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탈피(脫皮)
-어? 잘못된 정보 아닌가요?
-아닙니다. 방금 전에 보여 준 티샷도 그랬지요. 평소보다 훨씬 강한 임팩트가 이뤄졌는데, 마지막 라운드 마지막 홀에서도 그런 힘을 비축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아! 마르지 않는 정력인가요? 아니죠, 체력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군요. 여하튼 공 프로의 클럽 정보를 보면 6번 아이언의 적정 거리가 200야드로 나와 있어요.
-저 역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린에 공을 세우려고 탄도도 높여야 할 텐데, 6번 아이언은 너무 짧지 않을까요?
합리적인 의구심이다.
굳이 우승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행여 해저드에 빠뜨리기라도 하면 스타일을 구기지 않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허 해설은 단호히 부정했다.
-다 생각이 있을 겁니다. 아마 80% 이상의 힘을 싣겠지요.
-80%요? 그럼 평소에는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쓴다는 말이죠?
-공 프로의 경우라면 대략 70%, 그 이하의 힘 조절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고 절실한 상황이라도 프로들은 절대 100% 스윙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211야드의 거리에 위협적인 호수가 시퍼렇게 보이는 마당에 평소보다 짧은 아이언을 잡은 필상의 샷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평소보다 아주 살짝 공을 우측에 둔 대신, 클럽 페이스도 조금 닫힌 상태였다. 수많은 눈동자가 몰린 지점의 끝에 선 필상의 느릿한 테이크 백, 그건 힘을 모아 가는 과정이었다.
이번에도 백스윙의 크기는 쓰리쿼터, 아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돌아갔다. 보통의 팬이라면 스쳐지나 갈 그 장면을 유심히 확인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외쳤다.
-어? 스윙 크기가?
-네?
-공 프로의 스윙이 200도 정도 돌아갔습니다! 보셨나요?
-우와! 한도 없이 치솟는군요.
허 해설의 말이 씹혔다.
흥분한 캐스터는 아예 스윙의 크기는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타구에 시선이 빼앗겨 얼마나 높이 치솟는지 그것만 바라봤다.
그러나 샷의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허 해설은 두 팔을 치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물론 화면에 잡힐 리 없으니 신경 쓴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껍질을 벗은 건가요?’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과 할 줄 아는데 아끼는 것은 다르다. 허 해설이 알기로 필상의 어깨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눈부신 성적을 거두니 누구도 신경 쓰지 않지만 필상의 미래를 고심한 몇몇 전문가들은 그 단점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비거리의 한계는 어찌 극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모든 스윙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은 왠지 발목을 잡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무대를 향한 시험대에서, 그것도 마지막 스윙에 자신이 가진 한계를 벗어나는 기적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런데 정작 스윙을 한 필상도 놀랐다.
‘뭐지?’
자신의 테이크백이 위가 아닌 뒤로 제켜진 것을 생생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때문에 피니시를 하고도 잠시 멈춰선 필상은 공을 쳐다볼 겨를도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카메라도, 갤러리들의 시선도 필상에게 향할 틈이 없는 것이 다행이려나. 여하튼 클럽을 받으러 다가온 성호도 흥분한 음성을 감추지 못했다.
“형?”
“응……. 너 봤냐?”
“네. 봤지요. 어떻게 된 겁니까? 제게는 귀띔이라도 좀 해 주시지.”
“나도 놀랐어, 인마!”
“그럼 이제 스윙을 다시 교정해야 되는 거네요?”
“글쎄…….”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지만 전혀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기뻐해야 할 현상인데 그저 멍하니 있다가 팬들의 비명 소리에 그제야 그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엄청나게 높이 치솟은 공인데도 샷 결과는 길었다. 애당초 공이 떨어진 지점이 핀을 지나 3m 후방이라서 공이 재차 튀어 오르는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다들 그린을 오버한 공이 호수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린지에 다시 떨어진 공은 구르지 않고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만약 그린이었다면 백스핀이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2온을 하기는 했네. 하하하.”
“그냥 잘 붙여서 마무리하시죠.”
“그러자.”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다리를 건너 그린에 올랐다.
