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14화 (114/354)

114. 핀만 보고 쏜다.

“미스터 퍼펙트, 당신의 경기를 거의 다 봤습니다.”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의지와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가능하죠.”

“아! 그렇군요. 하지만 돈을 지급할 만큼 유익하지는 못했을 텐데, 괜히 저를 미안하게 만드시는군요.”

“무슨 그런 농담을……. 별일이 없는 한, 난 당신이 곧 최고의 자리에 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고마운 말씀이지만 골프 실력 말고도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재주까지 있으시군요.”

“선수끼리 왜 이러시나!! 머잖은 그때를 대비해 낯이나 익히려고 찾아왔습니다.”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편할 것 같았다.

필드의 신사로 불리는 그가 최근 그린 위에서 얼굴이 화끈할 기행을 펼쳐 구설에 오른 사실은 필상도 알고 있다.

오랜 침체기를 겪은 그가 작년 2월에 페블비치 프로암을 거머쥐었다. 무려 4년 7개월 만에 우승을 일군 그는 여전히 PGA 투어가 인정하는 최고의 프로골퍼다.

그런 선수가 직접 찾아와 부끄럽게 여겨질 정도로 극찬하자 담담함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확신이나 자신감과는 또 다른 기분 좋은 평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누군가를 이렇게 칭찬할 겸손한 성격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기에 대꾸할 말을 쉽게 찾지 못했다.

그 어색한 침묵을 깬 사람은 모모코였다.

“어머! 필 미켈슨! 맞죠?”

모모코의 등장, 그녀의 뒤에는 이보영 대표와 나이키 홍보이사 션 던컨도 함께였다.

그들도 필상이 미켈슨과 같이 앉아 있는 모습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사실 이제 처음 인사를 나눈 사이에 불과한데, 괜한 오해를 하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모모코를 확인한 미켈슨은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모모코도 익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모코? 퍼펙트 콩과의 결혼, 축하합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미스터 퍼펙트와 친해지고 싶어서요. 모모코, 당신의 터프한 스윙도 많이 봤습니다.”

“와아! 놀라운 일이네요!”

“저도 두 분을 만나 무척 기쁩니다. 하하하.”

“오빠, 둘이 친해진 거예요?”

다소 정신이 없는 와중에 느닷없이 모모코가 일본어로 물어왔지만 그는 알아들은 듯, 곧바로 대답을 가로챘다.

“물론입니다. 그렇죠? 미스터 퍼펙트.”

“하하하. 친해지게 돼서 저도 아주 기쁩니다. 필.”

일행들이 왔지만 미켈슨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모모코에 이어 이 대표에게 시선을 옮긴 그는 고개를 갸우뚱대더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전에 어디서 만난 적이 있죠?”

“네. 기억해 보세요. 필.”

“아! 라일리. 우리 애리조나 대학 동문 파티에서 만났죠?”

“기억력이 퍽도 좋으시네요.”

이 대표의 거침없는 말투, 사적인 관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미국에서 공부한 그녀는 일찌감치 골프계에 다양한 인맥을 쌓아놓은 게 분명해 보였다.

“션, 인사해요. 이 남자가 누군지는 아시죠?”

“어디서 많이 뵀던 분인데……. 하하하. 필, 저는 나이키에서 일하는 션 던컨이라고 합니다.”

“와우! 미스터 퍼펙트를 돈방석에 앉혀주신 그분이시군!”

“그 반대죠. 미스터 퍼펙트가 저희 회사에 얼마나 거대한 이익을 남겨 주는지, 그건 추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아! 아시아 시장에서는 이미 최고죠?”

“그렇습니다. 이제 곧 미국 골프계도 그로 인해 열광하게 될 겁니다.”

“그건 나도 동의! 하하하.”

졸지에 어수선해졌지만 필 미켈슨은 필상의 지인들은 물론 성호와도 화끈하게 통성명을 했다.

게다가 아까 필상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곧 PGA 최고의 자리에 오를 거라며 극구 비행기를 태웠다.

재미있는 것은 이 대표의 반응이었다.

“필. 컷 탈락이 없는 대회라고 너무 살판난 거 아닌가요?”

“라일리. 내가 그날 좀 취하긴 했어도 필드에 나오면 완전히 딴 사람이라고! 오늘 나 6언더 쳤잖아.”

“어젠 7오버를 쳐서 맨 바닥에서 놀던데요?”

“우우! 파티의 여신께서 제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셨네?”

“창피해서 그러죠. 동문이라는 게 창피해서.”

