자료 좀 줘 봐.”

예선을 마친 현재 컷은 -1에서 결정되었고 공동 선두는 -12를 기록한 타이거 우즈와 리키 파울러였다.

무려 78명이 11타 차이에 촘촘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인데, 만약 강풍이 심술을 부린다면 공동 70위도 우승하지 말란 법은 없다.

-4를 기록한 안 프로는 공동 41위였고 오늘 무빙데이를 잘 견뎌 내면 상위권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우후! 노장들이 선전하네?”

-10, 공동 6위에 짐 퓨릭과 필 미켈슨이 떡하니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나란히 1970년생이라서 노장에 속하건만 경험이라는 자산이 활용된 게 아닌가 싶었다.

“쉰이 넘은 양반들한테 밀린 느낌이 어떠세요?”

“하하. 나도 쉰이 넘을 때까지 은퇴하지 않을 건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근데 필 형은 어딜 간 거야?”

필 형은 필 미켈슨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필상이 나타나면 늘 함께 연습하던 그가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연습 퍼팅 그린에 있을 겁니다. 샷 점검 마치면 그리로 오라던데요?”

“아하!”

작년부터 3월에 대회가 열리면서 코스가 전체적으로 소프트했다. 북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욱 강해졌는데도 스코어가 잘 나오는 이유가 바로 런이 없는 부드러운 잔디와 그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때문에 올해는 그린을 보다 단단하게 만든다는 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디가 많이 나오자 첫날보다 어제 그린 스피드가 훨씬 빨랐다.

실제 필상도 퍼팅에 어려움을 겪었고.

저간의 사정을 확인한 미켈슨의 행동을 보면 아마 남은 이틀간의 경기는 퍼팅에서 승부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필상도 바로 연습 그린으로 향했다.

“좋으시겠습니다.”

“어? 왔어?”

“좋으시겠다고요?”

“뭐가?”

“우승 기회를 잡으셨잖아요. 그리고 뭘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하하. 말 시키지 말고 어서 퍼팅 연습이나 해.”

진지한 그의 태도에 필상도 농담을 접고 퍼터를 꺼내 들었다. 어제처럼 감각이 부딘 것이 아니라 오늘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기회였다.

다만 빨라진 그린 스피드에 적응하는 것은 필요했기에 필상은 묵묵히 연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 공 프로가 1번 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갤러리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네요. 이런 저런 말이 많아도 역시 인지도는 무시할 수 없는 거겠죠?

-어디 얼마나 잘 치나 보자! 그런 마음이라면 그다지 반갑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국 팬들도 상당히 많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골프는 개인 스포츠인데, 지나치게 국적을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평범한 루키였다면 이렇게 억지에 가까운 답답한 상황은 없었을 겁니다. 당장 PGA를 씹어 먹을 것 같은 실력을 갖췄다고들 하니, 그게 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 그런 측면도 있군요.

필상은 먼저 와서 기다린 동반자와 인사를 나눴다.

결선은 2인 플레이로 진행되기 때문에 동반자의 플레이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투어를 대표하는 장타자인 더스틴 존슨이기에 필상과의 대결에 더욱 많은 관심이 쏠렸다. 장타에 투어 20승까지 기록한 그는 아무리 슈퍼루키 필상이라고 하더라도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주류를 이뤘다.

“반갑습니다. 더스틴.”

“미스터 퍼펙트.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 보여 다행입니다.”

“하하.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제 저보다 더 힘든 하루를 보내신 것 같던데, 괜찮습니까?”

“하하하. 제가 한 방 먹었군요.”

더스틴 존슨은 첫 날 -8을 몰아치며 단독 선두에 올랐다.

샷이 절정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오늘 필상과 동타로 한 조에 편성된 것을 보면 어제 겨우 이븐파를 기록했다는 말이다.

그 이유까지 알아보지는 않았으나 샷 난조를 겪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오늘 필상과 한 조로 편성된 뒤에 지난 이틀간 필상의 경기 내용을 확인해 봤다고 시인했다.

그건 거꾸로 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단 기본 정보는 알아봤다는 말에 기분은 좋았다.

한국에 가 보고 싶다는 둥, 최근 결혼한 아내가 보기 드문 미녀 골퍼라는 둥, 사적인 동향도 살펴본 것 같았다.

물론 필상도 그의 스윙은 진즉에 분석했었다. 194cm의 큰 신장에서 터져 나오는 파워는 흉내 내기 힘든 빠른 스윙 스피드와 함께 아무나 할 수 없는 스윙을 만들어 냈다.

