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12화 (112/354)

112. 미스터 퍼펙트

-오늘은 날씨가 꽤나 화창하죠?

-좋은 날씨처럼 우리 공 프로가 오늘은 제발 시원한 플레이를 펼쳐 주기를 기대합니다.

-사실 어제도 그렇게 못 쳤던 것은 아니지 않나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를 향한 기대와 응원을 생각하면 좀 아쉬웠습니다. 그게 부담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는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강한 집념의 소유자가 바로 우리 공 프로 아니겠습니까!

-아! 공필상 프로가 드디어 1번 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PGA 정회원이 아닌데도 상당히 많은 카메라의 조명을 받는 걸 보면 확실히 PGA도 주목하고 있다고 봐야겠죠?

-이를 말입니까! 어제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우리 공 프로의 악담을 늘어놓았던 언론들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불굴의 의지를 불태워 주기를 바라 마지 않는 겁니다.

늘 차분하고 안정적인 해설로 유명한 허 해설이 단단히 뿔이 난 것 같았다. 방송에서 입에 담기 거북한 표현을 쓰면서도 그의 표정은 단호했으며 속마음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TV를 시청하는 국내 골프팬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곧장 실시간 댓글들이 우수수 달리는데, 어제 필상의 기권을 언급한 빌리는 추후 한국에는 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신상이 용감한 한국의 젊은 팬들에 의해 산산이 분해되었으며 별 볼 일 없었던 프로 시절의 기록까지 낱낱이 들춰내며 맞대응했다.

초청 선수가 우승할 확률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악의적인 비판과 사생활까지 언급한 것을 지나치다고 동조하는 외국인 팬들도 많았다.

“오빠. 파이팅!”

1번 홀로 들어서는 필상에게 모모코의 응원 소리가 들렸다.

이제 결혼해 어엿한 아내인 것은 알려졌지만 선수가 아닌 이상 갤러리들 사이에서 응원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수척한 얼굴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필상이 자리를 비운 밤새 잠을 제대로 청했을 리 만무했다.

때문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정당하지 못한 평가들이 더욱 서운했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승리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되새겼다.

“드라이브!”

“여기요.”

1번 홀은 파4지만 318야드에 불과하다.

직선 코스지만 우측에서 뻗어 나온 나무들이 그린을 가리고 있어 핀을 바로 공략하는 것은 굉장히 까다롭다.

거리는 상관없지만 타구가 하강하는 궤적이 나뭇가지에 걸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어 차라리 우드를 잡고 60야드 안팎을 어프로치로 공략해도 버디를 잡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어제 필상은 안전하게 잘라 가고도 버디를 잡지 못했다. 묘한 불안감에 손쉬운 55야드 웨지 샷을 핀에 붙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깡!

특별히 강하게 때린다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티를 조금 높게 꽂은 타구는 혹시 미스 샷이 나온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높이 치솟았다.

-아예 탄도를 높여 새로운 궤적을 만들었습니다!

-나무를 완전히 넘기려는 거군요. 하지만 그러려면 330야드, 아니 그 이상의 비거리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지난 시즌 드라이브 평균비거리 286야드에 불과했던 공 프로가 너무 무리한 공략을 하는 게 아닌지 걱정되십니까?

-네! 괜히 짧아서…….

짧아서 타구가 나무 사이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느냐고 말하려던 캐스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첫 홀부터 입방정을 떠는 것이 팬들에게 좋게 비칠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방송 사고라도 난 것처럼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내 필상의 티샷이 하강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침묵의 덫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넘겼습니다! 하하하. 넘겼어요!

-에지! 오케이! 그린 프린지에 떨어졌습니다.

아무래도 드라이버 샷이라서 떨어진 타구의 런은 어쩔 수 없다. 혹시 그린에 바로 떨어지면 공은 오버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탄도가 높았던 탓에 그린 앞의 러프에 떨어져도 애매했다. 살짝 오르막이라서 온 그린이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허 해설이 최적의 랜딩 지점으로 잡은 곳이 바로 그린 앞쪽 프린지였다. 그린보다는 푹신하고 잔디도 길어 그린을 오버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고!”

좀처럼 티 그라운드에서 강한 모션을 취하지 않던 필상도 이번에는 강렬한 외침을 터트렸다. 그리고 마법에 걸린 것처럼 타구는 크게 한 번 튀어 핀 방향으로 향했다.

-우우우! 사람 간 떨어질 뻔했네요!

-붙었습니다. 조금 오버했지만 4m 퍼팅은 얼마든지 넣을 수 있죠. 다름 아닌 미스터 퍼펙트 아닙니까!

