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엉뚱한 부작용
갑작스러웠던 인터뷰는 사실 공방의 자리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몰아세울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필상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필상은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PGA를 존중하는 가운데 세계에 퍼져 있는 몇 안 되는 골프 투어의 가치에 대해 언급했다. 유러피언투어는 그나마 낫지만 아시아 시장이 정상적으로 성장해야만 골프 저변이 넓어지고 그게 모두 PGA의 자산이 됨을 강조했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당장의 이익에 집착해 작은 투어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결국 제 발등을 찍을 것이라는 지적은 적잖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아주 좋았어요.”
“비뚤어지고 편협한 이들의 눈에는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팬들에게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게 분명해요. 이렇게 당당했던 선수는 없었으니까요.”
“덕분에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아요. 입만 살았다는 말은 들을 수 없잖아요.”
“전 그건 걱정 안 해요.”
결국 실력으로 보여 줘야 하는 부담은 더 커졌지만 이 대표가 확신하듯 필상은 최근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일관성은 여전했으며 비거리에 자신이 생기자 훨씬 골프가 쉽게 다가왔다. 다양한 공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단 오늘은 숙소로 돌아가 여독을 풀죠.”
선수 등록을 마친 필상은 연습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장거리 비행으로 지친 심신을 평온케 하는 것이 우선이라서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토납법을 운용했다.
이젠 제법 익숙해져 한두 시간만 집중해도 개운할뿐더러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 최상의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잠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노을이 지는 해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미녀, 이보영 대표가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바다로 걸어가는 자태가 너무도 선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를 무색케 하는 육감적인 몸매를 감싼 투피스 비키니, 그녀의 터질 듯 멋진 볼륨을 다 가리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나도 오랜만에 수영이나 할까?”
가부좌를 풀고 일어서던 필상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몸의 중심이 벌떡 일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대표가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지만 일로 얽힌 관계라서 여자로 인식하지 않았건만 강한 욕념이 치솟은 것이다.
그녀가 섹시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결국 필상은 해변에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플로리다 해변에 간다고 모모코가 수영복도 챙겨 줬지만 그 작은 삼각 천 조각으로는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자신의 욕망을 다 가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토납이나 하자.”
집중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잘되지 않았다.
음란마귀라도 침범한 듯 온갖 야한 상상들이 정신을 온통 휘저어 또 다른 부작용이 아닌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필상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이 대표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필상 씨!”
“아, 네.”
“해지기 전에 같이 수영이나 해요.”
“네.”
마음은 거부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지만 필상은 끌리듯 해변으로 향했다. 비싸고 예쁜 삼각 수영복을 대신해 사각 반바지를 입은 것은 속마음을 감추기 위한 엉큼한 노력이었다.
“제가 수영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무릎도 안 차거든요! 스노클링은 수영이랄 것도 없어요. 얼른 나가요.”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르나 작정이라도 한 것인지 이보영의 자태는 물론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야했다.
여하튼 함께 놀다 보면 엉뚱한 상상은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 그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물기에 젖은 그녀의 몸이 스치기라도 할 때면 움찔 움찔거리는 게 재미있다며 더 장난을 치는 이 대표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용케 자제력을 잃지 않고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논 것 같아 기분도 좋았다.
“내일 연습 라운드에 저도 같이 나가도 되죠?”
“물론이죠.”
“우리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요. 난 필상 씨가 제게 아주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어떤 사람으로 느껴졌는데요?”
“으음……. 그건 비밀!”
왠지 그 말을 자신이 좋을 대로 해석하고 싶었다.
굳이 말하지 않지만 남자로 느껴졌다는 말이라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얻어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른 마음을 품는지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기분은 아주 좋았다.
어차피 호감을 가졌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그게 환상적인 호흡으로 잘 이어져 서로에게 최선을 다한다면 그 또한 옅지 않은 인연이라 생각했다.
* * *
필상이 플로리다에 도착한 날은 월요일이다.
