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콘깬 전지훈련
“제 후원사인 나이키가 한국 골프를 위해 큰 공헌을 할 것 같습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혹시 나이키가 KPGA 투어 대회를 개최라도 한다는 말씀인가요?
“아직 확정되지 않은 걸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KPGA를 위해 거대한 투자를 결정한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모든 골프팬들이 인정하고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후원사를 구하지 못해 절치부심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나이키와 같은 시장의 큰손이 나선 것은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지요. 그게 사실이라면 여기 있는 모두가 환영할 일입니다.
기자들도 인지하고 있다.
여자 투어는 날로 성장해 시즌 상금 규모 300억에 이르는 튼실한 투어로 발전해 이젠 LPGA와 자존심 싸움까지 벌인다.
하지만 남자 투어는 날로 위축이 될 뿐만 아니라 후원사를 구하지 못해 몇 개 되지 않는 대회도 줄어들 판이었다.
그러던 차에 필상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남자 골프의 바람을 일으켰지만 생각만큼 상황이 호전된 것은 아니다.
필상이 일본을 주 활동 무대로 잡았고 곧 미국 진출을 할 것 같아 국내 투어의 상황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유러피언투어까지 우승한 필상이 국내 대회 출전을 약속함과 동시에 거대 기업이 주최하는 대회까지 언급하면서 분위기는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재미를 더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경기를 펼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믹스트 포섬 같은 남녀 혼성 게임이라든지 베스트 볼 게임 같은 방식은 아주 재미있거든요.”
-아! 그럼 이벤트성 대회인가요?
“구체적인 일정은 후원사, 협회와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스트로크나 매치플레이만이 골프의 모든 것은 아니죠. 아마추어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골프의 다양한 방식이 적용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키가 아주 대단한 결정을 한 것 같아 골프인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도 신이 납니다. 부디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모두가 나설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자님과 같은 분이 계셔서 저도 아주 기쁘네요. 한국 남자 골프의 중흥기가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하하.”
골프에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은 KPGA의 성장을 바란다.
너무도 당연한 입장이지만 한국 남자 골프는 발전과 성장 가능성이 늘 상존하면서도 이상하게 잘 크지 못했다.
그걸 모두 선수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협회를 비롯해 관련 종사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밀어붙여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뼈아픈 실패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찾은 이즈음, 다시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개인의 희생을 밑바탕으로 삼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어렵게 찾아온 기회라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필상이 관련된 언급을 하자 다들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저 혼자 너무 멀리 나간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여간 대단했어요.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 놨으니 쉽게 도망치지는 못할 거예요.”
“제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감수하겠습니다. 그러니 좋은 결론을 이끌어 내 주세요. 일본 대회는 납득할 수 있지만 아시안 투어 몫은 우리가 가져오는 거로!”
“의논해 볼 게요.”
3개 투어에 하나씩 3개의 시리즈를 만들면 모양새가 좋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LPGA의 좋지 못한 사정을 모를 때나 가능한 판이다.
일본 투어에서의 흥행은 보장되지만 아시안 투어의 몫을 KPGA로 끌고 오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나설 부분이라고 판단했다.
***
모두들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지만 정작 필상은 전지훈련을 위해 방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모모코와 동행하고 싶지만 그녀는 훈련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 워낙 적극적인 성격이라 이것저것 직접 챙기느라고 필상이 떠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필상의 그녀에게 제발 차분하게 공부하라고 권했다. 한국 생활에서 잘 적응하려면 일단 언어부터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이 대표가 나서 좋은 과외 선생님까지 붙여 줬다.
“휴가를 줘야 하는데 또 불러내 미안해.”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바늘이 가는데 실이 가는 건 당연하죠. 게다가 파사 타이(태국어)는 제가 한 수 위잖아요.”
“그래?”
“두고 보십시오. 제가 다 평정할 테니까!”
무슨 말인가 했더니 성호의 태국 말은 특정 분야에 편중되어 있었다. 능숙하기는 한데 주로 야한 농담이었다.
한국이라면 추행에 해당될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고 그걸 잘 받아 주는 태국 여인들의 광경은 때로 당황스러웠다.
총각인 성호에게는 태국이야말로 천국처럼 보였다. 결혼을 앞둔 필상에게는 아쉬운 점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5주의 전지훈련 기간 동안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치앙마이가 좋은데…….”
