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레프티
“더 이상 정확할 수가 있을까요?”
“그럼! 난 2m에 붙이기를 원했거든.”
“에이!”
너무도 간결하고 부드러웠던 필상의 티샷은 원하는 지점에 떨어졌다. 전체적인 그린의 경사가 바가지를 엎어 놓은 꼴이지만 유일하게 편안한 라이는 우측에서 공략하는 것이었다.
3.5m가 만족스럽지 않다지만 199야드 티샷을 더 이상 붙일 능력이라면 홀인원인들 불가능했을까?
어제는 7명에게 허락되었던 버디가 오늘은 필상을 제외하면 단 1명뿐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날이 얼마나 추억에 남길 하루였는지 자축이라도 했을 것이다.
“이러다 새로운 최저타 기록이라도 세우는 거 아닐까요?”
“헛소리!”
“네?”
“핸디캡 몰라? 6번 홀을 제외하면 지키는 게 최선이야!”
“아! 아무리 그래도…….”
“선수가 흥분하면 자제시키는 게 네 역할이야. 그런데 먼저 흥분해? 앞뒤 재지도 않고?”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대화 내용처럼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3개 홀에서 4타를 줄인 환상의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필상은 4번 홀에 들어서는 순간, 왠지 굉장히 찜찜했다.
미신이라 여겨도 무방하지만 그런 느낌이 왔을 때, 무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진즉에 깨달았다.
-어허! 왜 잘라 가는 거죠? 충분히 공략 가능하지 않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핸디캡이 높은 홀들은 아직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늘 같은 컨디션이라면 보다 공격적인 공략도 가능할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필상의 속을 알지 못한 중계진은 안전한 공략을 이어 가는 필상을 계속 독려했다. 오늘같이 샷이 좋은 날은 무얼 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4번 홀부터 5번 홀까지는 최악의 세팅이었다.
-애런 라이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치더라도 쉐인 로리까지 저렇게 무너지는 것은 좀 이상하군요.
-아부다비 챔피언십 우승자입니다. 투어 10년 차이고 유러피언투어 4승을 거둔 관록을 지닌 로리가 4, 5번 홀에서 4타나 잃은 것을 보면 공 프로의 선택은 현명한 것이었습니다.
-나란히 동반자들이 무너지는 가운데 타수를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훌륭했다고 봐야 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진군 앞으로!’를 외쳤으니,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다음 홀도 어려울까요? 파5 홀이잖습니까?
-2온이 불가능한 구조라서 핀을 어디에 꽂았는지에 따라 결과도 달라질 겁니다. 어허! 쉽지 않겠는데요!
무려 625야드의 롱 홀이다.
그린 앞에 좌우로 커다란 호수가 있어서 2온을 노리려면 티샷을 400야드 가까이 날려야 한다는 건데, 불가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그린이 마치 아일랜드 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고 오늘 핀의 위치가 물에 가까운 좌측에 치우쳐 그나마 서드 샷을 붙이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아너인 필상은 차분하게 페어웨이를 공략했지만 이전 2홀에서 왕창 깨진 애런과 쉐인은 강력한 티샷을 구사했다.
반드시 타수를 줄여야겠다는 조바심은 그들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갔다. 로리는 그나마 레이 업을 해서 3온이라도 노릴 수 있었지만 나무를 뚫겠다고 무리한 시도를 했던 애런은 도리어 공이 뒤로 튀어 언플레이어블을 선언하고 구제를 받아야만 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거죠?”
“아웃코스 내내.”
“핀 위치만 보고 어떻게 위험하다는 걸 안 거죠?”
“핀만 보는 게 아니야. 티의 위치와 방향, 그리고 지상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바람도 살펴봐야지.”
“티 그라운드는 이해가 되지만 공중에 올라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바람을 알죠?”
“나무를 봐.”
다소 궁색했지만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
사람의 키는 아무리 커도 2m를 넘지 못하지만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들은 얼마든지 있다. 위치만 적당하다면 대충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를 파악할 수 있다.
알고 보면 그건 프로로서 기본적인 훈련 내용이기도 하다.
‘아니야. 뭔가 더 있어!’
성호는 일단 받아들였다.
필상의 캐디를 하다 보면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가끔 생긴다. 처음에는 강한 의지의 발로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자꾸 겪으면서 무감각해지기는 했으나 최근의 변화는 때때로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아직 공개하지 않았지만 쓰리쿼터 스윙만 가능하던 페널티를 극복한 것, 밤새 정좌하고 도를 닦는 듯 앉아 있은 뒤에는 어김없이 최상의 컨디션을 회복하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잠을 잔 것이 아니라면 다음 날 지치고 힘들어야 하는데, 육신을 지닌 인간의 통상적인 사고를 벗어나는 현상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점쟁이처럼 위험한 홀을 감지하고 그걸 피해 갔다. 동반자들이 우수수 무너지는 가운데 파 행진만으로도 타수 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첫 3개 홀에서 4타를 줄인 것이 신의 한 수였네요!
