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승부사 기질
1번 홀 대결을 지켜본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도 허 해설과 다르지 않았다. 흔하지 않은 강풍에 돌풍 예고도 있어 누가 먼저 실수를 하는지 그게 관건이라고 봤다.
그러나 두 선수의 첫 번째 승부처는 바로 다가왔다.
2번 홀, 오늘은 391야드로 조정된 파4에 우측으로 심하게 휘는 도그렉 홀이다. 그런데 매킬로이의 페이드 샷이 의도한 만큼 않아 정면의 러프로 기어들어 갔다.
바람의 영향을 받은 듯, 흥미로운 것은 필상의 티샷이었다.
연습 스윙부터 남다르다 싶었는데 티샷이 폭발하는 순간,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골프장을 완전히 휘감았다.
“와아아아! 나이스 샷!”
-공 스피드가 무려 188mph가 나왔습니다. 대체 얼마나 날아가는 거죠?
-드디어 공 프로가 본색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향이죠. 매킬로이의 샷처럼 꺾이지 않는다면 저 공은 막창입니다!
막상 말을 하고 보니 실언이었다.
표준적인 골프 용어도 아니고.
설사 그런 샷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아직 타구는 허공을 한창 날고 있는데, 너무 섣부른 말로 인해 부정 탄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타구는 최고점에 도달하기 직전부터 급격히 우측으로 휘기 시작했다. 제대로 페이드가 걸린 타구의 궤적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좋아!”
공의 움직임을 확인한 필상의 입에서 그 말이 터졌다.
이는 곧 자신이 의도한 만큼 충분한 페이드가 먹었다는 의미였다. 어느새 필상의 곁에 다가온 성호도 말을 더듬거렸다.
“도, 도대체 얼마나 강하게 때린 겁니까?”
“대략 90%?”
“360야드요?”
“아니. 380.”
그 말은 곧 1온을 노렸다는 의미였다.
통상 PGA 장타자들은 작정하면 400야드도 날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모든 조건이 들어맞을 때나 가능한 일, 지금처럼 도그렉 홀에서 페이드 구질로 그린을 노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한 번도 그런 무리한 샷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필상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런 강한 샷을 때린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캐리가 340야드 아닌가요? 제가 잘못 봤나요?
-아닙니다. 정확히 339야드죠.
-그런데 엄청 구르네요. 슬라이스 맞바람 아니었나요?
그 대답은 무의미했다.
이미 엄청난 런을 보였던 타구가 금방이라도 멈출 것 같더니, 급기야 그린 초입에 올라섰던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중계진은 잠시 말을 잊었다. 하지만 챔피언 조를 따라다니던 갤러리들은 눈앞에서 펼쳐진 장타 쇼에 난리가 났다.
티 박스에서는 공이 잘 보이지 않지만 각별한 시각을 자랑하는 필상은 타구가 홀컵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구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와우! 그린에서의 런까지 포함하면 396야드입니다. 무려 396야드!
-정말 미치겠습니다. 누가 우리 공 프로더러 반쪽 선수라고 비웃었습니까? 그들은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이 티샷을 보고 반성문을 써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저도 그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번 샷도 풀스윙이 아니었나요?
-250도 정도 넘어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걸 볼 필요도 없습니다. 작정하면 400야드도 날릴 수 있는 선수의 스윙이 작다느니, 소심하다느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여하튼 전 아직도 소름이 돋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다들 놀랐지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역시 동반자인 매킬로이였다. 여러 번 장타를 선보였지만 그의 뇌리에는 여전히 필상이 장타를 날린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클럽헤드가 임팩트 되는 순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이렇게 정확하고 무지막지하게 때릴 줄은 몰랐다.
멍하니 타구를 지켜보던 그를 캐디가 다독여 겨우 이동을 시작했지만 그는 영혼까지 탈탈 털린 듯,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보여 진정시키려고 애썼지만 매킬로이의 굳어진 표정은 세컨샷을 마칠 때까지 펴지지 않았다.
그러니 좋은 샷이 나올 리는 만무했다. 정타가 나지 않은 공은 맥없이 구르다 그린 앞 가드 벙커에 빠지고 만 것이다.
“어라? 아무리 러프라도 90야드를 저렇게?”
“원래 한 방은 이렇게 상대가 예측하지 못할 때 때려야 효과가 가중되는 법이지.”
“그러고 보면 형도 참 잔인해요?”
“잔인? 먹고 먹히는 정글에서 동물 보호를 부르짖을 놈이 바로 너네!”
“하하하. 어서 무너진 멘탈부터 찾아야 할 텐데요.”