“형이 무명일 때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젠 아무데나 갈 수 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래.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이 없지.”
방콕에서 국내선을 갈아타고 향한 곳은 태국 중북부 거점 도시인 콘캔이었다. 도시 규모는 상당히 크지만 아직 관광객의 유입은 적어 조용하고 한적한 환경에서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단쿤 골프 클럽, 썩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18홀 규모의 골프 코스와 아담한 드라이빙 레인지는 필상이 새로운 무기를 장착할 거점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필상과 성호는 맹훈련에 돌입했다.
“324야드요. 방향성은 아주 좋아요.”
“이제는 300야드를 기본으로 깔 수 있겠어.”
“으하하하. 320야드도 괜찮지 않나요?”
“아니야. 파4 기준으로 300야드만 날리면 대부분 아이언으로 설거지가 되니까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지.”
“500야드에 근접하는 홀들도 많아요.”
“그런 경우는 대부분 내리막이야. 전체적으로 전장이 길어진 것은 맞지만 때로 정교한 티샷이 요구되는 홀, 그걸 더 중점적으로 대비하는 게 맞아.”
“하기야 340야드까지는 방향성이 좋아서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것 같아요.”
“그럼 오후에는 싱팍에 나가볼까?”
“싱하 파크 좋죠. 저도 오늘은 같이 라운드할 겁니다. 핸디 몇 홀 주실래요?”
“에이, 자존심도 없는 자식!”
18홀 매치플레이에 6개 홀을 잡아 주는 것은 무리다.
성호도 당장 투어를 뛰어도 될 만큼 날카로운 실력을 갖췄다. 하지만 2개 홀부터 시작한 핸디는 거듭된 승리로 어느새 6홀까지 늘어났다.
6타가 아니라 6개 홀을 잡아 주고 홀 매치를 펼치기 때문에 인정사정 봐줄 틈은 없었다.
주류 회사인 싱하는 콘캔에 아주 훌륭한 코스를 보유하고 있었고 연습한 내용을 검증하기에 충분한 컨디션을 제공했다.
그 외에도 전지 훈련장인 단쿤과 우본랏 댐 골프 코스도 있고 퍼블릭 코스도 있어서 전지훈련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밥 사는 걸로?”
“왜 이래. 아직 3홀 남았잖아.”
“도미잖아요. 설마 3홀 다 제가 질까요?”
“두고 봐야지.”
15번 홀까지 버디 7개, 이글 하나를 잡아 무려 -9를 쳤다.
그런데도 도미 상황에 몰렸다.
필상의 기량이 나아진 것처럼 성호의 실력도 날로 성장해 당장 투어를 뛰어도 어느 정도 성적은 보장될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은 악착같이 남은 홀들을 버디로 마무리했고 당황한 성호는 쉬운 퍼팅도 놓치면서 결국 최종 승부는 무승부로 끝이 났다.
연장전을 가야 하지만 2시에 티오프를 해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1홀만 더 치려면 9홀을 더 끊어야 하는데 프런트는 이미 닫혔다.
“더치페이!”
“아, 진짜! 밥 좀 사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샀는데. 돈도 엄청 벌면서 동생한테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돈이 아무리 많아도 승부는 승부지. 어프로치로 승부를 내든가!”
“좋아요!”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다.
어두워도 숏 게임은 가능했으니까.
스타트 주변에 어프로치 샷을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그곳으로 이동한 둘은 30야드부터 시작해 25야드, 20야드, 삼세판 어프로치 니어로 승부를 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필상이 졌다.
30야드 칩샷을 홀컵에 쏙 집어넣은 성호는 25야드도 10cm에 붙이면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필상은 그날 밥값을 치르지 않았다.
“공 프로님을 저희 가게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나다 한글 간판이 눈에 띄어 들어갔는데 한국식 돼지고기 뷔페식당이었다.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지역인데, 테이블마다 가득 들어찬 손님은 다 태국인들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어여쁜 여대생들.
알고 보니 콘깬 대학교 앞에 위치해 80% 이상이 젊은 여자 손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거의 매일 저녁 식사는 그곳에서 먹었는데, 성호만 소화가 잘된 건 아니다.
태국 음식도 좋아하지만 고된 일과의 끝에 먹는 한국 음식은 수고한 자신에 대한 위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게를 운영하는 박 사장은 골프를 좋아해 매번 대접하고 싶어 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안내로 보다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고마웠으니까.
