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15화 (115/354)

115. 이빨은 보이지 말자.

“비거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맞아. 내가 자네 경기를 보며 절실하게 느낀 게 바로 그거지. 정확한 임팩트를 만들어 내면 보다 적은 힘으로도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

그 원리는 알고 있었지만 미켈슨은 그러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했다. 자신의 스윙이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결과가 증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느낀 고난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생각이 많아졌고 그러던 차에 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풀스윙을 하지 못하는 반쪽 골퍼!’

그런 골퍼가 참가하는 대회마다 우승을 거두고 꿈의 57타를 쳤다는 말에 아시아 투어를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 274야드를 보내고도 일본오픈을 거머쥐었다는 소식에 마침내 경기 영상을 찾아봤다.

그런데 하이라이트만 보고도 전율을 느꼈다.

그가 보기엔 그런 짧은 스윙으로 평균 274야드를 보낸 것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정도 힘으로 때리면 250야드도 나갈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은 항상 강하게 때리는데도 드라이브 비거리는 늘 중하위권이라는 점도 필상의 샷을 분석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워낙 오랫동안 굳어진 스윙이라서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지금 내가 비슷하게 흉내 내지 않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막상 경기에 임하면 본래의 스윙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렇겠지!”

스윙 메커니즘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한 그에게 가장 좋은 본보기가 필상이라고 판단하고 직접 왔던 것이다.

사실은 화요일 이곳에 도착한 뒤로, 망설였다.

과연 찾아가 직접 만나는 것이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 1라운드에서 필상이 맥을 추지 못하자 괜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 먼저 경기를 끝낸 그는 필상의 경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마침내 용기를 낸 것이다.

-WGC 멕시코 챔피언십 3라운드 중계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어제와 비교하면 오늘은 아주 편안한 방송이 될 것 같죠?

-그렇습니다. 우리 공필상 프로가 드디어 샷 감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어제 데일리 베스트를 기록한 기세를 몰아 리더 보드 최상단에 위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공 프로와 함께 매치 업이 된 프란체스코 몰리나리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 주시죠.

-현 세계 랭킹 10위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탈리아 출신인 그를 그다지 출중한 골퍼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거둔 8승에는 그 유명한 디 오픈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 그 어렵다는 스코틀랜드 링크스 코스, 카누스티에서 억센 바람이 부는데도 보기 없이 2타를 줄여 클라레 저그에 이름을 새긴 장면은 아주 감동 깊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라이더 컵에서 타이거 우즈와 펼쳤던 명승부도 그의 진가를 드러낸 경기였지요. 우리 공 프로가 잘 해낼 것이라고 믿지만 그를 우습게 보는 우를 범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허 해설위원은 몰리나리를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상대를 무조건 낮춰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필상이 기대한 만큼 잘 치면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고, 혹시 밀리더라도 체면을 구길 일이 아니라는 연막이 될 수도 있다.

뒤에서 2번째 조에 편성된 필상은 시간이 다가오자 1번 홀로 향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처럼 팬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래서 더 부담 없이 홀가분했다.

앞 조 선수들의 티샷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마침내 1번 홀 티 박스로 다가갔다. 그런데 동반자가 보이지 않았다.

티오프 시간을 어기는 것은 규정에 따라 벌타를 받는데, 너무 늦어지는 것에 염려가 되었다.

“잠깐만요!”

인파를 헤치고 나타난 몰리나리, 11시면 이른 시간도 아니건만 아무리 봐도 샤워는커녕 세수도 하지 않은 모습이다.

그 와중에도 껌을 쩍쩍 씹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와 인사하는 와중에 알코올 기운이 느껴졌다. 다른 이들은 그냥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필상의 후각은 개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그런데 이름이?”

“아! 미스터 공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프란체스코.”

“퍼펙트 콩. 맞다! 인기가 아주 끝장이던데? 그다지 좋은 소리는 별로 없지만.”

“하하하. 어서 올라가시죠?”

진행 요원이 시계를 보며 손짓하고 있었던 것이다.

챔피언 조 선수들도 이미 뒤에 대기 중인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태리 사람에 대한 선입견은 없지만 첫 대면부터 인상이 곱지는 못했다. 지나치게 솔직하고 37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젊은 느낌은 괜찮아 보였지만, 대회 중에 술을 입에 댄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물론 주량에 따라 다르지만 늦잠을 자고도 알코올 기운이 남았다면 그건 경기에 임하는 자세에 관한 문제다.

