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낯 뜨거운 행위
누군가의 어쭙잖은 장난으로 선수가 영향을 받았다.
골프를 좋아해 이곳을 찾을 정도의 정성이 있다면 적어도 선수들이 멋진 플레이를 펼칠 수 있도록 예의는 지켜야 한다. 친구들끼리 라운드를 할 때도 샷 루틴에서 떠들면 의가 상하지 않던가.
하지만 어떤 이들은 크게 웃으며 이 상황을 재미있어 했고 누군가는 소리를 지른 자를 찾으려고 웅성거렸다. 존중받는다는 느낌보다는 좋은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대회의 주인공이 선수가 아니라 관중이라는 건가?’
최근 그런 개념이 자리를 잡는다는 말은 들었다. 어찌 되었든 프로는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니까 일면 이해된다.
그래서 관중들의 행동을 굳이 제지하지 않는 대회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오늘 겪어 보니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샷이 안 되는 이유를 수만 가지 만들 수 있는 게 골프다.
하다못해 어제 먹은 음식까지 탓을 하는데, 샷을 하는 순간 집중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을 묵인한다면 골프는 공평하지 못한 스포츠로 전락할 것이다.
“형. 신경 쓰지 마세요.”
“응. 알았어.”
소리가 난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애써 갤러리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탓한들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드레스를 풀었기 때문에 갤러리들도 조심할 것이라고 판단한 필상은 다시 루틴을 밟아 나갔고 평소보다 다소 빠르게 스윙을 가져갔다.
그런데 원하는 대로 스윙을 했건만 느낌이 아주 께름칙했다. 갤러리들에게 신경 쓰느라 수시로 바뀌는 바람의 방향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피니시를 끝내지 않았는데도 갤러리들의 요란한 반응이 쏟아졌다. 얼른 자세를 풀고 봤더니 타구는 바람을 타고 우측으로 하염없이 밀렸다.
“이런!”
만약 좌측 핀이었다면 그나마 그린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깃대가 우측 앞부분에 꽂혀 그나마 안전하게 살짝 왼쪽을 봤다. 그런데도 타구는 아예 그린에 맞지도 않은 채 호수에 퐁당 빠지고 말았다.
샷의 정확성은 필상의 자랑이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샷을 한 적은 없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고 또다시 샷을 하는 순간 심하게 떠들었던 자들에게 시선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눈이 마주치자 뜨끔했는지 얼른 고개를 돌리는 서너 명의 백인 노인들을 보노라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터졌다.
“대체 당신들은 뭘 보러 온 겁니까?”
“형. 그만하세요.”
“그래.”
아무 표정도 담지 않은 필상의 표정은 마주 보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런데 눈에 힘을 주고 쳐다보자 곁에 있던 성호가 얼른 말렸다.
자신을 향한 것도 아닌데 왠지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반자들이 샷을 하는 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필상의 3번째 샷은 무척 신중했다. 에미밍을 할 때와 임팩트를 가할 때의 바람이 동일한지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안정적인 공략을 했다.
아무리 바람을 타도 괜찮을 거리와 방향을 결정한 결과 타구는 홀컵과는 상당히 떨어진 그린 중앙부에 올랐다.
-전 그동안 공 프로의 경기를 수차례 중계하면서 해저드에 빠지는 건 처음 보네요.
-페어웨이 적중률이 92%, 그린 적중률이 86%입니다. 게다가 공식 경기에서 OB는 단 한 번도 없었고 해저드에 빠진 적은 딱 3번 있습니다.
-혹시 기권했던 JGTO 대회 때 아닌가요?
-그때 한 번, 그리고 워터 해저드가 아닌 위험지역 경계선을 넘어간 적이 2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샷은 확실히 의외입니다.
-갤러리들의 방해가 신경 쓰인 것 아닐까요?
-물론 좋지 않은 행동이지만 프로는 그걸 방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고 최선의 샷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결과는 오로지 자신의 몫입니다.
-하지만 화면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비매너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 공 프로가 저런 터무니없는 샷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시청자들도 그 말에 공감했다.
사실에 가까웠으나 허 해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아마추어라면 예의 없는 행동을 탓할 수 있지만 프로는 다르다.
물론 입장료에 매너 없는 행동까지 포함된 것은 아니나 그런 제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플레이를 하는 것이 맞다.
