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WGC 멕시코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의 아침이 밝았다.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한 기운에 가득 찬 필상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모모코를 봤다.
어젠 그렇게도 걱정을 시키더니 이불도 걷어차고 사지를 쩍 벌린 채 자는 모습이 너무도 앙증맞아 조심스럽게 다가간 필상은 그녀의 입술에 뽀뽀를 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팔이 필상의 목을 감아 왔고 둘은 잠시 동안 침대를 뒹굴며 애정을 마음껏 나누었다.
불끈 치솟은 욕망의 불길이 뜨거웠지만 모모코는 오늘밤을 기약하자며 얼른 일어나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화장 안 해도 예뻐!”
“정말이죠?”
“응. 난 네 화장기 없는 뽀얀 피부와 살짝 드러난 주근깨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오빠!”
위장을 시작하려던 모모코는 한걸음에 달려와 다시 키스를 나눴다. 임산부에게 짙은 화장이 좋지 않다는 증명되지 않은 항간의 말 때문에 했던 거짓말이 아니다.
스물한 살, 모모코의 생얼은 있는 그대로가 더 깜직하다. 언제든 어루만지고 부빌 있어 기초화장만 한 그녀가 더 좋다.
이날 이후 웬만하면 짙은 화장은 자제하는 그녀를 보며 필상은 고마웠다. 자신의 미모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예뻐 보이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레프티!”
“늦잠꾸러기. 왜 이렇게 늦었어?”
“신혼이잖아요. 모모코가 놔 주질 않아서요.”
“오빠!”
“하하하. 어서 연습 시작하자고.”
어제 미켈슨도 -6를 치며 선방했다.
중간 성적 -7로 공동 18위였다. 자신의 명성에 비춰 보면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으나 그의 표정은 밝았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새롭게 익히고 있는 타법으로 몇 번의 좋은 기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필. 아직도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것 같아요.”
“맞아. 그게 잘 안 되네. 기본적으로 스윙이 너무 커. 느낌은 쓰리쿼터 같은데 그마저도 거의 풀스윙에 가깝더라고.”
“아예 하프스윙을 연습하시는 건 어때요?”
“그래야 할 것 같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현대 골프의 한 축을 지탱했던 필 미켈슨이 아직 PGA에 공식 데뷔도 하지 못한 필상의 조언을 듣고 있는 것, 그런데도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고집을 피우지 않는다.
알려진 바 미켈슨은 다양한 운동에 관심이 있고 특출한 재능도 갖췄다. 한때 투수를 하겠다며 MLB 테스트도 받았다.
특히나 골프에 대한 철학은 너무도 확고해 자신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연습하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오늘 로리와 경기를 하면서 잘 봐.”
“뭐를요?”
“스윙 스피드. 정말 놀랍거든. 그렇게 빨리 휘두르면서도 피니시를 보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
“그건 간결한 스윙과 엄청난 웨이트 트레이닝 덕분일 겁니다. 작은 체구를 극복하기 위해 거의 중독에 가까운 트레이닝을 한다잖아요.”
“나도 아저씨 체형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관리는 해.”
“하하하. 긴 비거리가 힘이 아닌 스피드로 결정된다면 형이나 나나 크게 걱정할 것은 없을 것 같아요.”
“형? 듣기 좋군.”
브라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무리 높임말이 없는 영어라지만 당신이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뼛속까지 한국인인 필상에게는 부담스러웠다.
그의 꾸밈없는 마음과 호감을 알기에 사용한 그 단어에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190cm 넘죠?”
“응. 191이지.”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우린 스윙아크가 크잖아요. 매킬로이처럼 장타를 날리기 위해서는 스피드를 낼 유연성만 기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연성? 그게 기를 수 있는 건가?”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떨어지겠지만 형에게 필요한 게 바로 그거 아닌가 싶습니다.”
“먹고 싶은 건 조절하고 그래야 하나?”
“그럴지도 모르죠. 하하하.”
그런 이론을 그가 모른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남의 얘기하듯 나눴던 말이나 이론은 와닿지 않았을지라도 당장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달리 느껴지는 법이다.
다행이라면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골프를 더 오래 즐기기 위해 그 정도 노력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당장은 그와 함께할 시간이 한정되어 있지만 추후 미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필상도 그에게 배울 것이 많다.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그의 다양한 경험은 값어치를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즐겁게 연습한 미켈슨이 먼저 티오프를 위해 떠나자 필상은 마지막 점검에 들어갔다. 드라이브를 잡은 필상은 강력한 티샷을 터트렸다.
