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21화 (121/354)

121. 업그레이드

승패의 향방은 일찌감치 결정되었다.

허 해설은 졸지에 4타 차로 벌어진 스코어보다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4번 홀로 들어선 매킬로이의 표정이라고 말했다.

그의 심정이 어떨지 가늠해 보면 답은 나온다고 역설했다. 눈을 껌뻑거리며 그저 필상의 샷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영혼마저 탈탈 털린 사람처럼 보인 건 사실이었다.

상대를 무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속에 있는 자부심마저 무너뜨린 필상의 샷은 도무지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비거리, 또한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창조적인 시도와 그를 뒷받침하는 안정된 기량, 대체 어떻게 뒤집을 수 있는지 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굿 샷!”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로지 환호성뿐이었다.

그런데도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PGA 전문가들은 필상의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을 밑천으로 삼았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더 거세진 바람도, 일방적인 응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승기를 잡은 필상은 차분하게 파를 지켜 나갔고 그런 필상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수를 두던 매킬로이는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느꼈다.

강풍이 추격하는 자신에게 도리어 악몽을 안겨 주자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필상의 공략을 따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필상이 공언한 대로 번번이 실패했다.

왜 그런 공략을 하는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 샷은 결과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승부는 끝난 거 같은데요?”

“아니야. 언제든 숨통을 열어 주면 아등바등 따라올 거야.”

“7타 차인데요?”

“그래도!”

타수 차가 제법 벌어졌지만 필상은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았다. PGA 첫 승과 더불어 시드 확보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자신에 대한 편견과 마주할 때라고 판단했다.

마침 최고의 선수와 맞대결을 펼치게 된 점은 자신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견해를 부숴 버릴 좋은 기회라고 본 것이다.

그런 각오를 알 리 없는 매킬로이는 승부가 이미 기운 상황에서도 한 조각의 미소조차 보이지 않고 매홀 최선을 다하는 필상의 태도에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는 형과 경기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그 정도 깜냥이라면 슬럼프를 맞을 수도 있지만 만약 극복한다면 난 무서운 적을 만나게 되겠지.”

“그도 그렇겠네요!”

결국 마지막 홀까지 보기 없이 무결점 플레이를 이어간 필상은 -29를 기록해 이 대회 최저타 기록을 갈아치웠다.

악수를 나눈 매킬로이는 차마 축하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인터뷰는 물론 시상식에도 참가하지 않고 떠났다.

새로운 스타 탄생의 이면에 자신이 산 제물로 받쳐졌다는 자괴감이 그를 찍어 눌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빠!”

많은 선수들이 몰려나오지는 않았다.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그보다 먼저 두려움과 경계심이 작용한 게 아닌지, 다소 썰렁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필상에게는 모모코 한 명이면 충분했다.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인생의 중요한 한 획을 그은 필상은 모든 기쁨을 함께 나눴다.

그 와중에 몇몇 선수들이 다가와 샴페인을 퍼부었다. 그 주축은 역시 소중한 인연으로 다가온 필 미켈슨이었다.

진심으로 축하한 그도 오늘 4타를 줄여 탑 10에 이름을 올렸기에 더욱 의미가 깊은 마지막 라운드였다.

[미스터 퍼펙트! 자신의 닉네임을 증명하다.]

[새로운 강자의 출현! 11타 차 우승의 주인공 PS KONG!]

[9개월 만에 5개 투어 시드를 확보한 슈퍼 루키, 미스터 퍼펙트! 멕시코시티에 PGA 첫 승의 깃발을 꽂다.]

[충격과 공포! 몰리나리는 기권했고 매킬로이는 도망쳤다.]

[절대 강자 퍼펙트 콩, 대체 누가 그를 무시했던가!]

미국 무대는 참으로 기묘한 곳이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온통 무시와 편견으로 도배가 되더니 하루아침에 스타의 탄생에 대한 찬사로 탈바꿈되었다.

스타 마케팅, 그것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기사 가운데 가장 통렬한 것은 필상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전문가들의 언급을 일일이 나열하며 얼마나 무지했는지 반박한 내용이었다.

“읽을수록 재미있어요.”

“하하. 마지막까지 노력한 대가인가?”

“좀 심했어요. 로리가 삐쳐서 그냥 갔다잖아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문제는 그걸 도망쳤다고 표현한 기자지. 마음이 상할 텐데.”

“그러니까요.”

“이제 그만 보고 구경 좀 하지?”

“전 이게 더 재미있는데. 흐흐흐.”

대회를 끝낸 필상은 그간 누리지 못한 허니문을 위해 명소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특이한 조합이기 때문일까?

가는 곳마다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몰려와 어수선했다. 일본이나 한국보다 더 적극적인 팬심에 관광은 쉽지 않았다.