“굿 샷!”
“하하하. 고맙습니다.”
“나도 오늘은 블랙 티에서 쳐 볼까나?”
“그러시죠.”
가게는 늘 성업 중이고 이미 운영의 틀을 잡아 놓은 박 사장은 그날 이후 단쿤 골프 클럽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워낙 사람이 좋고 경우도 밝은데, 태국의 물정까지 훤해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여러 모로 배울 점이 많았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다양한 사업을 해 본 경험이 근간인 것 같은데, 이런 태국의 낯선 곳에 사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가끔 연습 라운드도 같이 나갔는데 훤칠한 신장에서 뿜어 나오는 파워풀한 샷은 대단했다. 아마추어 중에 그런 강한 임팩트를 만드는 사람은 드물 정도로.
물론 들쑥날쑥한 방향성과 일관성이 부족했는데, 성호가 따라붙어 코치를 해 주면서 싱글 플레이어 수준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필상의 320야드 티샷 뒤에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드라이브 샷은 남의 홀로 훌쩍 넘어가 버렸다.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골프를 치셔야 합니다.”
“아!”
“제가 볼 때, 박 사장님은 신체적인 조건도 좋고 기본기도 탄탄합니다. 하지만 너무 들이대세요.”
“하하하. 내 인생이 워낙 그래 와서.”
“고수가 되려면 참을 줄 아셔야 합니다. 한두 클럽 길게 잡고 편안하게 치시면 아마 콘깬 최고의 고수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오케이!”
성호가 강조할 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박 사장이 필상의 말을 들은 뒤에 180도 달라졌다. 같은 조언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효력을 가지는 듯.
그날 박 사장은 블랙 티에서 79타를 쳤고 그날 이후로 완벽한 싱글 플레이어로 등극했다. 말이 쉬워 70대 타수지, 아마추어들과 블루 티에서 치면 그를 이길 지인은 드물 것이다.
“공 프로. 이제 귀국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러게요. 박 사장님 덕분에 아주 잘 지내다 갑니다.”
“공 프로가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 내가 자네 만난 걸 기념해 작은 사업을 하나 해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
“무슨 사업이요?”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퍼펙트 콩의 전지훈련 따라 하기’ 그런 설정으로 골프 투어 관련 사업을 좀 해 보려고.”
“하하하. 얼마든지요.”
“정말 괜찮은가?”
“그럼요.”
“좋아!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군. 아주 대박이 날 걸세. 하하하.”
절대 해를 입힐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가 작은 성공이라도 이룬다면 그 또한 자기 일처럼 기쁠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의 생각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박 사장님. 그 사업도 좋은데, 기회가 되면 이곳에 아예 골프 코스를 하나 만들어 보시죠. 생각보다 큰돈이 들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에이,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런 거금은 없어. 솔직히 엄두도 잘 나지 않고.”
“그럼 저랑 같이 한 번 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저도 이곳에 골프 코스를 하나 만들고 싶거든요.”
“어허! 공 프로 이름을 빌린다면 무조건 되지. 그럼!”
전지훈련을 통한 소기의 성과는 이미 이뤘다.
아직 풀스윙이 가능해진 것은 아니나 굳이 풀스윙이 필요치 않을 만큼 충분한 기량을 갈고닦았고 머잖아 한계를 넘을 것 같다는 확신도 생겼다.
그러던 차에 박 사장을 알게 되면서 다양한 사업 아이디어를 듣게 되었다.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그의 이야기들은 솔깃했고 그중에 몇몇은 필상도 관심이 많은 분야였다.
특히나 골프 코스를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은 여타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렴하고 기후나 환경도 최적이라는 것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이나 일본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곳에서 먼저 시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강하게 끌린 이유는 열정과 능력을 지닌 박 사장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과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법인을 만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사업적인 부분은 저의 매니지먼트 회사인 J&L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할 겁니다. 그러니까 사장님은 최적의 부지부터 물색해 주시고 일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파악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몰라…….”
그는 뜻밖의 제안을 언급했다.
필상이 전지훈련했던 단쿤 골프 클럽을 인수하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들인데, 충분한 사업 타당성이 있었다.
자본이 문제일 뿐, 구체적인 협상을 진행하라고 권한 필상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전지훈련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먼 자신이 가는 곳마다 일을 벌이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의지와 노력이 더해진다면 일은 성사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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