과앙!
샷이 아니라 폭발이었다.
한껏 모아진 힘이 한 점에 모여 터지는 느낌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의 짜릿함을 선사했다.
“240도 정도 돌아간 것 같아요.”
“아직 그것밖에 안 되나?”
“으! 저 거리 좀 봐요.”
연습장에는 아직 출발하지 않은 몇몇 선수들이 남아 있었다. 웬만하면 필상은 다른 선수들이 있을 때 이런 풀 샷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경기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 314야드로 투어 6위에 마크된 장타자 매킬로이를 상대하기 위해서 필상은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꾸준히 페이스를 끌어올린 상대가 오늘 무서운 기세를 이어 나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평소와 같은 자세로 임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45야드. 이건 아니야.”
“지금보다 더 세게 날리려고요?”
“아니. 거리는 충분한데 탄도를 더 낮춰야 해.”
“탄도를 낮추면서 340야드를 날리려면 4단계 스윙이 필요할 텐데요?”
“그렇겠지. 일단 확인해 보자. 일관성이 있는지.”
필상은 자신의 드라이브 힘 조절을 5단계로 나눴다.
300야드를 기본으로 20야드씩 늘려 360야드를 보내기 위해서는 성호의 말처럼 4단계, 즉 85%의 힘을 써야 한다.
전지훈련에서 가다듬었지만 실전 경기에서 그런 강력한 스윙을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매킬로이라는 강적을 만난 필상은 비수를 꺼내 들기로 작정했다.
“방향성은 아무 문제가 없네요!”
“탄도가 낮으니까.”
10번의 연속 샷을 날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일단 방향성은 좌우 5야드 폭에 들어갔고 거리도 335야드 정도는 확보되었다. 하지만 필상은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더 정확한 지점과 거리를 확보하겠다는 집념을 지켜보는 성호와 모모코, 이 대표는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
뭘 더 높이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으나 10여 분이 지나자 서로 마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340야드 지점에 정말 귀신같은 탄착군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모든 공이 직경 3야드 안에 멈춰서는 걸 보며 천하의 매킬로이가 오늘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는 생각뿐이었다.
“퍼펙트. 좋은 아침입니다.”
“네.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너무 야속하다 마십시오.”
“물론이죠. 하하하.”
다소 전투적인 대화였지만 그건 너무도 당연했다.
이건 우승을 건 매치플레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아닌 척하는 것은 위선, 차라리 멋지게 붙어 보자는 그의 말이 기꺼웠다.
1989년생인 매킬로이는 필상보다 2살이 어리다. 프로필에는 178cm라지만 실제 키는 필상보다 한 뼘은 작았다.
물론 골퍼로서의 커리어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그의 일생은 오로지 최고의 왕좌를 향한 도전이 나날이었다.
그가 먼저 티 그라운드에 오르자 성호의 평가가 들렸다.
“아직은 최고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전성기의 타이거 우즈처럼 절대적인 기량을 지녔다고 볼 수는 없지만 왕좌에 가장 가까운 선수 중에 한 명인 것은 분명하지.”
“웨이트트레이닝을 정말 뽀지게 하나 봐요.”
“뽀지게?”
운동 중독이라는 말이 들릴 만큼 아주 탄탄한 체격을 지녔다. 강한 스윙을 하고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밸런스를 유지하려면 최적의 근육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게다가 균형 감각이나 유연성도 최고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의 보좌를 취하지 못한 걸 보면 모든 기량이 조화롭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핀을 바로 보네!”
“거리에 자신이 있으니까요.”
“바람이 애매한데?”
1번 홀은 319야로 세팅된 1온이 가능한 파4다.
실제 필상도 이 홀에서 바로 핀을 노려 이글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을 장악하고 있는 바람에 대한 확신도 없이 어떻게 핀을 공략하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힘찬 스윙은 돌아갔고 그의 장기인 하이 드로우 드라이브 샷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오호! 슬라이스 바람인가 봐요.”
“운이 좋네.”
“경험을 통해 터득한 건 아닐까요?”
“그럴지도…….”
그의 타구 방향은 정확했다. 그의 장기인 드로우가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오히려 최고의 결과를 낳았다.