“그냥 한국으로 들어가요.”

“왜? 더워?”

“네. 전 여기보다 한국이 더 편하고 좋아요.”

“시어머니랑 시누이들이 있는데 뭐가 편하고 좋아?”

“잘해 주시잖아요. 그런 소리 하지 마요.”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정서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아는데, 모모코는 이상하게도 일본보다 한국을 좋아했다.

편부 슬하에 어려서부터 운동을 해서 따스한 가족의 정이 그리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래서 일정을 이틀 앞당겨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털어놔 봐.”

“뭘요?”

“상금 어디에 쓸 건지.”

“아! 그거요…….”

꾸물꾸물 말문을 열지 못하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기대와는 달랐다.

“집을 새로 짓는다고?”

“네. 지금 사는 집도 전 괜찮지만 다 같이 모여 살면 더 좋잖아요.”

“그건 좀 다시 재고해 보자. 누나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출가외인이야.”

“어머!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요새 본가, 처가 따로 구분하다니, 오빠한테 정말 실망했어요.”

내용인 즉, 새로 구입한 과수원 부지에 큰 집을 짓겠다는 구상이었다. 지금 사는 집이 지은 지 오래된 구옥이라서 리모델링을 하거나 새로 짓는 것은 필상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정든 집이라서 필상은 상관없지만 식구들이 다 모이면 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누나 가족들까지 염두에 둔 대저택은 아예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누나들이 해 준 것들을 생각하면 늘 고맙지만 그 신세는 천천히 평생을 두고 갚으면 그만, 이젠 그럴 능력도 된다. 물론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누나들은 각기 이룬 가족에 더 충실해야 하며 그들만의 생활이 있다.

새로운 가족을 맞아 한국식 가옥의 구조가 불편할 모모코를 위해 보다 편리한 집을 생각한 적은 있지만 당장 그럴 이유도 없다.

“어차피 우린 일본이나 미국으로 건너갈 거잖아.”

“오빠는 그렇지만 전 내년까지 한국 집에 있을 거예요.”

“내년까지?”

“네. 어머님이 우리 아이를 잘 봐주시겠다고 하지만 전 저도 같이 아이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빠도 멀리 가 있는데, 저마저 없으면 안 되잖아요. 딱 1년만이라도.”

“모모코!”

더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초가을에 아이를 낳으면 어차피 이번 시즌은 투어에 복귀하기 어렵다. 그마저도 미안한 일인데, 올 겨울 잘 다듬어 내년에는 투어에 복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어리석은 욕심이었다.

그녀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라고 생각했지만 태어날 아이에 대한 배려는 전혀 하지 못한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려웠다.

희생, 헌신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없는 모정이 작용한다는 생각을 하자 부끄러워 그 어떤 것도 반대할 수가 없었다.

“나랑 같이 미국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어?”

“치! 전 그러고 싶죠. 하지만 아이 떼 놓고 어딜 가요?”

“애도 데려가면……. 그건 좀 바보 같은 생각인가?”

“그럼 집 짓는 건 어머니랑 상의해서 결정해도 되죠?”

“그래. 하지만 누나들과 한 집에 북적대는 건 싫어. 따로 별채를 지어서 생활공간은 따로 쓰자.”

“왜요?”

“우리 애가 사촌들에게 치일까 봐!”

“참. 오빠도! 형제들과 같이 뛰어놀라고 합치는 건데, 혹시 오빠가 누나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죠?”

“싫긴 왜 싫어. 하지만 집은 좀 편안했으면 좋겠어.”

“알았어요. 어머니랑 얘기해 볼게요.”

솔직히 온 가족이 모여 사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바람직한 일이라고도 생각하지만 그건 또 다른 어려움을 낳을 수도 있다는 염려가 앞섰다.

하지만 모모코가 원하고 엄마가 원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어차피 자신의 구상에 따르면 한국은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상주할 곳은 아니다.

투어를 전전하다 지치고 힘든 여정의 와중에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찾아올 그리움의 터전이다. 가족이 많으면 더 정겹다는 생각, 강한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 그런 것을 감안하면 크게 나쁜 선택도 아니다.

엄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 좋겠지만 자신이 은퇴해서 함께 오순도순 사는 것은 희망 사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모코가 원하고 엄마를 생각하면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 *

“이야.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하하하. 어서 와요. 누나.”

“이젠 너한테 누나 소리 듣는 것도 영광인 거 같은데?”

“왜 이러십니까! LPGA 신인상까지 받으신 분이.”

“호호호. 그래, 나도 한때는 잘 나갔다고. 맞아.”

필상은 멕시코를 다녀온 뒤, 과거처럼 페럼CC에서 훈련에 매진했다. 집에 오자 별다른 할 일은 없었다.