그날 취했다는 둥, 파티의 여신이라는 둥, 둘의 관계는 그저 안면이 있는 지인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최근 몇 년은 워낙 바빠서 미국에 자주 오지 못했을 뿐, 미켈슨과 대학 동문인 그녀는 일찌감치 스포츠 매니지먼트를 전공하며 다양한 인맥을 쌓았다.

본래 부유한 집안 출신이고 MBA를 공부해 가업에 참가하고 싶었으나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뒤늦게 다시 자신이 원하던 공부를 시작한 터였다.

학업과 더불어 세계적인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실무를 겸한 경력을 쌓으며 당시 주목 받는 프로 골퍼들과 안면을 텄다.

그중에서도 미켈슨은 대학 동문이어서 해프닝이 있었던 듯, 당시 훨씬 젊었던 이 대표의 외모는 눈에 띄게 출중해 어딜 가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만 가세요! 우리 할 얘기가 많은데.”

“으흐! 내 신세가 어떻게 이리 됐을까?”

반가워하는 분위기는 분명했지만 이 대표는 필상의 시간을 너무 뺏는 것이 미안했는지 미켈슨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천하의 미켈슨이 어디 가서 이런 푸대접을 받을까?

그런데도 마지못해 일어서는 그에게 필상은 호감 어린 말을 건넸다. 그와의 인연은 자신에게 아주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가 이룬 기록들은 같은 길을 가는 후배로서 존중해야 마땅하며 기회가 되면 함께 라운드도 해 보고 싶었다.

“필. 내일 티오프가 몇 시죠?”

“10시 20분. 아침에 같이 연습할까요?”

“네. 한 수 지도 받고 싶습니다.”

“지도는 내가 받아야지. 하하하.”

이 대표는 필상의 미국 진출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나이키와 서로 협조해 보다 파급력 높은 기획들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 얘기를 한참 듣는데 중요한 것은 아직 필상이 시드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두 사람은 아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시드도 확보하지 못했는데,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올해는 한국과 일본에 전력할 거잖아요.”

“그렇기는 하죠.”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되죠! 하지만 설사 우승하지 못해도 톱 10에만 들면 우리에게 필요한 출전권은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을 거예요.”

나이키의 영향력도 발휘될 테지만 PGA 사무국과는 달리 대회 주최 측은 흥행을 위해 필상의 출전이 꼭 필요하다.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어 그저 단순히 한 명의 초청 선수를 넘어서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간파한 이 대표는 한국, 일본 투어의 일정과 배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좋은 대회들을 물색해 출전 가능 여부를 타진할 구상이었다.

또한 미국에서 거둘 성적에 따라 부수입을 올릴 준비도 병행했다. 이전 계약에 아시아를 벗어난 지역에서 활동할 경우, 새로운 옵션을 넣은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시장 규모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서브 스폰서들이 나타날 것 같아요.”

“천천히 하시죠.”

“물론이죠. 모든 계약은 1년 단위로 아주 짧게. 불확실성에 거금을 아끼려다 큰 기회를 놓친 어느 회사처럼 속 꽤나 상하게 만들어 줘야죠.”

그 말을 던진 이 대표의 시선이 션 던컨에게 향했다.

“하하하. 왜 갑자기 저희를 끼워 넣고 그러십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션 이사는 씁쓸한 미소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5억 엔 정도였다면 2년 계약이 가능했다.

하지만 루키에게 너무 과한 거액을 안겨 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던 당사자가 바로 그였다. 매년 성적에 따라 옵션을 달았는데 이미 지불한 총액이 최초 제시액을 한참 넘어섰다.

“이 대표님. 대단한 것 같아요.”

회의를 마치고 호텔 방으로 돌아온 모모코는 뜬금없이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이보영 대표의 능력을 칭찬하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묘한 느낌이 들어 되물었다.

“뭐가?”

“보셨잖아요. 미켈슨 다루는 거.”

“둘이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잖아.”

“필은 모두가 알고 있는 굉장히 가족적인 이미지잖아요. 역시 남자는 알 수가 없는 건가?”

“그런 건 아닐 거야.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말라고!”

“어? 반응이 너무 과민한 거 같은데요?”

“하하. 이리 와.”

꿩 대신 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연지기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 필상은 아내와 뜨거운 정열을 불태우고 일찌감치 쉬기로 결정했다.

결혼하면 그녀를 향한 설렘이 반감될 줄 알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얼굴을 맞대고 있는 시간이 짧아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벌건 대낮에도 그녀만 보면 확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일어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남달리 좋아진 신체 능력 중에 감각이 더 활성화된 것은 여러 모로 도움이 되지만, 시시때때로 치솟는 강렬한 욕구는 과연 고마운 일인지 의문이 든다.