-저 지점에서는 라이가 어떤가요?

-좌측에서 우측으로 휘는 슬라이스 경사입니다. 전체적으로 내리막에 오르막, 쉽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비거리가 짧은 대신, 그린에 장난을 많이 쳐 놨군요!

얼마든지 넣을 수 있다고 해서 편한 라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퍼팅을 잘하는 선수들도 부담을 가질 경사였다.

보통 좌측으로 흐르는 경사보다 우측을 어려워하고 출발이 내리막일 경우, 힘 조절이 중요해 움츠러든다. 그런데도 허 해설은 필상의 퍼팅 실력에 전적인 신뢰를 보냈다.

-이글을 잡으며 확실하게 기세를 올렸으면 좋겠습니다!

-워낙 침착하고 날카로운 선수니까요.

허 해설은 상당히 흥분했다. 아니, 서러움을 토로했다.

한국 남자 골프가 드디어 세계를 향해 새로운 발돋움을 시작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는데, 미국을 비롯한 서방 언론들이 지나치게 편파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저변에는 필상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심리가 작용한 것 같았다. 여자 골프가 한국 낭자들에게 장악된 상황에서 남자마저 치고 올라오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역으로 추산해 보면 그만큼 필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좋게 해석하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필상이 1라운드에서 고전하자 울분을 참기 어려웠다.

보다 일찍 자신과 같은 선배들이 탄탄한 길을 닦아 놓지 못한 탓이라는 자책감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스윽!

퍼팅은 때리는 것이 아니다.

간혹 관리되지 않은 퍼블릭 코스를 가면 상황에 따라 스윙하듯이 공을 때려야 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최고의 무대인 PGA, 그것도 메이저 대회에 버금가는 WGC가 주관하는 대회의 그린은 빙판처럼 딱딱하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지만 내리막 경사에서 한 번 혼쭐이 나면 유리알 그린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번 대회도 그린 스피드는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어 집중력이 떨어지면 퍼팅으로 인해 게임을 망칠 수도 있다. 특히나 투어마다 그린 스피드는 그들이 제공하는 수치와는 또 다른 차이가 있어 경험이 적은 선수들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필상의 스트로크는 완벽했다.

조르르 굴러 내려간 공이 탄력을 받아 오르막을 기어 올라가는데 필상이 그려 놓은 이미지 라이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텅!

그럴 리 없지만 공은 마지막에 잠시 고심하는 것 같았다. 들어갈지 말지 마치 스스로 고뇌하듯이 멈췄다가 이내 청명한 소리를 사방에 퍼뜨렸다.

“와아아아! 이글! 이글!”

“미스터 퍼펙트! 퍼펙트!”

콩이라는 발음과 의미가 좋지 못하다는 팬들의 여론은 각종 포털을 휘돌아다니다 결국 새로운 이름으로 탈바꿈했다.

‘미스터 퍼펙트!’

부르기도 듣기도 한결 나은 그 닉네임은 어느새 팬들의 입에도 전염되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누군가 극적인 순간에 한번 외치면 그 메아리는 자연스럽게 팬들의 인식에 꽂히며 멀리 퍼져 나갔다.

멕시코에도 한인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다들 먹고 사는 것이 바쁘고 골프를 즐길 만한 처지에 있는 동포들도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서 어제는 한국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하지만 필상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오늘은 달랐다. 바쁜 일정을 쪼개 응원하러 몰려나온 한국인들이 응원 피켓을 들고 사방을 휘감았다.

그들이 주도하는 응원은 억세고 강렬했다.

“나이스 터치!”

“살짝 약해서 불안했어.”

“그런 느낌이 적당한 거 같아요. 홀을 지나가게 치려다 정말로 넘어가 버린다니까요.”

“그래!”

단숨에 2타를 줄여 -5가 된 필상은 387야드 파4인 2번 홀에서도 화려한 테크닉을 보여 줬다.

215야드 지점에 실수로 뽑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툭 튀어나온 나무를 지나면 우측으로 급격하게 휘는 도그렉 홀이다.

대략 30도 가량 휘는데, 만만한 각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넘기면 넘겼지, 그 나무 때문에 잘라 가는 선수는 없다.

문제는 처음부터 우측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대다수의 프로들이 드로우 샷을 구사하는데, 그게 원하는 만큼 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막창!’

소위 그렇게 부르는 정면 나무숲으로 타구가 들어갈 경우, 워낙 나무가 빽빽해 레이업도 만만치가 않다.

