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운칠기삼
카앙!
471야드 파4, 5번 홀은 정확한 공략이 요구된다.
일단 티 박스 앞에서 우측으로 이어진 호수를 건너야 하고 좁은 페어웨이 양옆으로 폭이 넓은 벙커가 자리 잡고 있다.
때문에 티 그라운드에 올라서면 굉장히 부담스럽다.
그런데 그 좁은 페어웨이도 320야드를 넘기면 정면에 작은 호수가 위협적이고 우측으로 휘어져 벙커 뒤로 이어진다.
물론 안전하게 잘라 가면 그만이지만 그 방향에서는 그린 공략이 어렵고 남은 거리도 만만치 않아 버디를 노리는 선수가 없다.
하지만 필상은 샷은 아예 우측 벙커를 향해 날았다.
-어? 벙커를 완전히 넘기려면 캐리가 320야드는 나와야 하는데 괜찮은가요?
-……괜찮을 겁니다.
허 해설도 쉽게 장담하지 못한 이유는 어제 오늘 그 방향으로 공략해 좋은 결과를 낸 선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타자가 마음먹고 때리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벙커에 잡히거나 러프에 빠졌다. 보이지 않는 맞바람이 작용한 듯.
게다가 벙커를 넘겨도 페어웨이가 병목처럼 좁아져 위험을 감수한 만큼의 소득을 얻기 힘들었다. 하지만 필상의 티샷이 어떤 결과를 냈는지는 갤러리들의 함성으로 알 수 있었다.
캐리는 322야드로 러프까지 살짝 넘긴 타구가 좁아지는 페어웨이의 정중앙으로 굴러서 375야드 지점에 멈췄다.
-거리면 거리! 방향성이면 방향성! 우리 공 프로는 대체 뭐가 부족한 겁니까?
-하하하. 이제 100야드 가량 남았으니까 첫 버디를 기대해 봐도 되겠네요. 이 어려운 홀에서 말입니다.
-어제는 단 2개, 오늘도 하나밖에 없었는데 우리 공 프로가 해내는 건가요?
-버디를 하지 못한다면 티샷이 너무 아깝지요. 하하하.
첫날 선두와 3타 차로 톱 10에 진입하지 못해 애가 말랐는데 오늘 초반에 샷이 흔들리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해낼 것이라고 믿지만 어느 누구 한 명 녹록한 선수들이 없다. 골프에 관한한 초인의 경지에 오른 이들과 경쟁하기 때문에 하루만 페이스를 잃어도 우승과는 멀어진다.
하지만 지난 홀부터 날카로운 샷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파격적인 티샷으로 모두를 경악케 한 것이다.
“십 년 감수했습니다.”
“하하. 내 스윙이 그렇게도 불안해 보였어?”
“네. 샷도 샷이지만 뭔가 나사가 하나 풀린 사람처럼 보였어요.”
“하하하. 나사가 풀린 것 같았다고?”
웃어넘겼지만 필상은 자신의 고민이 내면에서 끝난 게 아니고 밖으로 표출되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모모코도, 성호도 알아봤고 심지어 미켈슨도 언급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어제 5언더를 친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했다.
감당하기 버거운 기이한 현상이 혼란스럽지만 일단 모든 잡념을 버리고 경기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은 누가 뭐래도 샷의 일관성이 남다르다는 점인데, 경기 초반 몇 번의 실수를 거듭하며 이게 모두 산만해서 남다른 감각이 작용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99야드 세컨샷은 기가 막히게 붙였다. 마치 홀컵에 쑥 빨려 들어갈 것 같아 갤러리들이 비명까지 질렀다.
-우후! 너무 아깝네요.
-그린이 전체적으로 좌측으로 흐릅니다. 그런데도 좌측 내리막에 핀을 꽂아 놨으니 아무리 스핀을 먹여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저만큼 붙인 것도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나저나 이번 대회는 거의 세계 랭커들이 상위권을 휩쓰는 것 같아요?
-이 대회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재작년에 김시우 프로가 우승한 것은 그래서 더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제 우리 공 프로와 똑같이 -5를 쳤던 타이거 우즈가 현재 전반을 끝냈는데 공동 선두로 올라섰다고 합니다.
-아직 출발하지 않은 선수들도 있으니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우즈가 선방하면 주최 측도 아주 신이 낫겠네요.
-그렇습니다. 지난번에 공 프로에게 완패한 로리가 컷 탈락 위기에 처한 것을 빼면 관록의 선수들이 선전하고 있어 우리 공 프로의 우승은 한층 더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웬만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을 언급하지 않는다.
행여 부정 탈까 저어하기 때문인데, 그걸 모를 리 없는 허 해설이 마치 연막이라도 치듯이 전체 분위기를 설명했다.
