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22화 (122/354)

122. 더 플레이어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이제 벼락 맞은 후유증이 다 사라진 거냐고?”

“누가 그래? 후유증이라고?”

“너. 그 전에는 풀스윙 가능했잖아. 그날 제주도에서 다친 뒤에 장애가 생긴 거고.”

안 프로는 필상의 반쪽 스윙이 아직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캐디를 봐 주면서 발생한 일이고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필상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반갑고 기쁘면서도 늘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었다.

“그날의 사고가 없었다면 난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거야. 누나.”

“아니야. 넌 벌써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었을 거라고.”

“하하하. 내 어깨가 돌아가지 않는 게 누나 책임이라고 생각한 거야? 진짜?”

“오늘 네 스윙을 보고 마음의 짐을 좀 덜었어.”

고통은 잠시, 그날의 일은 자신의 눈부신 성공에 가장 큰 밑바탕이 되었다. 남다른 재능과 노력이 더해졌다고 한들, 그날의 축복이 없었다면 필상은 아직 미래를 위한 더딘 걸음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안 프로가 그런 부담을 안고 지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괜히 미안했다.

“누나. 그날 이후 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아.”

“정말이야?”

“응. 샷 감각이 훨씬 좋아졌거든.”

“그럼 나도 벼락이나 맞아 볼까? 호호호.”

“평소 행실을 보건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크크크.”

“뭐야?”

“착하게 살잖아. 나처럼. 하하하. 여하튼 이젠 거리에 대한 부담도 전혀 없으니까 앞으로 그런 부담은 전혀, 전혀 가질 필요 없어. 알았지?”

“그래. 잘됐다. 정말.”

“밥이나 먹으러 가자. 우리 집으로.”

“집에?”

“응. 모모코가 요새 한국 음식을 배우고 있는데, 제법 먹을 만하거든. 하하하.”

모처럼 안 프로와 함께 식사를 나눴다.

싱글이고 여전히 미모가 출중한 안 프로를 전에는 은근히 견제하는 눈치였던 모모코도 그녀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결혼식에 찾아와 같이 일본어로 한참 수다를 떤 것이 마음의 벽을 허물었고 한국 생활에 대한 부담도 덜어 준 것 같았다.

앞으로 자주 만나 친하게 지내기로 한 것도 다행이다. 아무래도 같은 길을 가는 선배였기에 모모코에게는 안 프로가 큰 힘이 될 것 같아 필상도 아주 흐뭇했다.

그날 저녁 이 대표도 집으로 찾아와 함께 식탁을 나눴다. 그런데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중요한 소식을 물어 왔다.

3월 셋째 주에 열리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제5의 메이저 대회라고 칭해지는 그 대회는 우승 상금만 225만 달러로 현행 투어 대회 최고의 상금액을 자랑한다.

“플레이어스는 이미 출전 선수가 확정되어서 출전이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새 분위기가 바뀐 거죠. 어차피 시드가 없는 선수도 아니고 WGC 대회에만 다시 출전하는 게 신경이 쓰였나 봐요.”

그냥 연습에만 매달리기에는 3월이 너무 아까웠다.

필상이 출전 가능한 KPGA 대회는 5월 첫 주의 매경오픈, JGTO 대회는 4월 첫 주 미즈노 오픈 이후 다시 한 달의 공백이 있어 선택한 대회가 WGC 델 테크놀로지 매치플레이였다.

64명만 추려 매치 플레이로 진행되는 이 대회도 별들의 전쟁이라고 추대 받는 최고의 대회 중에 하나다. 총상금 액수도 1000만 달러여서 참가만 해도 적잖은 금액을 쥘 수 있다.

물론 대회의 명성과 가치만 따지면 더 플레이어스가 더 평가받는 것은 사실이라서 제안한 주최 측도 제법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필상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나만 선택한다면 전 델 매치플레이를 나가겠습니다.”

“2주간의 공백이 있긴 해요. 문제는 플레이어스가 바로 다음 주에 열린다는 거지만.”

“누군가 부상 등의 이유로 빠진 거군요.”

“그런 거 같아.”

“좋은 기회인 것은 알지만 사양하겠습니다.”

필상의 대답에 다들 말을 잃었다. 더 플레이어스는 타이거 우즈, 필 미켈슨을 비롯해 한국 선수와도 인연이 깊은 대회다.