물론 생각보다 길었던 타구는 홀컵을 성큼 지나 프린지까지 굴러갔다. 하마터면 벙커에 빠질 수도 있었던 공이 멈춰선 것은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티 그라운드를 내려오는 매킬로이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아마도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인데,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한국 출신 초청 선수 PS KONG을 소개합니다.
매킬로이와 교차해 티잉 그라운드로 올라서는 가운데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말이 들렸다. 하지만 필상은 잠시 모자를 벗어 인사차 흔들었을 뿐, 내용은 흘려들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쏠까?’
애초에 필상은 1온을 노릴 의사가 없었다.
바람의 방향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선 타구를 본 필상은 최적의 공략 방법이 떠올랐다.
그러나 애초에 짧은 공략에 이어 세컨샷을 붙이려던 공략에 따라 4번 아이언을 들고 올라갔기에 얼른 잡념을 떨쳤다.
필상이 아이언을 들고 올라가자 팬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너무 소심하다는 평가와 자신의 플레이를 꿋꿋하게 유지하는 것이 믿음직하다는 반응이 있었지만 빠르게 마음을 정한 필상은 스윙 루틴을 밟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멋진 1온을 보여 줬으면 했는데, 아쉽네요.
-매킬로이의 샷을 참조하면 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만 저는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가 그대로 유지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배짱 좋게 드라이브 샷을 날린 매킬로이에게 한 방 먹이지 못하는 것이 좀 아쉬워서 그러죠. 하하하.
-그렇게 생각한다면 임 캐스터는 골프를 새로 배워야 합니다. 결과를 봐야겠지만 공 프로와 같은 샷의 달인도 안전한 선택을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최고의 결과만 생각하지 말고 최악을 대비하는 것이 고수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게 다 필상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던진 말인데 어찌 보면 면박처럼 들렸다. 하지만 허 해설의 말이 백 번 옳다.
TV 앞에 앉은 시청자들이 대부분 아마추어인 것을 감안하면 모험보다는 안정적인 샷을 권하는 것이 중계진의 몫이다.
임 캐스터처럼 말하는 것이 당장은 기분 좋을지 모르지만 필드에서 벌어지는 실제 상황은 너무도 냉혹하지 않던가.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는 와중에 마침 필상의 4번 아이언이 불을 뿜었다. 특유의 쓰리쿼터 스윙은 그다지 강력해 보이지 않았지만 타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갔다.
“드로우!”
필상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휘는 구질을 거부한다.
굳이 회전을 걸다가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스트레이트로 치는 것을 중시하며 연습도 가장 오래 한다.
그러나 이번 타구는 지나치게 우측으로 뻗어 나갔던 것이다. 때문에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한 성호는 좌측으로 휘기를 바라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팬들의 함성 때문에 묻혀 버렸지만 피니시를 마친 필상이 타구에 시선을 돌릴 무렵, 급기야 드로우가 먹기 시작했다.
더도 말고 시야를 가리는 나무를 피한 곳으로 떨어졌는데, 타구의 힘이 너무 좋아 러프까지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우후! 4번 아이언으로 246야드를 때렸네요!
-아무래도 드로우 구질이기 때문에 런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이 놓인 지점은 퍼스트 컷이라서 70야드 정도라면 핀에 붙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그린에 올린 것보다는 확률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요?
집요하게 자신의 주장을 이어가는 캐스터의 옆모습을 슬쩍 돌아본 허 해설은 그냥 씩 웃고 말았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필상은 2m에 붙여 버디를 잡았고 매킬로이도 프린지에서의 이글 퍼팅을 넣지는 못했다.
-24언더. WGC에서 오늘 코스 세팅이 어려울 것이라고 통지했고 실제로 앞선 선수들이 타수를 잃었지만, 이 두 사람은 지구의 생명체가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쉬워 보여서 그런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킬로이는 모험에 성공한 것이고 우리 공 프로는 유혹을 이기고 만들어 낸 값진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팽팽한 승부가 보는 재미는 있지만 저는 그런 경기 내용보다 공 프로의 확실한 우위를 바랄 뿐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저는 공 프로가 끝까지 안전 모드로 진행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강풍과 마지막 라운드에 대한 심적 부담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냥 확 질러 버리고 싶은 마음은 알겠으나 이럴 때일수록 참아야 합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성경 구절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