상대를 걱정하는 성호의 생각은 이미 승부가 결정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개를 몇 번이고 흔든 매킬로이는 받은 충격도 무색하게 환상적인 벙커샷을 성공했다.
물론 매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상대지만 그래도 이번 샷은 확실히 그의 평균적인 기량이 어떤지 극명하게 보여 준 경우라고 할 만했다.
“나이스 샷!”
“쓰펄. 잘나긴 잘난 인간이네요. 홀컵이 잘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요.”
“넌 가서 핀이나 뽑아.”
“뽑고 퍼팅하려고요?”
“응. 난 텅 빈 홀 컵이 더 좋더라고.”
2019년부터 바뀐 규정은 선수가 원하면 핀을 박아 둔 채로 퍼팅을 할 수 있다. 지금처럼 라인이 많지 않고 살짝 오르막일 때는 핀이 꽂힌 상태에서 성공 확률이 더 높다는 실험 결과도 나왔다.
하지만 필상은 자신이 그래 왔던 그대로 핀 없는 홀 컵이 더 편했다. 실험 결과 따위는 아직 정확한 검증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스으윽!
바짝 마른 그린 스피드는 절대 강한 퍼팅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지금보다 조금 더 세게 밀어야 하지만 필상은 자신의 느낌을 믿었다.
8.5야드, 결코 쉽지 않은 거리다.
붙이기만 해도 버디이기 때문에 굳이 넣겠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필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 아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스트로크를 펼쳤다.
“으으으!”
“들어갈 것 같아요.”
“그쵸?”
모모코는 담대한 성격이다.
자신의 경기 중에는 좀처럼 이렇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필상의 경기를 지켜보는 심정은 사뭇 달랐다.
홀컵을 향한 공이 멈출 듯하다가 쑥 사라지는 장면에서는 모모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이 대표의 품에 폭 안겼기 때문이다.
감동을 받은 것은 이보영 대표도 마찬가지였던지 두 여자는 서로 껴안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미있는 것은 그녀들 주변의 갤러리들이 박수를 치며 그녀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글! 이글입니다!
-정말 침착한 퍼팅이었습니다.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쭉 빨려 와 푹 꺼지는 장면은 두고두고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2홀에 벌써 3타를 줄여 어느새 -26이네요. 이러다 또 한 번 신기록을 갱신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점점 더 강풍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죠. 바람이 세다고 경기가 중단되는 경우는 없지만 다양한 변수가 생기기 때문에 단독 선두로 나선 공 프로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전 걱정하지 않습니다. 설사 태풍이 불어도 우리 공 프로는 무너질 선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가장 충격을 받은 선수는 매킬로이였다.
비록 실수가 있었지만 멋진 벙커샷으로 파 세이브를 했기 때문에 필상의 이글 퍼팅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아무런 표정도 없이 삭막한 분위기를 풀풀 날리던 필상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퍼팅으로 기회를 살리자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강한 승부욕이 일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타던 그 감정도 3번 홀 필상의 티샷을 보고난 뒤에는 찬물을 끼얹은 듯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심한 슬라이스 바람이 부는 187야드 파3이었다. 투어프로에게 그리 부담스러운 거리는 아니지만 지금처럼 바람이 강할 때는 병풍처럼 길게 늘어선 나무가 되레 방해가 된다.
샷의 탄도가 나무의 높이를 넘기기 때문에 좌측을 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결국 훅 샷을 해야만 하는데, 문제는 불확실한 바람의 세기를 극복할 회전량이 얼마나 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난센스였다.
하지만 필상은 그런 어려움을 너무도 쉽게 풀어 버렸다.
쉬이이익!
6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은 바람의 영향을 최소화시킨 아주 낮은 탄도의 펀치 샷을 구사했다. 마치 독사가 풀잎 위를 빠르게 날아가듯, 바람의 영향을 회피하는 샷이 터졌다.
하지만 매킬로이는 샷을 마친 순간, 쓴웃음을 지었다. 훌륭한 시도지만 너무 짧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음은 곧 황당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린을 가로막은 벙커 앞에 떨어진 공은 절묘하게도 벙커를 뛰어넘더니 그린 위로 올라섰다.
좌측으로 치우친 홀컵과는 다소 엇나갔지만 그래도 6야드 오르막 퍼팅을 남긴 것은 충분히 환호를 받을 가치가 있는 아주 멋진 시도였고 성공적인 결과라 할 만했다.
-아주, 아주 절묘하군요! 저 위험한 벙커를 첫 번째 바운드로 넘긴다는 계산을 다 한 건가요?