반드시 우승만이 성공은 아니라는 말도 꺼냈다.
그러나 5번 홀에서 오늘 첫 버디를 기록한 필상은 또다시 어렵다고 알려진 451야드 파4인 7번 홀에서 강력한 티샷을 날렸다.
332야드 지점에 벙커가 있어 아까 같은 비거리라면 영락없이 벙커에 빠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샷은 드로우였다. 절묘하게 휜 타구가 레이더라도 달린 듯 벙커를 피해 페어웨이를 찾아가자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한술 더 떠 374야드를 기록했고 또 다시 위협적인 웨지 샷으로 홀컵을 바로 공략해 타수를 줄였다.
“5번 아이언.”
“237야드인데요?”
“뒷바람이야.”
2번의 멋진 공략이 있었지만 그래 봐야 2타를 줄였을 뿐이다. 때문에 파3에서 공격적인 샷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5번 아이언을 잡고도 타구는 그린을 지나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예측한 것보다 훨씬 강했던 바람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공의 위치는 나쁘지 않아 그린의 라이까지 살핀 필상은 과감하게 핀을 노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강하게 맞은 것 같았는데,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렸다.
타구가 깃대를 맞고 바로 홀컵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와우! 멋진 버디! 처음부터 버디를 노린 것 같죠?
-하하하. 만약 깃대를 맞지 않았다면 최소한 5야드 이상 굴렀을 겁니다. 물론 준비 자세를 보면 홀컵을 바로 노린 것 같기는 하지만 아주 운이 좋았습니다.
-스포츠가 원래 운칠기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글쎄요……. 다른 운동은 어떨지 몰라도 골프는 행운만으로 우승할 수 없습니다. 나흘 내내 운이 작용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처럼 미스 샷이 떨어지면 유리하지 않을까요?
-물론 그 점은 인정합니다. 팽팽한 우승 경쟁 중이라면 럭키 샷은 상대의 심리 상태를 흔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공 프로가 운이 좋아 우승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보다 당당한 실력으로 우승하는 모습을 바란 것이다.
그러나 어제와 달리 오후에 경기를 시작한 필상은 9번 홀부터 갑자기 강해진 바람에 혼란을 겪었다.
지금까지 바람이 강한 경기에서 낮은 탄도의 샷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TPC 소그래스는 또 달랐다.
바람의 방향도 종잡기 힘들었고 낮은 펀치 샷도 고무줄처럼 비거리가 들쑥날쑥 하자 당황한 것이다.
그 와중에도 12번 홀에서 환상적인 샷이 터졌다.
332야드 파4 홀인데, 3번 우드를 잡은 필상은 그다지 세게 때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치솟은 타구는 훨훨 날아 위협적인 벙커를 넘었고 밀어 치기를 한 당구공처럼 쭉쭉 뻗어 나가더니 그린에 올라 버린 것이다.
-7.5야드, 넣을 수 있을까요?
-우측으로 도는 라인인데, 평상시 공 프로의 퍼팅 실력이라면 충분히 이글도 노려 볼 수 있을 겁니다.
-아! 하필 우리 공 프로가 한창 경기 중인데, 바람이 갑자기 강해질 게 뭡니까!
-첫 홀부터 강풍 속에서 플레이하는 선수도 있습니다. 어제도 바람이 옅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전과 오후의 차이가 없었는데, 오늘은 일찍 출발한 선수들이 유리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조 편성도 결국 운이 작용한다는 거 아닙니까!
-자! 드디어 공 프로가 퍼팅 루틴에 들어갔습니다.
골프는 운칠기삼이 아니라고 항변했는데 하필이면 그 말을 정면으로 부정할 만한 상황이 이어지자 허 해설은 난감했다.
자신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음에도 골프가 마치 행운이 좌우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이 안타까워 얼른 화제를 바꿨다.
여러 선수가 비교적 짧은 12번 홀에서 온 그린을 시도했지만 성공한 선수는 많지 않다. 또한 샷 이글을 제외하면 한 홀에서 2타를 줄인 기회도 많지 않아 시청자들은 물론 갤러리들도 숨을 죽일 타이밍이다.
보통 대회에서는 선수가 샷 루틴에 들어가면 진행 요원들이 조용히 해 달라는 팻말을 들고 웬만해서는 떠들지 않는다.
하지만 TPC 소그래스는 그렇지가 않았다.
처음부터 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레이아웃을 고려해 홀마다 갤러리들을 위한 응원 펜스가 곳곳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물론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기본적인 매너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선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이들의 입이 열려 있어 굉장히 어수선했다.
특히나 이런 경험이 전무한 필상으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귀를 닫은 필상은 과감한 퍼팅 스트로크를 했다.
“인 더 홀!”
-좋아요!