필상을 향한 격려의 박수는 기대보다 훨씬 요란했다. 유럽 무대에서는 보기 드문 동양 선수의 기대 이상의 기량이 모두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
하기야 체격이나 스윙, 그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다. 이미 아시아를 넘어 유럽 각국의 골프매거진에 소개된 바 있어 낯설지도 않았다.
워낙 믿기 힘든 신기록들을 달성했다기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 경기하는 모습을 본 팬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 더 홀!”
더블 브레이크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중첩된 라이였다.
그래서 일단 들어가라고 소리는 쳤지만 정말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멈출 것 같던 이놈의 공이 슬슬 구르더니 결국 홀컵 속으로 쏙 사라지고 말았다.
버디만 해도 -29을 기록해 올 시즌 최저타 기록 갱신이다. 그런데 14야드 이글 퍼팅이 들어가면서 -30, 올 시즌 EPGA 최저타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또한 스티브 스트리커가 2009년 밥 호프 클래식 4라운드 종료 시점에 -33의 성적으로 72홀 최저타 기록으로 공인 받은 이후 10년 만에 3으로 시작하는 언더파가 나왔다.
“퍼펙트! 퍼펙트!”
필상의 닉네임을 아는 누군가 소리치자 그 말에 동의하는 갤러리들의 열띤 환호성이 끝없이 이어졌다.
남아공의 골프 인구는 생각보다 적다. 가진 자들만이 즐기는 고급 스포츠라는 인식도 강하다.
하지만 이 대회를 관전하러 왔던 팬들은 필상의 월등한 기량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국 선수들과 감히 비교하기 힘든 최고의 선수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남아공 TV방송에서는 퍼펙트 콩의 해외 진출 첫 승이 남아공에서 이뤄진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이 봐도 필상은 추후 세계 골프계를 주름잡을 거목으로 비쳤던 것이다.
-축하합니다! 소감부터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승 인터뷰에 응한 필상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통역 없이 인터뷰에 나섰기 때문이다.
영어를 통한 의사 전달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인터뷰까지 잘해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 이런 상황을 고려해 통역을 데려가라고 했던 이 대표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내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그린 필상은 다소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표현하기 시작했다.
“열정 어린 팬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러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유러피언투어는 처음인데 적응에 문제는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일단 익숙하지 않은 코스 레이아웃, 그리고 거친 러프와 무거운 벙커 모래, 빠른 그린 스피드까지 무엇 하나 쉽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그런데도 대기록을 작성하며 우승 했으니 결국 자기 자랑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더 어려운 코스와 낯선 환경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행운이 따라 이 코스는 쉽게 적응했지만 앞으로 다양한 코스 적응을 위해 더욱 열심히 갈고닦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겸손한 태도라서 거부감이 일었지만 계속 일관되게 부족하다는 말을 반복하자 다들 질린 표정이었다.
처음 출전한 투어에서 시드를 확보하고도 더 열심히 준비하겠다는 말은 곧 모두 차지하겠다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인터뷰 내용은 기대와 달랐다.
-이제 내년도 시드를 확보했으니 좀 더 자주 볼 수 있겠네요. 근거지는 정하셨습니까?
“시드를 확보한 것은 고맙고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유럽 각국의 돌아다니며 대회에 출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시드가 있는데도 아시안 투어를 뛰겠다는 말인가요?
“아시안 투어가 아니라 KPGA와 JGTO입니다. 그 2개의 투어는 유럽피언투어 못지않은 레벨에 이르렀으며 저를 응원하고 아껴 주시는 팬들의 기대에 아직 부응하지 못해서 특별히 일정이 겹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출전을 구상할 생각입니다.”
-아! 그 말씀은 상당히 실망스럽군요. 언급한 2개의 투어와 유럽피언투어를 동일 선상에 놓다니, 골프의 발원이 유럽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까?
“지나친 확대해석은 원지 않습니다. 악의적인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자신이 속한 투어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온당하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날 인터뷰는 썩 좋은 분위기로 끝나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필상이 내년에 유러피언투어 출전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왜냐면 필상이 미국이 아닌 유럽 무대에 진출하는 것이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아시아 선수들은 자국 투어에서 성공하면 바로 미국 진출을 노린다.