있어도 신경 쓰지 않도록 배려하는 식구들 덕분에 편안하게 연습에만 매달릴 수 있어 좋았다. 그러던 차에 반가운 얼굴이 찾아왔다.

안수현 프로. 지금의 필상이 있기까지 적잖은 영향을 미친 당사자다. 또한 본의 아니게 미안한 일도 없지 않았고.

“왜 이렇게 예뻐진 거야?”

“빈말하지 마. 나도 내가 요즘 어떤지 잘 아니까.”

“정말이야, 누나.”

“으……. 좋다. 누나 소리.”

“어서 백이나 풀어요. 기회 될 때 한 번 점검해 줄 테니까.”

그녀의 캐디를 해 주겠다는 약속은 그녀 스스로 포기했다. 이미 상당한 시간이 경과된 일이기도 했고.

당시 필상이 일본 투어 시드를 확보하고 창창한 미래를 향해 걷고 있었고 누구에게나 알려진 연인의 캐디마저도 봐 주지 못했던 시기라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필상에게는 늘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먼저 연락해서 이곳으로 초청한 것이다.

“좋은데?”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하고 빨랑 교정해 줘.”

“뭘요? 스윙 리듬이나 밸런스, 건드릴 게 없다니까.”

“정말이야?”

“네. 전지훈련 어디로 다녀왔어요?”

“필리핀. 정말 다이어트가 필요 없을 만큼 독하게 매달리기는 했지. 그런데 네 칭찬 들으니까 힘이 펄펄 나.”

“그럼 연습 라운드나 한 바퀴 돌까요?”

“나야 좋지. 핸디 줘.”

“무슨 핸디요?”

“밥 내기는 해야 할 거 아냐!”

“투어프로가 핸디 받고 싶어요?”

“응. 너한테 밥 얻어먹고 싶거든. 호호호.”

결국 내기를 하기는 했다.

프로에게 핸디를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우겼더니 그 대신 클럽을 5개로 제한하겠다고 말에 동의했다.

사실 코스의 구석구석 모르는 것이 없는 페럼CC는 언제든 제한된 클럽으로 공략이 가능해 패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신중하게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필상이 선택한 클럽은 22도 유틸, 5번 아이언, 8번 아이언, 샌드웨지, 그리고 퍼터였다.

실전 라운드를 통한 샷 점검도 겸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라운드가 시작되자 둘은 치열하게 맞붙었다. 그녀의 샷 감각은 최고조에 이르러 딱히 봐줄 것도 없었고 블랙 티에서 제한된 클럽만으로 홀을 공략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았다.

“진짜 너무한다. 너무해.”

“586야드 파5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틸리티로 305야드는 좀 너무하는 거 아냐?”

“1다운인 제가 지금 남 사정 봐줄 때냐고요!”

“남자가 쩨쩨하게 한 홀 졌다고 풀스윙을 하냐고!”

안 프로는 무심코 그 말을 하다 말고 캐디에게 확인했다.

필상이 정말 풀스윙을 했는지 다시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미처 신경 쓰지 못한 하우스 캐디를 대신해 필상이 대답했다.

“풀스윙은 아냐. 이제 240도 정도 돌아가.”

“더 돌아간 것 같은데?”

“그래요?”

22도 유틸리티는 250야드로 조준되어 있다.

실전 가용한 최고의 힘 조절 90%로 때려도 290야드가 한계인데 그러고 보니 300야드를 넘긴 것이다. 방향성이 틀어진 것도 아니고.

그래서 가만히 복귀해 보니 정말로 240도 한계를 넘어선 것 같았다. 지난 느낌까지 정확히 짚어 내는 건 어려워 세컨샷에서 다시 확인했다.

남은 거리는 288야드, 그린에서의 런을 감안하면 22도 유틸리티로 85%스윙을 하면 온 그린을 시킬 수 있다.

하지만 실험을 위해 아까처럼 가용한 풀 샷을 날렸고 결과와 상관없이 필상은 자신의 백스윙이 이제 250가량 넘어간다는 것을 감지했다.

“거 봐! 내가 볼 때는 거의 풀 스윙이야!”

“비거리는?”

그제야 그린을 바라봤는데 공은 찾을 수 없었다.

방향이 정확해 벙커에 들어갔을 리도 만무해 얼른 가서 확인했더니 그린을 오버한 공이 화단에 들어가 있었다.

더는 내기가 무의미해진 필상은 느닷없이 자신의 연습 라운드로 전환시켰다. 상황을 파악한 안 프로도 흥미를 가지고 필상의 업그레이드된 스윙을 점검하는 캐디 역할을 대신했다.

결국 필상은 아주 중요한 발전을 이뤘음을 확인했다.

굳이 거리에 대한 욕심은 없었지만 꾸준히 연습하며 토납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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