-이글! 이글입니다! 하하하.
이 정도 거리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깃대를 뽑지 않는다. 하지만 필상은 왜 깃대를 빼는지 확연하게 느낄 수 있도록 홀컵 뒷벽을 강하게 때리며 이글을 만들어 냈다.
상대적으로 쉬운 홀에서 타수를 줄이지 못한 필상이 이대로 쳐지는가 싶었기에 더욱 환희에 찬 음성이 터졌다.
누구보다 지키는 플레이에는 능하기 때문에 이번 이글은 더 값어치가 높게 느껴졌다. 우즈와 리키 파울러, 키건 브래들리가 -11까지 올라선 상황이라서 우승 가시권에 가려면 적어도 2타는 더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꼭 필요한 순간에 멋들어진 퍼팅을 성공하면서 필상은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하필이면 핸디캡 3위인 481야드 파4, 14번 홀에서 다시 포텐이 폭발했다.
-어, 어, 어, 어!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러프 경계선까지 354야드이고 맞바람이 아주 강한 홀입니다.
-서! 서! 저거 보세요!
허 해설은 할 말이 없었다.
필상이 다시는 비거리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을 만큼 오늘 강력한 드라이브 티샷을 선보인 것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설마 맞바람까지 있는데 페어웨이를 오버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2m 폭의 러프가 있는데 그것도 넘어갔다.
공식 기록은 362야드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질긴 러프에 서느니 차라리 벙커 샷이 더 깔끔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허 위원님 오늘 좀 이상합니다. 뭐가 자꾸 엇나가는 것 같아요.
-하하하. 새벽 5시라서 그런가 봅니다.
한 번 꼬이니까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나마 노련하게 웃으며 넘겼지만 자신이 뱉은 말대로 필상이 벙커에서의 샷을 멋지게 해내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필상도 신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날씨에서 타수를 줄이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었고 벙커지만 오히려 펀치 샷을 시도하기에는 별반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공을 오른쪽에 놓고 피칭 웨지의 클럽페이스를 조금 닫았다. 그리고는 아주 부드럽게 인 아웃 스윙을 했다.
출발은 그린 우측이었지만 낮은 탄도에도 불구하고 절묘하게 휜 타구가 러프를 때릴 때만 해도 너무 길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러프에서 기형적으로 높이 튄 공은 마치 칩샷을 한 것처럼 그린에 떨어지더니 슬슬 굴러 핀을 향해 굴렀다.
“이야! 저게 안 들어가네요!”
“너무 강했던 걸 알면서 왜 그래?”
“어? 의도한 샷 아니었어요?”
“의도는 개뿔!”
필상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성적은 나쁘지 않지만 솔직히 오늘 샷 감각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반에 미스 샷이 많았던 것도 그렇고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했지만 의외의 실수도 있었다.
리커버리를 잘한 것도 있고 그중에 몇 개는 행운이 따랐다. 하지만 그걸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도 남은 홀이 4개나 남았기 때문에 악착같이 집중해 버디를 잡아냈다. 그리고 파5, 16번 홀에서 한 타를 더 줄여 급기야 -11까지 올라섰다.
공동 3위, 샷 컨디션은 엉망이었지만 오히려 순위는 올라간 것이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6야드?”
“맞바람이 있어요.”
“갭 웨지.”
오거스타에 악명 높은 12번 홀이 있다면 TPC에는 17번 홀이 있다. 길지도 않지만 수없이 많은 선수들이 이 아일랜드 홀에서 그린을 지키지 못했다.
2007년에는 무려 93개의 공이 호수에 빠졌고 블레어는 이 홀에서 하루 3개의 공을 빠뜨려 9타 만에 벗어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그린이 솥뚜껑처럼 중앙이 높고 가장자리가 낮아 탄도를 띄우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이 홀 주변은 회오리치는 변화무쌍한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습 라운드를 진행할 때, 필상은 아주 정확한 티샷을 선보였다. 버디를 하나 잡았고 다른 하나도 아쉽게 홀컵을 돌아 나올 정도로 가깝게 붙였다.
“인 더 홀!”
‘이런!’
샷을 하고 난 뒤에 나와야 할 응원이 어드레스하는 순간에 터졌다. 아무리 포커페이스인 필상이라도 스윙 루틴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이 홀의 진정한 위협은 물이나 바람이 아니라 티샷 장면을 구경하고 있는 수천 명에 이르는 갤러리들이라는 것을.
이미 지나온 16번 홀을 제외한 3면에 관중들을 위한 스탠드가 마련되어 있다. 그것도 2층 구조인데 꽉 들어찼다.
게다가 스탠드 앞의 넓은 잔디 위에 겹겹이 쌓인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모두 17번 홀 티 박스로 향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떠들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