-본인의 샷이 어떻게 튀는 지까지 정확히 계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 선수들이 바람이 부담스러워도 굳이 훅 샷을 날리는 이유가 바로 저 가드 벙커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공 프로는 놀랍게도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낸 거죠.
-창의적인 시도였군요?
-그렇습니다. 본인의 샷에 대한 완벽한 자신감이 없다면 절대 저렇게 칠 수는 없는 겁니다.
-어? 매킬로이도 같은 시도를 하나요?
-어허! 그런 것 같습니다.
티 그라운드에 올라선 매킬로이는 7번 아이언을 잡았다. 힘이라면 어디 가서든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필상의 창조적인 샷을 본 뒤, 본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타구의 탄도나 방향이 빼다 박은 듯 거의 유사했다.
“어허! 로리가 형을 따라 하네요?”
“똑 싸이(벙커에 빠진다는 태국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공이 바닥을 찍었다.
얼추 비슷한 것 같지만 엄밀히 보면 3야드가 짧았다. 그래도 결과는 같을 줄 알았는데, 그건 매킬로이라는 명성이 만들어 낸 착각이었다.
‘퍽!’
크게 바운드를 일으킨 공은 벙커를 넘을 듯 날아가다가 턱에 부딪치고는 모래 구덩이로 굴러 떨어졌다. 또르르륵!
7번으로도 충분하다는 교만이 부른 대가였다.
“힘이라면 결코 꿀리지 않는다더니, 다 헛소문이었네요!”
“임팩트는 아주 좋았어. 다만, 7번을 잡은 게 문제였지.”
“7번이었어요?”
경기 중인 선수는 상대가 사용한 클럽을 고의적으로 알아보면 페널티를 받는다. 하지만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걸, 성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힘이 좋은 건 사실인 거네요. 기술적인 부분도 거의 완벽하다던데, 계속 따라 하면 어쩌죠?”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아너인 필상의 독특한 능력을 참조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필상은 씩 웃었다.
“뭘 하든 쟤가 나를 따라 하면 십중팔구는 폭망할 거다.”
“하하. 걱정할 게 없다는 거네요!”
얼핏 지나친 자신감처럼 들렸다.
덩치는 작지만 매킬로이는 모두가 알아주는 장타자였고 특출한 기량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호도 필상의 말에 일체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으음……. 이번에도 벙커샷을 잘 붙일까요?”
“아니.”
거리가 좀 긴 것을 제외하면 아까보다는 훨씬 쉬운 샷이다. 하지만 필상의 장담은 빗나가지 않았다. 모래를 듬뿍 떠낸 매킬로이의 벙커 샷은 그린 엣지에 맞고 겨우 그린에 올라섰을 뿐이다.
“대체 어떻게 안 겁니까?”
“뭘?”
“이번 샷이 좋지 않을 거라는 거요?”
“왜? 내가 염력이라도 쓰는 것 같아?”
“네!”
“에라 인간아! 설사 쓸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매치 플레이를 하면서 내가 그런 능력을 쓸 만큼 허접한 것 같아?”
“그, 그건 아니지만. 너무 정확하게 맞추잖아요.”
그냥 얼렁뚱땅 넘기기에는 찝찝했지만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 얼버무렸다. 하지만 무심코 넘겼던 그 능력에 대해서는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강한 집념이 타인의 행동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 자제키로 결정했다. 더 정확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포기했다.
굳이 그런 능력까지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도 결국은 초월적인 감각을 지닌 것과 맞물려 미리 상대의 실수를 자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공격적인 의도로 사용할 의지가 없다면 굳이 파헤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 필상은 때가 되면 성호가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주의 깊게 잘 봐. 좋은 샷을 할 수 있는 조건인지, 또 정말 좋은 샷을 하는 건지.”
“심리적인 부분과 실제 스윙을 보고 판단한다는 건가요?”
“응.”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필상의 신비한 능력에 대해 그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충분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알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까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쨌든 보기를 기록한 매킬로이가 침통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필상은 또 다시 자신이 만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버디를 낚았다.
[-27 공필상 VS -23 로리 매킬로이]
챔피언 조의 리더 보드 숫자는 어느새 4타 차로 벌어졌다.
-너무 싱거운 승부 아닌가요?
-그렇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 결과를 얻기 위한 한 샷 한 샷의 의미를 새겨 보면 공 프로가 어떤 선수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량 말인가요?
-물론 출중한 기량은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공 프로의 남다른 승부사 기질입니다.
-아! 상대의 의표를 찌른 장타, 그것 말인가요?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바로 주어진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겁니다. 상대로 하여금 숨 쉴 겨를조차 주지 않는 거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