나이가 들어 원해도 의지를 따르지 않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감퇴되지 않는 매력을 지닌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 늘 고마울 따름이었다.

***

“일찍 나오셨네요?”

“아침잠이 많은 편인데, 이상하게 눈이 일찍 떠지더군.”

“피곤하지는 않으시죠?”

“물론. 내가 체력 하나는 타고났잖은가! 하하하.”

믿기지 않았다.

천하의 필 미켈슨과 나란히 서서 연습을 하다니!

재미있는 것은 그가 왼손잡이라서 마주 보고 샷을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상대의 스윙을 보다 상세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숏 게임은 세계 제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필상의 스윙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내가 원래 오른손잡이라는 거 아나?”

“네. 관련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이렇게 마주 보며 배우다가 왼손으로 치게 되셨다고요.”

“응. 난 어릴 때도 골프가 너무 재미있더라고.”

그의 부친은 비행기 조종사여서 일정이 여유로울 때는 아들과 함께 연습도 하고 라운드도 즐겼다고 한다.

또한 집 뒷마당에 연습을 위한 넓은 공간을 만들어 아들이 좋아하는 골프를 마음껏 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야말로 꿈같은 환경에서 골프를 즐기며 배운 것이다.

필상으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일이었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찾을 수 있었다. 골프를 무척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

“와아! 정말 부드럽군!”

“필. 당신 샷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하지. 난 지금 자네 스윙을 따라 하는 거거든.”

“왜요? 당신의 스윙은 장점이 많잖아요. 리드미컬하고 시원시원한 풀스윙을 따라 하는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 데요!”

“자네는 아니잖아.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지.”

“뭔가요?”

“나 1970년생이잖아. 3달 후면 50살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필의 스윙은 한마디로 ‘핀을 보고 쏘는 샷’이다.

2010년 마스터즈 우승 후에 밝힌 그의 소감 중에 그의 골프 철학이 담긴 구절이 있다.

[위대한 샷은 위험을 무릅쓸 때만 나온다. 현명한 샷은 그런 위대한 샷을 시험할 배짱이 없을 때나 쓰는 샷이다.]

매우 공격적이며 물러설 줄 모른다.

항상 있는 힘껏 치기 때문에 그의 샷은 트러블 상황에 자주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창조적인 샷은 필수불가결했던 것이다.

때로는 엉망인 결과도 나왔지만 탄성이 터질 환상적인 샷도 많았고 그것이 쌓여 그를 전설적인 선수로 올려놓았다.

하지만 지금 고백하는 바, 과거처럼 강한 스윙을 고집하는 것이 중과부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직 힘이 부족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다고 믿지. 하지만 힘은 될지 몰라도 그게 경기 내내 유지되지는 못하더라고. 인정하기 싫지만 이전 같지가 않아.”

“체력이 받쳐 주지를 못하는 거군요.”

“정답!”

아까 체력 하나는 타고났다고 말했던 것이 결국은 반어법이었던 것이다. 쉰에 이른 그가 느끼는 체력적 한계에 대해서는 감히 추론하기 어려웠다.

직접 겪어 보지 못한 것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 실례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을 확인한 필상은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닥칠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연습을 이어 갔는데, 미켈슨은 필상의 스윙을 계속 흉내 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가 왜 자신의 샷을 흉내 내는지.

“보다 정확한 임팩트를 만들기 위한 스윙 메커니즘을 찾고 있는 거군요.”

“자넨 골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던데, 정말 공부를 많이 했나 봐.”

“열심히 하기는 했죠.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 제 샷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미켈슨은 연습을 멈추고 우뚝 멈춰 섰다.

뒤늦게 골프를 시작한 필상에게는 아주 당연한 접근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스윙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완전히 몸에 익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온 그에게는 마음에 와닿은 말이었다.

생각이 많은 것이 오히려 스윙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몸이 기억하는 대로 휘두르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자신의 스윙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는 그런 사고방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방식으로 그가 이룬 결과가 너무도 거대하기 때문에.

“컨트롤 샷! 그걸 배우려고.”

“이미 숏 게임에서는 잘하고 있잖아요.”

“물론이지. 숏 게임은 되는데, 아이언이나 우드는 그게 안 되더라고!”

깜짝 놀랄 말이다.

물론 그가 컨트롤 샷을 전혀 못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40년 넘게 골프를 친 그가 상황에 따른 컨트롤을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다만 필상처럼 실전에서 다양한 컨트롤 샷을 구사하는 것보다 풀스윙을 하는 것이 더 편했고 나은 결과를 낳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런 선택을 해 왔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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