강력한 우승 후보들은 대부분 이 코스에서의 경험이 많다. 매년 같은 코스에서 펼쳐지는데도 매번 성적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인지 일찌감치 이곳에 와서 코스 적응을 시작했다.
그들에 비하면 이틀밖에 여유가 없었던 필상은 시작부터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할 입장이다. 두 번의 연습 라운드를 돌았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게 성호와 이 대표의 판단이었다.
세계 최고의 대회를 지향하는 더 플레이어스가 펼쳐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매우 난해한 코스였다.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여지없이 무너질 수 있는데, 갤러리들과의 거리도 가까웠다.
“연습 너무 소홀히 한 것 아닙니까?”
“왜?”
“연습 라운드를 제외하면 별다른 연습을 하지 않았잖아요.”
“내가 그랬나?”
아예 연습장은 가지도 않았다. 라운드를 마친 뒤 토납에 적절한 시간을 쓴 필상은 해변에 놓인 비치 베드에 누워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얼핏 봐서는 휴가라도 온 사람처럼 너무 느긋한 모습이 성호의 불안감을 자극한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담담했다.
샷 감각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성호와 이 대표가 열심히 야디지 북을 만들었지만 홀의 모양이나 거리는 그냥 느껴졌다.
다만 한 가지 고민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왜 그녀지?’
해변에는 쭉쭉 빵빵 미녀들이 많다.
토납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나면 여지없이 음란마귀가 찾아오는데 상큼한 미녀들에게는 아무런 반응이 없건만 이보영만 보면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아예 토납은 포기하고 평온하게 자연에 몸을 맡기려고 해변을 바라보고 누운 것이다. 그걸 모르는 이 대표는 곁에 다가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사실 수다라고는 할 수 없는 중요한 사안들이지만 그게 수다라고 느껴진 것은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모든 사고를 정지시키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무딘 다른 남자는 절대 맡을 수 없는 그녀의 독특한 체향은 대형 사고의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형. 가야죠.”
“그래.”
드디어 1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필상은 무리하지 않고 차분하게 경기를 풀어 나갔고 기회다 싶으면 과감한 공략도 선보였다.
하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조심스럽다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안전한 플레이를 했는데, 그래도 버디 5개를 잡고 보기는 하나도 없는 무결점 경기를 펼쳤다.
순위는 공동 11위, 나무랄 데 없는 성적이지만 평가는 엇갈렸다. 팬들은 아쉬워했고 일부 전문가들은 아직 리그를 호령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도 내렸다.
하지만 함께 경기한 동반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 어떤 선수보다 정교한 것 같다’
‘그는 경기 내내 여유가 넘쳤고 마치 연습 라운드를 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경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우승 1순위라고 말했는데, 그 말에 동의한 전문가들도 여럿 있었다. 근거는 필상의 경기 내용이었다.
이날 날씨가 썩 좋았던 것은 아니었기에 보기 없는 경기를 펼친 선수는 128명 중에 단 4명뿐이었다.
신들린 샷으로 오늘 -8를 기록한 단독 선두, 더스틴 존슨도 보기를 기록했지만 필상은 오히려 어려운 홀에서 버디를 잡는 다소 기이한 성적표를 그렸다.
‘오빠! 경기 중에 왜 딴 생각해?’
경기를 마치자마자 모모코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런데 그녀의 첫마디가 바로 그거였다.
화면으로 봐도 느껴질 만큼 산만했나 돌아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다만 생각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제 풀스윙이 가능해질 만큼 토납으로 인한 효과의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아직 확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음란마귀와 관련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더 이상의 진전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다고 누구와 상의할 내용도 아니라서 머리가 복잡했다. 더욱이 필상의 경기를 따라다니며 관전하는 이 대표가 어디에 있는지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느껴진다는 점이 무서웠다.
“오늘 두통이 좀 있었어.”
‘약을 먹지 그랬어요.’
“괜찮아질 거야. 넌 어때?”
‘흐으으……. 전 너무 잘 있죠. 오늘 어머니랑 언니들이랑 온천 갔다 왔어요.’