2011년 최경주 프로가, 2017년에는 김시우 프로가 우승하면서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최근 상승세가 뚜렷한 필상이 출전하면 우승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더욱 사양한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굉장히 실망하겠네요. 하지만 왜 제가 기분이 좋은 걸까요? 호호호.”

“WGC는 없는 자리도 만들어 줄 자세가 되어 있지만 PGA 주관 대회의 주최 측은 아직도 공정한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 적선하듯이 던져 준 출전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오빠가 출전을 허락한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나 봐요. 기가 막혀!”

곁에서 듣고 있던 모모코도 한마디 거들었다.

실제 필상이 이룬 기적 같은 결과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동양 선수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옳다.

지나치게 편중된 환경이 낯선 선수를 배려하는 것은 스포츠 정신에 부합되고 실제 아시아 시장의 크기를 생각하면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필요도 있다.

“그럼 결론은 난 거네요.”

“네. 계획에 없던 갑작스러운 대회 출전은 사양한다고 전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소식이 언론에 흘러 나가면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들 입장에서는 체면이 확 구겨질 테지만 아시아 골프팬들은 아마 고소해 하지 않을까요?”

그저 웃고 말았다.

지나는 농담으로 스치고 말았지만 다음 날 한국은 물론 일본 언론에도 관련 기사가 떴다. 이 대표는 자신이 흘린 게 아니라고 했지만 그로 인한 효과는 확연했다.

필상이 공언한 대로 한국과 일본 투어에 전념할 것이라는 소식에 다들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탰고 PGA 투어의 거만한 태도와 독단적인 대회 일정으로 곤란을 겪던 여타 투어에서도 필상의 행동을 지지했다.

필요하면 타 대회 출전이 잡힌 선수도 마구잡이로 꼬드겨 데려갔던 그들의 행동은 만행이라 할 만했던 것이다.

* * *

“결국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네요?”

“그러게요. 팬들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다들 응원할 거예요. 달라진 대우와 조건에 대해 언론에 힌트를 주면 될 것 같아요.”

“전 사실 그보다는 어머니 한 마디에 움직인 건데. 하하하.”

사양했지만 이틀 후에 파격적인 제안이 들어왔다.

언론의 뭇매를 맞은 주최 측이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갑작스런 대회 출전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제안은 루키인 필상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갖췄다고 볼 수 있다.

PGA가 전격적인 사고의 전환을 시도했다는 것이 의미가 깊다. 누가 아쉬운 관계가 아니고 서로 협력하는 것이 골프계는 물론 팬들을 위한 옳은 결정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출전을 결정한 이유는 관련 소식을 뉴스를 통해서 접한 엄마의 뜻하지 않은 반응 때문이었다.

“그냥 나가서 당당히 보여 주면 안 되니?”

필상은 자신이 지나치게 완고한 사고에 젖어 있었음을 인정했다. 주변 환경은 자신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바꿔 나가면 될 일, 개인이 단체를 상대로 지나치게 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엄마의 말처럼 보다 당당하게 실력을 보여 주면 그 분위기는 원치 않아도 자연스럽게 변할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여 상대의 마음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개을리 하지 않는다면 더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주최 측도 좋은 제안을 해 와 필상은 바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델 매치플레이에 출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정이 빠듯해 이 대표가 직접 안내하기로 결정했고 드디어 성호와 더불어 미국 본토를 향한 대장정에 나섰다.

“제가 아름다운 플로리다 해변에 다 가 보게 되네요.”

“앞으로 자주 가게 될 텐데요 뭘.”

“PGA 투어가 적극적으로 메이저 대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대회가 바로 더 플레이어스라면서요?”

“네. 상급 기관인 PGA of america가 PGA 챔피언십을 강력하게 밀고 있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지만 실제 대회 분위기는 완전 메이저 대회 수준이죠. 상금도 최고로 맞춘 게 다 그런 이유와 자존심 때문이고요.”

“그런 대회의 출전 제안을 거절했으니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겠네요. 하하하.”

“그래도 번복하고 참가하게 되어서 그들도 한숨 돌렸을 거예요. 언론에 우려대로 출전이 무산되었다면 당장 책임자들도 부담을 느꼈을 테니까요.”

그저 한 대회를 출전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부여되었다. 이 대회를 직접 창설하고 주관하는 곳이 바로 PGA 투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골프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슈퍼 루키, 필상이 출전하지 않는다고 하자 흥행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그래도 무시하고 밀어붙일 생각이었으나 필상이 하필 WGC 대회에 연속 출전해 우승이라도 한다면 PGA 입장은 난처해질 확률이 높다.

