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전력투구
평안도에서 시집오신 할머니가 쓰시던 표현이다.
하나뿐인 손주를 지극 정성으로 아끼시던 그분은 ‘남자는 맥사리가 없으면 안 된다’며 늘 좋은 음식을 챙겨 주곤 하셨다.
아버지는 그 헌신적인 사랑을 엉뚱하게도 이기적인 행동 양식으로 드러내 집안을 거덜 냈다. 실수를 무한 반복하는데도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아들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못하셨다.
며느리 손을 꼭 잡으시고 소리 없이 우시던 그분을 떠올리면 필상은 지금도 마음이 따스해진다. 그분의 눈물방울이 다리를 베고 잠자던 필상의 뺨에 떨어졌지만 자는 척했었다.
“타구의 궤적을 정확히 추적한 겁니까?”
“응. 내 타구를 막을 만큼 억센 가지는 없더라고.”
굵은 몸통을 제외하면 야자수의 말라비틀어진 가지 따위는 강한 타구가 얼마든지 부숴 버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재수가 없으면 원하는 방향으로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자신이 보낼 타구의 궤적을 정확히 추정하고 그 경로에 별다른 방해 요소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문제는 평소보다 강하게 때리면서도 그 궤적으로 정확히 보내야 한다는 것인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필상은 그 난해한 샷을 완성하고야 말았다.
-하하하. 여러분도 보셨죠? 저 미치도록 아름답고 파괴적인 샷,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정확한 의도를 가진 창조적인 샷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평소처럼 안전하게 페어웨이를 공략했더라면 편안하게 볼 수 있었을 것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보다 차분하게 한 홀 한 홀 풀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위기를 극복하는 지금 플레이도 싫지는 않은데요? 더 극적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좀 더 안정적인 평소의 기량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우승을 하려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기왕이면 자신이 가진 장점을 십분 발휘해 보다 안전한 순위를 확보하길 바랐다. 하지만 이글 퍼팅을 놓친 필상은 -3을 유지한 채로 여전히 불안 불안한 가운데 1라운드를 마쳤다.
순위는 공동 24위, 아쉽지만 유러피언투어 첫 출전 성적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더군다나 환상적인 몇몇 샷은 이날의 멋진 샷으로 선정되어 반복해서 보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모모코와 통화한 필상은 생각을 고쳐먹기로 작정했다. 모모코의 해설로 생중계를 지켜보시던 엄마가 영 불편해하시더란 소식 때문이었다.
“내일부터는 전력투구다!”
“듣던 중 반가운 말입니다. 오늘은 대체 왜 그런 겁니까?”
“테스트.”
“뭔 테스트요?”
“그런 게 있다. 너무 많이 알면 다쳐.”
“에이 진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알려 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도 완벽하게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알려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나마 성호는 이성적이지 않은 필상의 행동들을 믿고 따라왔다. 그저 돈 많이 버는 일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근에는 미국 진출을 대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려서부터 해외 진출까지 고려해 영어를 배웠지만 꿈을 접었던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오오! 하루 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나요?
-어제 경기를 마친 뒤에 문제점을 교정한 것 같습니다.
-그게 몇 시간에 가능한 건가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변화는 아니었을 겁니다. 어제만 잠시 흔들렸지 최근 공 프로의 스윙은 아무 문제가 없었잖습니까!
-그렇군요. 1, 2번 홀부터 시작한 버디 행진이 3, 4번 홀에서 잠시 주춤하는 것 같아 불안했는데 파3 홀에서 다시 버디 기회를 잡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라이가 만만치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홀컵에 붙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봅니다.
162야드 티샷이 조금 길었다.
차고 넘치는 힘을 주체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결과다. 하지만 그린 스피드가 남다른 내리막 퍼팅임에도 필상은 정확하게 굴려 넣었다.
게다가 어제 1온에 성공했던 짧은 파4, 6번 홀에서 또다시 드라이버를 잡은 필상은 한 번에 그린을 공략했다.
이번에도 살짝 길어 이글을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버디를 기록한 필상은 6개 홀에서 4타를 줄이며 급기야 톱 10 진입에 성공했다.
그러자 이후 플레이는 지극히 전략적으로 다가갔다.
핸디캡이 높은 홀은 철저하게 안전한 공략을 해 파를 잡아냈고 평균 타수가 마이너스인 홀들은 공격적으로 임해 확실하게 타수를 줄였다.
11번 홀에서 15번 홀까지 다섯 홀 연속 버디를 완성한 필상은 마지막 홀에서도 버디를 낚으며 데일리 베스트 -10을 작성하며 공동 3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10언더를 치고도 선두가 아니다니! 확실히 미친놈들이 많은가 봐요.”