그러고 보면 일본과 한국은 관중들의 매너가 좋은 편이다. 일단 입장객 수가 적기도 하지만 대부분 선수들을 존중하는 동양적인 문화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사실 PGA도 보통의 경우, 팬들의 소란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더 플레이어스는 지나칠 만큼 많은 관중을 유치하고 그들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지하지 않는 것뿐.
“비싸게 배우네.”
소란에 귀를 닫고 온전히 스윙에 집중하지 못한 걸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 좋은 경험을 통해 배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샷의 결과는 외부적인 요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퍼팅을 위해 라이를 살피려던 필상은 평소와 달리 균형 감각이 실종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미 그린의 경사를 파악하고 있었기 망정이지, 분명히 내리막 슬라이스 라이인데 그게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앞뒤 좌우를 확인한 필상은 안전하게 밀었다. 이미 보기를 기록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과욕을 부리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 부드럽던 스트로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어? 너무 강한 거 아닌가요?
-바로 홀컵을 노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봐도 너무…….
허 해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내리막을 탄 공이 이미 홀컵을 지나 호수를 향해 굴러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냥 멈추라는 생각만 할뿐,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공은 프린지를 살짝 지나 러프의 경계에 멈췄다.
좋지 못한 컨디션에도 기껏 6타나 줄였는데 갑자기 앞이 깜깜해지는 느낌이었다. 지금껏 프로로 대회에 나서 이렇게 넋을 놓기는 처음이었다.
“형.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내가 너무 자만했어.”
질문과 대답은 약간 엇박자가 났다.
성호는 일본에서처럼 갑자기 쓰러지는 게 아닌지 염려한 것인데, 필상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풀지 않고 연습마저도 소홀히 한 지난 며칠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다질 게재가 아니었다.
공이 선 위치를 보니 러프에 걸려 퍼팅하기가 어려웠다. 굳이 하자면 풀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야 한다는 것인데, 아무리 오르막이라도 부담스러웠다.
“피칭 가져와.”
“네.”
고육지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집어넣어야 더블 보기인데, 그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괜히 범 앤 런을 구사하려다 다시 핀을 오버할 것 같았던 것이다.
평상시 자신감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고 지금이라도 안전하게 치는 것이 중요했다. 사람이 한 번 무너지면 얼마나 가벼운 존재가 되는지 실감이 났다.
그마저도 자신이 없기에.
거리가 5야드밖에 되지 않지만 몇 번이나 연습을 하는 필상을 향해 수많은 말들이 터졌다. 그게 다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들린다는 점도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이렇게 쉽게 무너지나?’
너무도 익숙하지 않아 짜증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더는 실수하지 않고 핀에 붙인 필상은 결국 트리플 보기를 기록하고 지겨운 17번 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한 홀 남았지만 동반자들이 티샷을 하는 동안 필상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의 상태를 체크해 봤다.
그런데 생각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호흡이 가쁘거나 두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전신의 감각이 평범한 사람보다 더 무뎌진 게 문제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연습을 많이 한다고 샷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연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샷 감각인데, 단기간에 형성될 수 없기 때문에 골프를 배우고 익힐 때가 중요하다.
“형 차례에요.”
“그래.”
티 그라운드에 오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지금 상태라면 그 정확하다는 드라이브 티샷도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를 지키기 위해 최대한 안전하게 때렸다.
비거리는 286야드, 살짝 당겨졌지만 다행히 페어웨이를 지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던가.
세컨샷 거리는 187야드, 필상은 6번 아이언을 잡았다.
핀이 좌측 호수와 가까워 아예 그린 중앙을 보고 가볍게 컨트롤 샷을 했다. 짧아도 숏 게임이 그나마 낫다고 봤는데 그나마 꾸역꾸역 그린에 올라탔다.
11야드, 쓰리 퍼팅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 노력이 허사가 되지 않아 결국 필상은 -8로 예선을 공동 12위로 끝마쳤다.
[마의 17번 홀, 미스터 퍼펙트 트리플 보기!]
어려웠던 라운드를 총평하는 헤드라인이 그거였다.
공을 2개나 빠뜨려 필상보다 더 많은 스코어를 적어 낸 선수도 있는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커졌다.
하지만 필상은 경기를 마친 뒤, 곧바로 숙소로 돌아왔다.
-3는 딱히 나쁜 스코어도 아니다.
바람과 코스에 잘 적응한 선수들이 다소 기형적인 성적을 적어 내 선두권을 장악한 걸 보면 처녀 출전인 필상의 예선 성적은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유명세에 대한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혹독했다.