게다가 필상이 올 시즌 미국 투어에 선별적으로 참가한다고 공언했기 때문에, 이러다 WGC에게 주도권을 내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대회가 열리는 TPC 소그래스 코스는 PGA 투어 본부 바로 앞에 조성된 정말 아름다운 코스다. 여러 색깔의 화려한 옷을 입은 미인 같다고들 하는데, 마스터스 하면 오거스타를 떠올리듯이 더 플레이어스를 상징하는 최고의 코스였다.

미리 여러 자료를 통해 살펴봤고 기대가 컸지만 먼저 도착한 해변의 호텔을 보자 골프는 깨끗하게 잊고 싶었다.

“우와! 정말 멋지네요.”

“일단 며칠 지내보고 불편하면 옮길 거니까 여장부터 풀어요. 성호 씨, 움직이죠.”

“아 네.”

플로리다 해변이 바라다 보이는 호텔, 꿈만 같았다.

주최 측이 모든 비용을 대기 때문에 더 기분이 좋았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전망에 전용 해변으로 걸어 나가면 언제든 바다 수영을 즐길 수 있다.

게다가 테라스에만 나가도 북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해풍에는 자연의 기운이 가득해 토납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치 않다는 점도 필상을 흥분시켰다.

그래도 대회를 위해 왔기 때문에 여장을 풀고 TPC 소그래스 코스로 이동했다. 그런데 일정이 드러났는지 클럽하우스에 도착한 필상은 수많은 취재진에게 둘러싸였다.

“여기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시간을 별도로 지정할까요? 아니면 대회 끝난 뒤로 미룰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기자회견 장소를 정해 바로 인터뷰에 응하지요.”

“괜찮겠어요?”

“전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이 정도도 각오하지 않았다면 프로가 아니지요. 하하하.”

“하기야 아무나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아니니까요. 호호호.”

어떤 상황이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사전에 이런 상황을 통지 받지 못했지만 필상의 일정을 기자들에게 알려 준 것은 대회 주최 측일 것이다.

귀띔이라도 해 줬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은 있으나 이게 다 자신이 짊어진 유명세의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미국은 처음 방문하신 걸로 아는데, 열렬히 환영합니다. 소감부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고의 무대, 더 플레이어스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또한 저를 위해 배려해 주신 PGA 투어 관계자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을 거둬 엄청난 센세이션을 몰고 다니시는데, 이번 대회도 우승이 목표입니까?

“하하하. 어느 선수가 우승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저도 우승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할 뿐이고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최 측이 출전 기회를 줬는데 처음에는 거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대체 뭐였죠?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달 멕시코에서 투어 시드를 확보한 저는 출전 가능한 대회를 확인했습니다. 더 플레이어스는 누구나 바라는 꿈의 무대지요. 당연히 출전하고 싶었지만 이미 출전 명단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고 아쉬웠지만 다음 일정을 구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그렇다면 일부러 PGA 투어를 물 먹일 의도는 없었다는 말이군요?

갑자기 기자의 톤이 바뀌었다.

예의는 대충 차렸고 본격적으로 공격할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그래야 여러 사람의 흥미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쓴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필상은 차분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일개 선수가 골프의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 고생하는 투어 관계자들의 수고를 몰라준다면 그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어리석은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에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듯 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하하. 교묘하게 논점을 흐리시는데, 항간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PGA 투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던데 그건 아니라고 부정하시는 건가요?

이쯤 되면 그의 의도는 확실했다.

PGA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그와 견주고자 하는 모든 것을 무시하는 편견에 사로잡혔다고 보는 게 적절했다.

상당히 난감했지만 이럴 때 일수록 진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필상은 똑똑히 말했다.

“PGA가 최고의 선수들이 경쟁하는 무대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죠. 하지만 PGA가 골프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최고의 무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 밑을 받치고 있는 하부 투어들이 고르게 발전해야 합니다. 그것을 부정하고 무시한다면 결국 PGA가 지닌 권위와 명성도 사상누각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시아 투어에 그렇게 집착을 하는 건가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투어가 성장하면 그게 PGA에 마이너스 효과를 낳을까요? 그런 생각이야말로 제 발등을 찍는 편협한 사고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투어가 고르게 성장하면 결국 그 모든 열매는 PGA가 따먹는 겁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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