잘 지내는 것 같아 안심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누나들은 물론 엄마와는 쉽게 친해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러다 아들은 뒷전이고 며느리만 챙길 것 같다는 불안감마저 들 정도였다.
경기를 마친 필상은 곧바로 호텔로 복귀했다.
딱히 스윙의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아 붐비는 연습장에서 타인의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내일은 아침에 여유가 많아 미켈슨과 연습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저예요.”
“늦은 시간에 어떻게?”
“치! 야밤에 나 같은 미녀가 노크하면 설레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너무 설레서 그러죠.”
“호호호. 빈말이라도 고맙네요. 다른 게 아니라 이거 한 잔 어때요?”
“와인입니까?”
“네. 이거 한잔하면 잠도 잘 오거든요.”
“일단 들어오세요.”
밤에 여자가 와인을 들고 찾아오면 그건 어떤 의미일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필상은 애써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녀의 순수함을 곡해하지 말아야 했고 마주 보고 와인을 마시는 자신의 마음이 불타고 있음을 억눌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굿 나잇!”
“제가 방까지 모셔다 드리죠.”
“괜찮아요. 바로 앞인데. 그런데 우리 와인 한 병을 다 마시는데 30분도 안 걸린 거 알아요?”
“아! 그랬나요?”
“혹시 필상 씨는 제가 무서운가요?”
“아니요. 그건 또 무슨 말이세요?”
“그렇게 허겁지겁 마신 게 늦은 밤에 찾아온 내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 같아서요.”
“무섭긴 무섭죠. 너무 섹시해서요.”
말을 뱉은 순간, 아차 싶었다.
진심이지만 듣기에 따라 희롱이라고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이 대표는 한참 말없이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이 촉촉하다고 느껴진 것은 착각이었을까?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방문을 나선 그녀는 문을 직접 닫았다. 배웅할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 * *
“어제 경기 내용 다 확인했어.”
“제 경기요?”
“응. 뭔가 이상해서.”
“뭐가 이상해서요?”
“5언더. 뭔가 자네답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런데 보고 나니까 그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어.”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지?”
필 미켈슨은 다그치듯이 물었다. 마치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혼을 낼 것처럼 인상도 험악했다.
그래서 필상은 사실대로 말했다.
“제가 어제는 이상하게도 집중력이 떨어지더라고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있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경기에 임하면 최선을 다해야지. 그게 우리가 좋아하는 골프에 대한 예의잖아. 팬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
할 말이 없었다.
그 어떤 이유도 경기에 임한 프로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교만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첫 날 -5를 기준으로 하루에 한 타씩 더 줄여 -6, -7, -8로 최종 26언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원하면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곳에 도착해 자신을 공격하던 기자들의 콧대를 꺾어 주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건방진 태도로 드러난 것 같아 마음을 다잡았다.
“어허!”
후회는 아무리 빨아도 늦다고 했던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기에 임했지만 첫 홀부터 미스 샷이 나왔다. 티샷 결과가 깨끗하게 나와 남은 거리는 131야드에 불과했다.
그래서 피칭을 잡고 컨트롤 샷을 했는데 타구가 홀컵을 훌쩍 오버했던 것이다. 그린이 빠르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고 탄도도 의도한 만큼 나왔는데, 문제는 바람이었다.
집중하려던 의지가 오히려 여유를 외면했고 강한 힘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필상은 이제라도 늦지 않았음을 깨닫고 더욱 한 샷 한 샷에 집중했다.
-오늘 컨디션이 영 별로인 것 같죠?
-전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공 프로는 곧 자신의 미진한 부분을 교정해 낼 겁니다.
-너무 지나친 과신 아닌가요?
-하하하. 두고 보십시오.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것은 그 와중에도 타수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버틴다는 것이었다.
사람인 이상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담대하게 자신의 플레이를 펼치려면 본인에 대한 확신은 물론 실질적인 기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실제로 필상은 4번 홀부터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감각을 되찾자 홀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