경기에 임하면서 이렇게 동반자에게 신경을 써 보긴 또 처음인지라 과연 그의 티샷이 어떨지 지켜봤다.

깡!

그 와중에도 몰리나리는 안정적인 티샷을 날리고 내려왔다.

더 묘한 것은 교대해서 티 그라운드로 올라가는 필상에게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요구한 장면이었다.

물론 응해 줬다.

지나치게 강하게 마주친 것은 나쁜 의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받은 충격보다 훨씬 아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필상의 티샷은 생각한 만큼 곧장 날아가지는 못했다. 어차피 바람이 강해 318야드의 짧은 파4를 직접 공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22도 유틸리티의 방향성은 어디 가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그게 살짝 열려 맞았다.

“저 인간, 뭐죠?”

“하하. 은근히 도발을 하네?”

“아까 하이파이브에 영향을 받은 건가요?”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유틸리티 샷이 밀린 걸 보면.”

“저 새끼가!”

“그만해. 제 풀에 나가떨어지게 만들 테니까.”

어쩌면 술 냄새를 풍긴 것도 의도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평균 이하의 매너를 가진 자라고 봐야 한다.

물론 증거가 없으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173cm, 72kg인 그가 투어에서 살아남은 비법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 단단히 뜯어고쳐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넘길까요?”

“아니. 굴리자.”

“그럼 몇 번 드려요?”

“7번.”

티샷이 밀리는 것이 가장 안 좋다.

우측에서 삐죽 튀어나온 나무가 그린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린을 공략할 수는 있다.

나무를 넘기거나 탄도가 낮은 샷을 구사하는 것이다.

샌드웨지 이상을 잡으면 가지에 걸리지 않을 높은 탄도를 만들 수 있지만 문제는 바람이었다. 허공에 부는 바람은 지상과 달리 강했다.

문제는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강하게 부는지 모르기 때문에 필상은 낮은 탄도로 굴리는 샷을 구상했다.

-어허! 펀치 샷을 때릴 것 같네요?

-네. 바람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더 어렵지 않나요?

-물론 어렵습니다. 탄도를 낮추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고 55야드에서 런을 조절하는 것도 충분한 연습이 없으면 실수하기 좋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스터 퍼펙트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 지점에 떨어뜨려야 하죠?

-탄도에 따라 달라지지만 지금처럼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기 위해 탄도를 낮추면 35야드 정도?

-그린 앞의 러프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과연 거리를 맞출 수 있을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운 샷이네요.

만약 장애물이 없다면 훨씬 수월한 샷이다.

하지만 자칫 실수하면 가지에 맞아 거리가 확 줄어들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샷이었다.

필상의 의도를 확인한 몰리나리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것을 본 필상의 표정은 아주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놈 봐라?’

괘씸했지만 그것도 나름 그의 작전이라면 실패다.

집중력을 높인 필상은 하프스윙으로 정확히 공을 타격했다. 이미 연습한 내용이었고 샷 이미지 메이킹도 쉽게 그려졌기 때문에 불안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공이 떠난 자리에 시선이 박힌 필상은 갤러리들의 반응부터 들었다. 그것만 들어도 대충 결과가 파악되기 때문이다.

“고! 고!”

‘짧았나?’

고개를 돌린 필상은 러프에서 튀어나온 공이 그린에 올라 핀을 향해 구르는 장면을 봤다.

짧기는커녕 길었다.

물론 펀치 샷에 실린 힘을 모르는 갤러리들에게는 러프에 떨어진 공이 약한 것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퍼스트 컷에 들어갔던 공이 튀어나와 핀을 향하자 사방에서 비명 소리와 박수가 터졌다. 홀컵을 지나 4m 지점에 멈춰선 것에는 깊은 탄식도 들려왔다.

“좋았습니다.”

“어디 저 자식 샷 좀 보자.”

“으? 저 자식이요?”

“그래. 매너를 지키지 않는 인간에게는 똑같이 대해 주는 게 내 원칙이지.”

“82년생인데요?”

“나잇값을 못 하는 인간은 더더욱 싫어해.”

“하하하. 우릴 자꾸 쳐다보는데요?”

“그럼 시원하게 웃어 줘. 하하하.”

유치하지만 트러블 샷을 멋지게 올린 필상의 모습에 이젠 그가 흔들릴 차례였다. 50야드밖에 남지 않은 웨지 샷을 실수할 그가 아니지만 그건 또 모를 일 아니겠는가!