‘오빠. 저 건너갈까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모모코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첫 마디부터 가득 담긴 걱정이 느껴져 괜히 부끄러웠다. 그녀와 자신은 이런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야. 괜찮아.”
‘오빠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
“응. 하지만 곧 해결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괜한 말 꺼내서 엄마 걱정하시지 않게 해.”
‘알았어요. 그러니까 힘내요.’
“그래. 고마워.”
성호는 물론 이 대표도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필상이 그걸 원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색한 침묵이 끝나고 숙소에 도착한 필상은 테라스 창문을 모두 개방하고 침대 위에 정좌하고 앉았다.
토납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오늘 경기부터 복기할 필요를 느꼈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문제는 무뎌진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연습을 소홀히 한 것도 요인이지만 토납을 통해 최고의 컨디션이 유지되면 굳이 많은 시간을 들여 연습할 필요는 없다.
결국 감각이 돌연 허물어진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경기 중에 자꾸 그녀의 존재를 의식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왜 토납을 지속하지 못했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시시때때로 치솟는 욕정 때문이었다.
“하필 이 대표야!”
물론 다른 여자에게 끌려도 문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대표는 지금 자신과 24시간을 동행하기 때문에 아무 근거도 없이 회피할 수 없다는 게 곤란한 지점이다.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설사 이 대표를 상대로 욕망을 채운다고 한들 과연 자신에게 벌어지고 현상이 해결될까?
만약 그 이후에 또 다른 여인에게 그런 증상이 발생하면 그땐 또 어쩔 것인가?
그 모든 것을 떠나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을 품을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신을 버리고 좋은 신랑감을 찾아간 성희와 다를 게 하나 없는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 극복하자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마음부터 다잡았다.
토납을 통해 꾸준한 성장을 이뤘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부딪친 이런 거대한 벽을 만난 적은 없다.
토납을 하다 말고 갑자기 일어난 욕념에 스스로 함몰이라도 될 것 같아 감히 맞서지 못했지만 길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싸워서 돌파하는 것.
스스로 자위하길, 당장 중요한 대회에 참가하고 있어 그게 답이라는 것을 알지만 미뤘다. 이 대표의 호의가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그러나 다 부질 없는 미련이고 허망한 바람일 뿐임을 인정하는 데 너무 긴 시간을 지체한 것이다. 결심이 서자 필상은 곧바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으음……. 좋아요! 너무 행복해요!’
‘…….’
얼마나 오랜 시간을 욕정과 싸웠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애써 거부했지만 그럴수록 더 강해지는 붉은 기운이 자신을 온통 불태워 버릴 것 같아 방향을 선회했다.
아예 마음이 향하는 방향 그대로 편안하게 놔뒀다. 그랬더니 욕망을 담은 상상의 나래는 끝을 모르고 날아올랐다.
설마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낯 뜨거운 행위를 생생하게 재현해 낼 줄은 미처 몰랐다. 길고 긴 터널을 지나 결국 화산이 폭발했고 필상은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참 기이한 것은 토납을 하던 필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뿌옇게 날이 밝아 오는 아침이었고 일어나 보니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옷을 벗은 기억은 없는데?”
보통 토납의 끝은 자신이 결정했다.
하지만 지난밤에는 얼마나 깊이 빠져들었는지 마치 필름이 끊긴 것처럼 아직도 생생한 야한 꿈 외에는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몸이 정말 개운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헛일을 한 것은 아닌지 염려되어 잠시 테라스에 나가 새벽 공기를 마시며 토납을 진행했다.
그런데 그 아찔했던 증상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토납을 마치고 확인한 몸의 중심도 딱히 건장하게 치솟지는 않았다.
결국 이겨 낸 것이다.
“형님. 일어나셨습니까?”
“어. 그래. 들어와.”
“안색이 너무 좋은데요?”
“그래. 어제처럼 해맬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 붙들어 매.”
“이야!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 놈이 어제 오후에는 그렇게 인상을 박박 긁고 있었냐?”
“하하하. 저라도 걱정을 해야죠.”
“이 대표님은 일어나셨어?”
“아! 오늘은 우리 먼저 나가래요. 몸이 좀 불편한지 문자가 왔던데요?”
“그래? 뭔가 다른 용무가 있을 수도 있지. 그럼 샤워하고 나갈 테니까 로비에서 봐.”
“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