-4, 5, 7, 8, 9번 홀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웬만한 선수들은 다 버디를 노리고 달려듭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해낼 기량도 갖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말해 주는 것 아닌가요?
-그렇죠! 전반을 마친 선수들의 기록을 살펴봤더니 언더파는 단 2명뿐이더군요. 이 정도면 굉장히 까다롭다는 것인데, 우리 공 프로는 신기(神氣)까지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에 비해 인코스는 성적이 괜찮네요. 우리 공 프로도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10번 홀에 들어선 필상은 숨겨 둔 비수를 꺼내 들었다. 451야드의 파4는 그다지 긴 홀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일직선으로 쭉 뻗은 홀이고, 320야드를 넘기면 벙커로부터 해방되고 페어웨이도 넓기 때문이다.
때문에 필상은 오랜만에 80%의 힘을 썼다.
자연스럽게 백스윙이 200도가량 넘어갔는데 다들 눈치채지 못했으나 단 한 사람, 그는 중계하다 말고 벌떡 일어섰다.
-오버! 오버했습니다.
-오버 스윙을 했다고요? 에이, 쓰리쿼터 스윙의 대명사인 공 프로의 티샷이었습니다. 너무 빨라 잠시 착시가 일어난 것이겠죠!
안타깝게도 필상의 티샷 스윙은 리플레이되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 나간 타구의 궤적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뒤에서 바라본 궤적에 파란 선을 그어 최고 높이도 함께 보여 줬는데, 휨이 전혀 없는 완벽한 직선은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탄도가 좀 높다 싶던 타구가 예상보다 훨씬 긴 비거리를 기록하자 중계진도 얼른 티샷 장면을 다시 보여 줬다.
그리고 마침내 필상의 스윙이 쓰리쿼터가 아님을 확인했다.
-저 보십시오! 돌아갔죠?
-오! 정말 위가 아닌 뒤로 넘어갔네요! 그래서 저런 엄청난 비거리가 나온 건가요?
-그렇습니다. 342야드, 어디에 내놔도 부족하지 않은 거리죠. 이미 수차례 장타를 보여 준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달리 정상적인 풀스윙에 가까워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문가인 허 위원의 생각과 달리 아쉬워하는 이들도 많았다. 필상의 간결한 스윙은 최근 아마추어들에게 빅히트였다.
쓰리쿼터 스윙을 해 보면 하프스윙처럼 느껴져 강한 임팩트를 만들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연습이 되면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거리의 손실은 있지만 샷의 일관성이 몰라보게 향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 프로 따라 하기’를 지속하다 보면 쓰리쿼터 스윙에도 필요한 만큼의 힘을 실을 수 있다.
그로 인해 골프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뜬 이들도 꽤 많다. 그런 팬들에게는 필상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간결한 스윙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110야드 남았네요.”
“너무 무리했나? 하하하.”
필상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이미 충분히 연습했지만 실전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실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난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스윙이 커지면 확연하게 내력의 손실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풀스윙도 아니고 완전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후 꾸준히 수련하면 언젠가는 극복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60도 웨지.”
“노 바운드?”
“그래. 핀을 때려 버릴 거다!”
“좋습니다! 하하하.”
핀을 맞춘다는 각오로 친다는 말인데, 결과는 장담한 대로 이뤄졌다. 까마득히 치솟았던 타구는 거의 자유낙하를 하며 핀에 매달린 깃발을 맞춰 버렸다.
“으으으……. 깜짝 놀랐습니다. 깃대에 맞았더라면 그린 밖까지 튀어 나왔을 것 같아요.”
“그니까!”
깃발에 맞은 공은 1m도 되지 않는 거리에 떨어졌고 필상은 동반자들의 플레이를 기다렸다가 버디로 마무리했다.
필상의 기세는 그 홀부터 폭풍처럼 인코스를 휩쓸기 시작했다. 14번 홀 티 박스에 올라서기 전까지 연속 4개 홀을 버디로 장식하며 단숨에 -11까지 치고 올라선 것이다.
어느새 1타 차 공동 3위였다.
그러나 14번 홀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경쟁자들이 2타 차로 벌리며 달아나나 싶었는데, 필상은 15, 16번 홀에서 재차 버디를 잡아냈다.
파3, 17번 홀에서는 3.5m 버디 퍼팅을 아쉽게 놓쳤다.
-저게 들어갔으면 단독 1위가 되는 건데, 정말 아쉽네요!