시장성이나 대회 규모가 유러피언투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아 당연한 수순인데도, 유럽인들은 묘한 자존심을 내세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골프의 발원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자신들이 PGA보다 한 수 아래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시장성을 갖춘 필상이 유러피언투어에 합류하면 흥행적인 면에서 엄청난 파급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한국 선수지만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의 관심을 통해 투어를 널리 홍보할 수 있으며 경제적인 이득도 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립 서비스 좀 해 주지 그러셨어요?”
“알지도 못하는 그들 비위 맞추는 것보다 내가 머물 투어 팬들에게 어필하는 게 백배 낫지.”
“아! 바로 그거였나요!”
어차피 유럽 무대를 뛸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자신이 뛰고 있는 투어에서의 인지도는 그 발언으로 인해 급격하게 올라갈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뒀다.
어차피 PGA가 최종 목표이고 거기서 성공하면 어느 투어에서든 활약할 수 있다. 시드를 확보한 것은 미국 진출을 위해 보다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던 것이다.
***
“날짜 잡았어요.”
“벌써?”
“네. 어머님이 잡으셨어요!”
“미륵사에 다녀오신 모양이네.”
공항에 마중 나온 모모코의 표정은 더 밝을 수 없을 만큼 환했다. 그 이유는 엄마가 결혼 날짜를 잡으셨기 때문이었다.
벌써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알렸다는 것을 보면 하루라도 빨리 식을 올리고 싶은 것 같아 필상도 흐뭇했다.
“과수원 땅도 계약했어요.”
“그걸 나한테 상의도 안 하고?”
“이 대표님이 중재를 해서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아요.”
“그런 것까지 부탁하다니…….”
하기야 이 대표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먼 친척 소유지만 그걸 넘기는 과정에서 두 집안의 관계가 소원해져 차라리 정확한 중개자가 나서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모코가 그 얘기를 서둘러 고한 이유는 곧 이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먼저 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모모코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준비를 마쳤는지 이 대표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축하해요!”
“뭘 축하해 주시는 건데요?”
“호호호. 축하할 게 너무 많지만 가장 축하할 일은 역시 결혼식 날짜를 잡은 거겠죠?”
“알고 계셨군요.”
“그럼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안 그래도 바쁜 분한테 자꾸 성가신 일거리를 드려 송구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나 서운한데.”
“아!”
이 대표와는 전생에 무슨 관계였을까 싶다.
그녀를 만난 이후 모든 일이 잘 풀렸다. 돌고 돌아갈 길도 빠르고 쉽게, 한 번의 실패도 겪지 않았다.
물론 자신을 만난 뒤, 그녀의 회사도 만사가 형통하다지만 그래도 고마운 것은 변치 않은 사실이었다.
“남아공 우승 인터뷰 반응은 어떻습니까?”
“이제 곧 인터뷰에 응해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아마 영웅 대접을 받을 걸요?”
“그렇게까지 효과가 좋습니까?”
“참. 희소식이 하나 더 있어요.”
“희소식이라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무관한 것도 아니다. 필상과 눈이 마주친 이 대표의 눈가에 뿌듯한 감정이 피어나는 것을 보며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파악했다.
“나이키가 아주 대대적인 시리즈를 내놨어요.”
“시리즈요?”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아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나이키가 아시아의 3대 투어를 겨냥한 시리즈 대회를 구상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마치 WGC 주관 대회처럼 나이키가 주관하는 시리즈 대회를 개최하는데,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기 위해 KPGA, JGTO, 아시안 투어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3개의 대회를 창설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천천히 해도 되지만 아직 언론에 발표할 수준은 아닌 거죠?”
“네. 일단 공 프로님이 워낙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제가 중간보고를 드린 거죠.”
“그럼 그냥 확 사고를 쳐 버릴까요?”
“무슨 사고요?”
“아닙니다. 그냥 한 번 해 본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필상의 다분히 계산된 발언이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최적의 방안을 구상한 필상은 분위기 좋던 인터뷰 말미에 다소 엉뚱한 폭탄급 발언을 던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