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18화 (118/354)

118. 친구(親舊)

“저런 인간을 왜 축복해 줍니까?”

“축복?”

“제 생각이 틀린 건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일단 이번에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나도 정말 궁금해. 하하하.”

“으? 뭔가 있군요!”

갑자기 눈빛이 쌩쌩해진 성호는 티잉 그라운드에서 연습 스윙을 하는 몰리나리에게 아주 흥미진진한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몇 번이고 빈 스윙만 반복하던 그는 좀처럼 샷 루틴을 밟아 나가지 못했다. 뭔가 문제가 생긴 듯.

“저 인간 왜 우릴 쳐다보죠? 샷은 안 하고.”

실은 필상을 쳐다본 것이다.

굳이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자면 그건 애절함이었다.

언제까지고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바, 그는 급기야 어드레스를 취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스윙, 본인이 장담한 강한 샷을 이미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타앙!

사람들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투어프로가, 그것도 세계 랭커인 프란체스코 몰리나리가 드라이브 티샷에 뒤땅을 때리다니!

다행이라면 티 박스 앞에 별다른 장애물이 없다는 거였다.

-저게 대체 무슨 샷입니까?

-어깨가 잔뜩 굳어 있습니다. 왜 그러죠?

-그래서 지루할 만큼 연습 스윙을 많이 한 건가요? 아무래도 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네. 제 의견도 그렇습니다. 늘 안정된 샷을 구사하던 선수가 이제 겨우 6번 홀인데, 벌써 터무니없는 샷이 몇 번입니까? 지금처럼 경기한다면 순위를 떠나 인생 최악의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몸에 이상이 있다면 당장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경기를 접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라운드 동안 -12를 기록하며 단독 4위까지 올라온 것이 아깝기는 하겠네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우선이죠!

중계진은 아예 기권을 종용했다.

당사자가 들으면 울화가 치밀 말이지만 그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명성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저 한 경기 망가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골프라는 것이 한 번 리듬을 잃으면 긴 슬럼프의 시초가 될 수도 있음이다.

실제 120야드를 굴러간 타구를 멍하니 쳐다보던 몰리나리는 세컨 샷 지점을 향해 이동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필상이 캐디와 함께 씩씩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가는 사정없이 일그러졌으며 진행 요원이 움직이기를 권하자 갑자기 화를 내며 뭐라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당황한 캐디를 남겨둔 채 혼자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세컨샷 지점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갤러리들 사이로 파고들었어요.”

“클럽하우스 방향이잖아.”

“아! 경기를 포기했나 봐요.”

“그러게 왜 술을 마시냐고.”

“술이요?”

“술이 덜 깼어. 저 인간!”

“으으으…….”

성호는 그제야 저간의 사정이 보다 명확히 보였다.

사실 제정신이라면 동반자를 그렇게 대할 수는 없다. 아무리 동양인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도 그걸 드러내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정도는 안다.

게다가 말투도 거칠었고 모모코에 대한 언급은 도를 지나쳤다. 하지만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해 가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어허! 우리 공 프로가 외롭게 되었네요.

-황당한 상황이지만 그건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2인 플레이에서 동반자가 없을 경우, 진행 요원이 스코어를 크로스 체크해야 하기 때문에 기다리면서 더 여유를 찾기 바랍니다.

-아! 그렇군요.

필상도 원지 않은 상황이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느닷없이 잔디 둔덕에 앉는 모습이 팬들의 눈에는 그저 장난처럼 보였지만 눈을 감고 여유를 즐기는 그 행동은 사실 필상에게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다.

5분 여에 불과했지만 토납법을 운용하기에는 충분한 시간, 희미하게나마 자리했던 답답함을 말끔하게 씻어 버렸다.

그리고는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오늘 또 다시 10언더! 정말 무지막지한 무력시위였죠?

-3라운드를 마친 현재 -23인데도 단독 1위가 아닙니다. 매킬로이가 오늘 -9를 몰아치면서 동타를 이뤘습니다.

-그러니까요. 지난해 존슨은 우승 스코어가 -21이었는데도 2위와 5타 차로 우승을 거뒀는데, 이건 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마 놀라기는 매킬로이가 더 했을 겁니다. 몰아치기 능한 그는 오늘 같은 불꽃 샷이면 무조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강적이 남아 있었던 건가요? 미스터 퍼펙트!