-공동 1위입니다. 크게 아쉬울 게 없는 성적입니다. 오후 들어 바람이 강해지기 때문에 아직 여러 홀이 남은 선두권이 오히려 타수를 잃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렇군요. 하기야 오늘 우리 공 프로가 무려 10타를 줄였는데, 불평불만을 터트리면 안 되겠지요.
-저는 불꽃 샷을 찾았다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본인은 겸손하게도 컷 탈락만 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평소의 기량만 되찾아도 우승 경쟁은 당연합니다.
-어제 하루 난조를 보였던 샷이 오늘은 잘 벼린 칼이 되어 자신을 향한 악평들을 싹뚝싹뚝 잘라 버렸으면 좋겠네요.
허 위원의 예상대로 필상이 경기를 마친 뒤, 바람이 한결 강해졌다. 하지만 선두인 저스틴 토마스는 타수를 잃기는커녕 필상을 3위로 밀어냈다.
어제 -7을 치며 단독 선두에 나섰던 토마스가 오늘도 8타를 줄여 -15까지 올라섰고 세계 랭킹 6위인 매킬로이가 -9를 치며 필상까지 제키고 -14에 올라섰던 것이다.
“토마스가 세계 3위죠?”
“응. 아직 젊고 승수도 적지만 언제나 꾸준한 선수지.”
“그래도 우승 경쟁자로는 매킬로이가 더 부담스러운 것 같아요. 한 번 분위기를 타면 정말 무서운 선수잖아요.”
“내일 나랑 붙었어야 하는데!”
“몰리나리는 괜찮을까요?”
“아마도.”
18번 홀을 파로 마무리한 필상이 클럽하우스로 이동하자 사뭇 어제와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한국 팬들의 응원도 뜨거웠지만 멕시코 팬들, 그리고 대회 관계자나 자원봉사자들도 필상에게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선 실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 흐뭇했다. 그런데도 그날 저녁 확인한 언론의 논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대놓고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하루 반짝이다 말 것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뤘고 긍정적인 기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빠한테 악담을 늘어놓은 사람 있잖아요.”
“응. 빌리 패트릭. 왜?”
“준우승만 13번 했대요. 우승은 1번뿐이고.”
“실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네. 하지만 이혼을 4번이나 한 그런 사람을 왜 전문가랍시고 해설위원으로 앉혔는지 그게 의문이지. 하하하.”
“오빠도 봤어요?”
“응. 언젠가 한 번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확 패 주지 않고 인사한다고요?”
“노이즈 마케팅도 마케팅이니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렇게 받아넘겼다.
모모코가 흉을 본다고 자신까지 맞장구를 치는 그림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필상은 어제처럼 자연 휴양림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대표가 여길 온다고?”
“네. 나이키 홍보이사라는 분이랑 같이 온다던데요?”
“션 던컨이 뭐 하러?”
“응원하려고 오는 거 아닐까요?”
고마운 일이지만 그로 인해 연습장에 붙들려 있는 것은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이라도 봐야 했기에 하는 수 없이 기다리는 동안 연습을 했다.
그런데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미스터 퍼펙트?”
“어? 레프티!”
“다행입니다. 저를 알아봐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골퍼도 있습니까? 필.”
“괜찮으면 물이나 한 잔 얻어 마실까요?”
“하하. 제게 마침 좋은 차가 있습니다. 성호야 뭐해?”
‘골프 역사상 최고의 2인자.’
‘숏 게임의 마법사.’
‘트러블 샷의 황제.’
‘미친 쇼맨십의 왼손잡이 골퍼.’
그를 지칭하는 표현은 수없이 많다.
필상을 일부러 찾아온 선수는 바로 필 미켈슨이었다.
1993년부터 26년 동안 꾸준히 세계 랭킹 50위 안에 있었던 그는 PGA 44승을 거뒀고 WGC 2승, EPGA 2승을 포함해 통산 52승을 거둔 현대 골프의 산증인이자 최강자다.
그런 세계적인 스타 골퍼가 구석 자리에 처박혀 연습하고 있는 초청 선수를 찾아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지나다 물을 얻어먹으러 왔다는 그에게 필상은 한국에서 가져와 끓인 뒤 늘 보온병에 넣고 다니는 차를 대접했다.
“이거 맛이 참 좋군요. 처음 맛보는 건데 무슨 차죠?”
“보리차라는 겁니다.”
“보리차? 아주 비싼 차인가 봅니다.”
“물론 비싸죠. 하하하.”
흔히 마시는 차지만 가격을 매길 수 없이 비싼 이유는 엄마가 직접 말려 보리차와 둥글래차를 챙겨 주시기 때문이다.
뜨거운 보리차를 호호 불며 마시는 동안 미켈슨의 시선은 필상을 꼼꼼하게 훑었다. 실례인 것을 모르지 않을 그가 웬일인가 싶은 순간, 의문을 풀어 줄 언급이 흘러나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