언제나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필상의 눈가에 웃음이 걸린 장면도 희귀했다. 화면에 잡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만.

그런데 염원이 먹힌 걸까?

몰리나리가 터무니없는 샷을 하고 말았다. 리딩엣지로 공을 바로 때린 탑핑(Topping)이 난 것이다.

“우우우우!”

필상이 터트리고 싶은 우려 섞인 탄식은 갤러리들의 몫이었다. 그린을 넘어 뒤에 있는 벙커에 들어간 공이 뒤턱을 넘지 못하고 다운힐 라이(Downhill lie-어드레스 할 때 왼발이 오른발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상태)에 서 버릴 때까지 엄청난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꼴좋네!”

“하하. 이빨은 보이지 말자.”

“그렇게 말하는 형이나 웃지 마세요. 저 인상 쓰는 거 안 보이십니까?”

“아! 내가 웃었나?”

“카메라에는 잡히지 마십시오.”

“알아. 인마!”

음성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어느새 필상의 표정은 포커페이스로 돌아간 뒤였다. 몰리나리가 필상의 웃음을 본 바로 그 순간이었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필상의 눈에 머리에서 허연 김이 뿜어 나오는 몰리나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좀 심했나 싶지만 그건 아니다.

투어에 임하는 자세가 그릇된 그는 필상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골프를 모독한 것이다. 어디 감히 대회 기간에 술을 입에 댄단 말인가!

“오른쪽 반 컵만 보면 될 것 같아요.”

“응. 시간 많아. 천천히 확인할게.”

“큭!”

필상은 아예 그린에 올라가지도 않았다.

보통은 다음 샷을 위해 대비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동반자의 다운힐 라이 벙커샷 결과가 자신보다 가깝지 않을 것이라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난해한 벙커샷을 준비하던 몰리나리의 표정이 더 심하게 구겨진 것도 바로 그 같은 이유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괜히 모모코와 이 대표, 션이 있는 지점을 찾아 씩 웃어 보인 이유는 보내는 김에 확실히 보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퍽!

차라리 벙커 아래가 낮다.

확실하게 걷어 올리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보낼 거리가 꽤 긴 벙커샷은 까다롭다. 특히나 공의 뒤를 파야 하는데 왼발이 낮아서 정확한 지점을 찍어도 거리가 확보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필상이 보건데 그의 샌드웨지가 파고든 지점은 무난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모래가 무거웠는지 생각만큼 많이 퍼내지 못했고 뜨지 않은 공은 벙커 턱을 맞고 다시 굴러 내려왔다.

아까는 터무니없는 실수였지만 이번 샷은 운이 없었다.

그걸 너무도 잘 알기에 분을 참지 못한 그가 클럽을 들어 반대편 벙커 턱을 세게 갈겼다. 얼핏 보면 클럽에 묻은 모래를 터는 것 같지만 그건 분노의 폭발이었다.

“파는 물 건너갔네요!”

“이제 라이를 보는 흉내라도 내야겠다.”

“놔두면 또 실수할 수도 있는데요?”

“너무 무너지면 내 리듬이 깨지잖아. 그건 안 되지.”

어차피 경쟁자가 아니라면 적당히 무너지는 것이 좋다.

고약한 질병이 전염되듯이 동반자가 자꾸 실수를 하면 덩달아 묻어가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를 살피는 모습도 꼴 보기 싫었는지 몰리나리는 얼른 4번째 샷을 위한 어드레스에 들어갔다.

라이를 보던 필상이 미처 물러서기도 전에 그의 샌드웨지가 모래를 때렸고 그 공은 하필 필상이 물러난 프린지까지 굴러 와 멈췄다.

-어허! 하마터면 우리 공 프로가 맞을 뻔했네요!

-공 프로가 그렇게 둔한 사람이 아니죠. 그나저나 몰리나리가 오늘 대체 왜 저러죠? 기껏 좋은 평가를 내렸는데, 사람 아주 못됐네요!

-어제 술을 진탕 마신 건 아니겠죠?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하긴 합니다. 하지만 술을 마신다고 해갈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여하튼 모든 집중력을 모아도 시원찮을 판에 최고의 투어에 출전하는 프로가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네요.

-별들의 전쟁이라지만 놀랍게도 이 쉬운 1번 홀에 더블 보기를 기록한 선수가 한 명 더 있긴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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