게다가 바로 우측을 보고 쏘면 최소한 캐리가 320야드를 넘어야 한다는 점도 부담이다. 그런데도 평균 타수가 3.83이 나오는 걸 보면 PGA 선수들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그냥 거리만 많이 나가는 선수들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쟁쟁한 선수들이 날린 멋진 샷을 능가하는 아주 기가 막힌 티샷이 나왔다.

공이 출발해 뻗어 나갈 때까지만 해도 막창이 날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무려 200야드를 넘는 시점부터 갑자기 타구가 페이드를 먹기 시작했다.

-와아! 페이드였습니다. 페이드!

-타구에 실린 힘이 워낙 강해 일단은 회전이 먹을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날아간 뒤에 힘이 빠진 공이 공기의 저항을 만나면서 급기야 회전이 살아난 겁니다.

-평범한 아마추어들의 페이드 샷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군요. 우린 바나나처럼 휘잖아요.

-우리라니요?

-아이고! 제 친구들 말이죠. 하하하.

-중요한 것은 휜 각도입니다. 정확하게 홀의 모양을 따라서 돌아간 공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그걸 봐야 합니다.

-페어웨이 정중앙, 정말 딱 한복판이네요!

바로 그거였다.

325야드를 날리면서도 다음 샷을 위한 완벽한 지점에 갖다 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대다수의 선수들이 그걸 목표로 페이드 샷을 구사하지만 필상처럼 완벽한 궤적을 그리는 것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더욱이 64야드 남은 세컨샷을 가장 퍼팅하기 쉬운 오르막 1.5m에 붙여 가볍게 버디를 잡은 모습은 그야말로 퍼펙트 그 자체였다.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이동한 3번 홀은 199야드의 파3다.

어제 단 7명에게만 버디를 허락했고 12명의 선수에게는 보기 이하의 악몽을 선사한 핸디캡 8번이었다.

“굴다리가 따로 없네요.”

“굴다리? 지붕 없는 터널이지.”

“스트레이트 구질을 칠 수 있냐고 묻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내 장점이지. 크크크.”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나무는 10m인 그린의 폭과 일치한다. 하지만 문제는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불규칙하게 시야를 가로 막아 정면으로 보이는 하늘의 폭은 5m도 되지 않는다.

상당한 위압감을 선사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시각적인 착시일 뿐이다. 통상 아이언을 잡아 때린 공은 나뭇가지들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궤적을 따라 날아가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부담을 버릴 수 있다면 투어프로의 경우 그린을 공략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6번 아이언.”

“확 구겨 넣어 버리세요!”

“노! 집어넣으려고 덤비면 그린을 오버할 거야.”

“원 바운드 처리하면 되잖아요.”

“저 딱딱하고 내리막까지 있는 그린에 원 바운드? 니가 쳐 볼래?”

“아, 알았어요.”

필상이라고 왜 욕심이 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홀인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욕심이 낳은 괴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샷도 좋아야 하지만 운도 따라 줘야 하는데, 그 희박한 확률을 상정하고 길게 날리다 실패하면 버디는 물 건너간다.

그린 뒤의 벙커에서 핀에 붙일 확률보다 티 그라운드에서 온 그린의 확률이 더 높다면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두 홀에서 3타를 줄인 기세까지 꺾일 게 분명했다.

쉭!

더 이상 간결할 수 없는 스윙이었다.

힘을 모으기 위해 잔뜩 움츠리지도 않았고 강한 임팩트를 만들려고 애써 힘찬 다운 블로우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냥 부드럽게 클럽을 들어 올려 정확하게 맞춘다는 느낌으로 휘둘렀다. 그렇게 때려서 과연 200야드를 나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타구는 까마득히 치솟았다.

-부럽습니다!

-뭐가 부러운 거죠?

-저렇게 편안하게 때릴 수 있는 여유!

-허 위원님도 투어 시절에 한 아이언 하지 않으셨나요?

-부끄럽습니다. 저는 공 프로처럼 저렇게 마음을 비우고 치지 못했습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공을 노려봤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그게 저의 신조였습니다.

어찌 보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골프에 인생을 건 프로라면 당연히 매 샷마다 모든 정신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게 왜 잘못이란 말인가?

하지만 허 위원의 고백에는 잘 새겨 볼 내용이 담겨 있다. 악착같이 공을 노려본다고 그 공이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공은 클럽헤드가 어떤 방향과 각도로 힘이 작용하는지 그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부정할 수 없는 과학인 것이다.

의도한 샷을 만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스윙을 할 경우, 과연 편안하게 컨트롤을 한 스윙보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그건 어느 정도 경험이 축적된 아마추어들도 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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