-그나저나 골프팬들은 아주 흥미진진한 대결을 지켜볼 절호의 기회를 얻은 셈입니다. 아마 내일 중계는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봅니다.

경기를 마친 필상이 샤워를 하러 들어갈 때만 해도 1타 차 선두였다. 매킬로이가 바짝 추격한 것은 알았지만 18번 홀은 어려워 버디를 잡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1타 차라도 매킬로이는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그런데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필상은 둘이 동타가 되었고 클럽하우스 로비에서 한 무리의 기자들에 둘러싸여 즉석 인터뷰를 진행하는 매킬로이를 볼 수 있었다.

원치 않아도 들리는 그의 음성은 아주 쩌렁쩌렁했다.

좋은 선수와 매치플레이를 펼치게 되어 흥분되고 행복하단다. 칭찬으로 들으면 칭찬이고 은근히 거슬리는 자신감도 느껴졌지만 일단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굳이 기자들의 촉수에 걸려 원치 않는 대답을 강요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들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던가!

“미스터 퍼펙트! 미스터 퍼펙트!”

누군가 자신의 닉네임을 부르며 달려오는데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게 들리지 않았다면 모를까, 도망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는 것은 불편해 일단 멈췄다.

그런데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 중심에 북아일랜드 출신의 골프 신동, 아니 이제는 당당히 골프 황제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는 매킬로이가 함께였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퍼펙트.”

“반가워요. 로리.”

“어제 오늘 -20을 기록하셨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대도 늘 가능한 일이지요. 내일 우리 둘이 매치가 됐나 보군요?”

“네. 공동 3위는 -16이니까 매치플레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벌써부터 아주 흥분되고 떨립니다. 하하하.”

“저 또한 좋은 경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냥 인사나 하고 물러서려 했다.

원했던 자리도 아니고 준비 없이 인터뷰를 응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여 작은 실수라도 하면 물고 늘어질 인간이 많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하지만 끈끈하게 발길을 끄는 질문이 나왔다.

-아내 분의 임신 축하드립니다. 허니문을 오셨다는데, 너무 무리한 일정 아닌가요?

“걱정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저희 부부의 일정은 서로 상의해서 결정합니다. 골퍼인 저희들에게 이렇게 좋은 대회의 출전보다 값진 여행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우승을 자신하는 건가요?

“저는 제 플레이에 집중할 뿐, 결과는 하늘의 뜻 아닐까요?”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JLPGA 최고의 선수인 모모코가 전성기를 맞이해 한국 선수들이 고전하자 그걸 저지하기 위해 아이를 가졌다는 풍문도 있던데, 사실은 아니겠죠?

너무도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설사 정신 나간 자가 지껄인 망발이라도 기자가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지금 그걸 언급하는 것부터 저의가 의심되었다.

은근히 화가 치밀었지만 미소를 입에 띤 필상은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그 말에 동의하는지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다는 표정만 있을 뿐, 그저 재미난 가십 거리로 여긴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이런 분위기, 용납되지 않았다.

“상식이 있는 분이라면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않을 겁니다. 질문하신 기자 분이 결혼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사랑하지도 않는데 평생을 기약하고 사랑의 결정체인 아이까지 가집니까?”

다분히 악의적인 소문을 질문이랍시고 던졌던 기자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지나친 말이었던 것이다.

뒤돌아 나가려던 필상은 한마디를 더 보태고 움직였다.

“제가 프로 골퍼로서 도리에 어긋나거나 예의를 지키지 못했다면 그건 비난 받아 마땅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건 접어 두고 경기 내용이나 스윙에 대해 평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로리, 내일 당신의 하이드로우 샷 볼 수 있나요?”

“아. 물론입니다. 저도 당신의 송곳 같은 아이언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무난하게 불시의 인터뷰가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뒤돌아서자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 남자는 다짜고짜 누군가를 지목하며 험한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어이! 피터슨. 너 미친 거야?”

“이보세요. 필. 무슨 그런 말을 하십니까?”

“기자면 기자답게 직업윤리를 지키라고. 나한테도 그런 막돼먹은 말을 한 번 해 봐!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보라고.”