필상도 따라 해 봤지만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페어웨이 적중률이 65%로 상위권이라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선수다.

“우리 오늘 즐겁게 플레이합시다.”

대개의 외국 선수들이 그런 말을 쓴다.

이런 메이저급 대회에서도 실제 경기를 즐기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필상과는 좀 다른 접근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일단 잘 받아넘겼다.

“오늘 살살 좀 다뤄 주십시오.”

“이번 대회 드라이브 비거리가 나보다 더 길던데, 엄살은 사양합니다. 하하하.”

그런 말을 던지고 먼저 티 그라운드에 올라간 더스틴은 이미 작정한 듯, 폭발적인 티샷을 날렸다.

440야드 파4 홀, 우측으로 호수와 벙커가 위협을 더하지만 그건 애초에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 뒤로 이어진 페어웨이를 바로 노렸다.

살짝 짧아 러프에 떨어졌지만 퉁 튀더니 페어웨이에 안착했다. 최종 비거리는 341야드, 남은 세컨샷 거리는 86야드에 불과했다.

“으이 씨! 아예 작정했네요. 장타 대결을 벌이자고.”

“22도 유틸 줘.”

“맞대결을 피하려고요?”

“장타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는 걸 보여 주려고.”

첫날 더스틴과 같은 방향으로 348야드를 날렸던 필상이라서 오늘처럼 컨디션이 좋은 날은 더스틴보다 더 멀리, 더 정확히 보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5번 유틸리티를 잡은 필상은 정말 부드러운 티샷을 날렸다. 앞선 더스틴의 강력한 티샷과 비교하면 어른과 아이의 차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부드러운 스윙의 끝은 아주 훌륭했다.

-262야드. 평소 비거리보다는 조금 더 나왔네요.

-음성에 왜 힘이 없습니까? 혹시 공 프로가 드라이브를 잡지 않아 실망한 건가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장타 능력이 확인됐는데, 그냥 확 눌러 버리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네요.

-실망은 1번 홀 결과를 보고 나서 해도 늦지 않습니다. 제가 추측컨대 장타 대결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더 먼 거리가 남은 선수가 확 홀컵에 붙여 버리는 걸 말씀하기나 본데, 그건 그거고 티샷은 티샷이죠.

임 캐스터는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남자의 자존심은 티샷 비거리라는 아마추어다운 사고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180야드를 6번 아이언으로 1m 안팎에 쩍 붙여 버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안색이 바뀌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역시 더스틴이었다.

그는 필상의 한 치도 휘지 않는 아이언 샷을 본 뒤, 86야드 웨지 샷에 최선을 다했지만 3.2m를 남기고 말았다.

그나마 라이가 심하지 않았지만 홀컵에 들어가기에는 한참 부족한 퍼팅으로 파를 기록한 것에 만족했다.

물론 필상은 침착하게 버디를 잡아내며 기선을 제압했다.

“아이언 샷이 정말 날카롭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바람이 도와준 것 같아요.”

“하하. 그런 겸손도 사양합니다. 미스터 퍼펙트.”

훤칠한 키에 덥수룩한 구레나룻을 기른 그의 외모는 터프하게 느껴진다. 실제 말투나 행동도 거침이 없다.

하지만 그건 대회에서나 보여 주는 외양적인 이미지일 뿐, 평상시 그는 상당히 부드러운 성격이라고 들었다. 가족적이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필상이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동양적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약을 올린다고 생각하면 본인에게 마이너스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게 좀 아쉬웠다.

“드라이브!”

“한 방 날릴 거죠?”

“어떻게 알았어?”

“당근과 채찍. 기가 막힌 표현 아닌가요?”

“아주 적절치 않은 표현이지. 너한테 그런 걸 기대하는 것부터 잘못이지만. 여하튼 난 그냥 저 친구의 머리가 좀 복잡하게 만들어 보려고.”

그의 잘못은 없다. 하지만 그와 함께 경기하면 한 수 접어줘야 한다던 전문가들의 분석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경기 운영은 단지 홀을 공략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지만 필상에게는 오늘 서울로 가는 다양한 교통수단이 완비되어 있었다.

특히나 감각이 좋은 날, 아이언의 정확성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무기였다. 게다가 티샷을 멀리 보내는 것의 위험성을 감수하려면 최소한 2온이 가능한 파5 홀이어야 의미가 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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