“본인의 일도 아닌데, 너무 흥분하시는군요!”

“이 남자는 내 친구야. 친구가 모욕을 당했는데 나더러 그냥 모른 척하라는 말인가?”

뒤늦게 나타난 사람은 필 미켈슨이었다.

물론 서로 친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신 나서서 흥분할 정도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켈슨은 마치 자기 일인 양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졸지에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누가 잘못했는지는 너무도 확연하기 때문이다.

“필, 그만하시죠. 전 괜찮습니다.”

“아니야. 난 참을 수 없어. 저 작자의 불의한 행동을 보고 왜 아무도 나서지 않느냔 말이야! 이 대회를 빛내 주는 자네의 가치를 모르는 저런 자들이야말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는 거지. 내 말이 틀렸나?”

어느새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기 시작해 그 많던 기자들이 순식간에 몇 명 남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이들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매킬로이도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동조의 뜻을 밝혔다는 점이었다. 골프 대회의 진정한 주인공은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한 것이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주목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필상은 미켈슨의 어깨를 두르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녁은 뭘 먹을까요?”

“자네가 살 텐가?”

“한국에서는 보통 형이 먼저 삽니다. 동생이 사면 건방지다고 막 혼을 내지요.”

“그럼 내가 사야겠구먼. 하하하.”

친구는 어려울 때 가려진다고 했다.

그라고 왜 부담스럽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는 필상을 향한 편견을 알고 있었고 좋은 경기를 펼치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필상에게 PGA가 나쁜 인상을 심어 주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또한 옳은 일이라고 여겼기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필상은 아주 좋은 친구를 얻었다. 한국식으로 하면 좋은 형님을 한 명 얻은 셈인데, 그는 친구라고 언급했다.

***

“미켈슨이 완전 영웅이 됐어요.”

“그럴 만했잖아.”

“주인공은 형인데…….”

“진정한 주인공은 오늘 가려지겠지. 하지만 어제 봤듯이 아주 좋은 사람을 만난 건 분명한 것 같아.”

“그건 저도 인정해요. 확실히 스타 기질이 있는 아저씨더라고요.”

“아저씨?”

“7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쉰이라고요. 우리 작은 아버지랑 동갑이에요.”

“하하하. 친구라잖아.”

만나면 나이와 출신, 학력부터 확인하는 한국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물론 그런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려면 보다 넓고 다양한 사고의 틀이 필요했다.

미켈슨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필상은 오늘도 휴양림으로 향하지 못했다. 시무룩한 모모코가 자꾸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호텔로 돌아가려고 했다.

“오빠는 연습해요. 저 호텔로 먼저 들어가 쉴게요.”

“너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서 그러지.”

“괜찮다니까요!”

그렇게 나오니 더 불안했다.

언제든 하고 싶은 말을 속에 담아 두는 성격이 아닌데, 뭔가 불편하거나 쌓인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연습하라며 먼저 들어가려는 그녀를 붙들고 신용카드를 건넸다.

“왜요? 저도 카드 있어요.”

“아니야.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이 대표랑 같이 쇼핑하러 가. 식구들 줄 선물도 사고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뭐든 사도 돼.”

“정말이죠?”

“대표님. 부탁 좀 드릴게요.”

이 대표는 금방 알아들었다.

그런데 막 나가려던 모모코가 돌아오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오빠 우승하면 상금 제가 써도 되죠?”

“그건 무슨 잔금 치른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요.”

내용도 모르고 덜컥 대답하기는 내키지 않았으나 필상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그녀의 생각과 판단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상황에서 자신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크게 실망할 것 같았다.

“역시 우리 오빠 최고!”

뺨에 진한 키스 마크를 남긴 모모코는 확연히 명랑해진 모습으로 쇼핑을 떠났다. 저런 들뜬 기분으로 얼마나 많이 써 제킬지 살짝 불안해졌지만 그건 걱정할 게 아니다.

사실 필상보다 그녀의 계좌가 더 무겁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전에 그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앞으로 자신의 계좌도 모두 오빠가 관리해 달라고.

대체 우승 상금을 어디에 쓸지 궁금했지만 일단 성호와 함께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을 찾아 떠났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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