“말이 좀 이상한데? 왜 내 귀에는 나도 미친놈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
“가장 비정상인 것은 맞죠. -10이 코스 레코드라잖아요. 장애물이 많아 무보기 플레이를 한 사람이 없다는데 형은 오늘 벙커에도 한 번 들어가지 않았다고요.”
“신발 밑창에 모래 끼는 거 싫거든. 하하하.”
솔직히 만족스러운 경기는 아니었다.
무엇이든 바라면 이뤄질 것 같았는데 아직도 뭔가 부족했다. 될 듯 될 듯 완벽하지 못한 샷은 큰 기대와의 괴리가 커 실수를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언론은 난리였다.
[동양의 신비함을 간직한 고수, 퍼펙트 콩! 유러피언 무대마저 접수하는가!]
[창조적 샷 메이킹, 안전한 홀 공략, 코스 레코드마저 깨 버린 기록의 사나이, 우승을 향한 시동을 거나?]
2라운드 경기 내용은 첫날의 부진을 말끔하게 지워 줬다.
사실 1라운드 성적이 그리 나빴던 것도 아니다. 순위가 말해 주니까. 하지만 2라운드에서의 완벽에 가까운 공략이 너무 확연해 상대적으로 흔들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3라운드를 지켜본 이들은 2라운드가 완벽했다는 말은 취소해야만 했다. 더 안정적인 샷과 공략으로 -11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무빙데이에 깊은 함정을 파고 수위가 요동치기를 바랐던 주취 측의 의도가 무색한 결과였다. 물론 많은 선수들이 타수를 잃고 일부는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리더 보드의 숫자는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24 PS KONG
-13 LOMBARD, OOSTHUIZEN JAMIESON,
-12 EVANS, PARK Hyowon, SCHWARTZEL, FRITTELLI
남아공 선수들의 선전이 눈에 띈다.
하지만 최상단의 고고한 이름 하나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3라운드를 마친 상황에 11타 차는 도무지 역전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유럽 언론에서도 놀랍다는 반응을 그대로 드러냈다.
동양에서 온 한국 선수의 눈부신 기량은 홈 어드밴티지도 압도하는 그 무언가가 있어 보였던 것이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혹자는 아직도 미국 진출에 대한 의구심을 표하지만 이번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그런 생각이 얼마나 진부한 자기 비하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슈와첼은 물론 남아공을 대표하는 우스트히즌, 프리텔리 등은 세계 랭커들이죠?
-아시아에서만 경기했던 우리 공 프로도 어느덧 21위까지 올라서기는 했습니다. 낮은 포인트지만 무려 10승을 거뒀으니까요. 하지만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면서도 오히려 압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확실하게 우승 도장을 찍어 PGA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를 소망하며 편안하게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위기는 없었다.
다소 지친 기색을 보인 필상은 안전한 선택을 이어 갔다. 굳이 추격의 빌미를 제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턱없이 수동적인 공략만 치중한 것은 아니었다. 위험 요소가 없는 샷은 과감했고 여지없이 기대에 부응하는 멋진 결과를 만들어 내 착실하게 타수를 줄였다.
여전히 11타 차를 유지한 채 맞이한 18번 홀에서 아쉬움을 느꼈던 팬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환상적인 샷을 보여 줬다.
“오늘은 552야드네요.”
“한 방 보여 주라고?”
“네. 너무 무미건조했잖아요.”
“무미건조? 하하하. 그래, 한 번 쏴 보자!”
220야드부터 290야드까지 페어웨이 좌우측에 벙커들이 포진되어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장타를 날린다.
아니, 장타를 강요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물론 내리막이 많아 웬만한 프로들은 거리에 대한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벙커 지역을 넘기더라도 페어웨이의 폭은 아주 좁다.
우측의 나무숲에 빠지면 레이 업을 해도 3온이 부담스럽다. 그린은 호수가 사방을 둘러싼 아일랜드이기 때문에 220야드 이상이 남으면 그린에 공을 세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 선수들의 티샷은 좌측으로 당겨진다. 일단 시각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는 헤비 러프이기 때문인데, 시야가 트였다고 그린을 공략하는 것이 더 큰 함정이다.
잘라 가지 못하고 그린을 공략하다가 악어가 출몰하는 호수에 공을 헌납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어? 한 방 보여 주는 건가요?
-어제는 4번 아이언으로 잘라 가고도 버디를 잡았는데, 마지막 홀에서 팬 서비스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으음……. 역시 우리 공 프로는 스타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팬들이 언제 어떤 것을 바라는지 그걸 다 아는 거죠.
-나이키와의 내년도 계약 내용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아! 계약이 갱신되나요? 그러면 당연히 엄청 많이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금액도 나왔나요?
-확실하다고는 하는데 워낙 금액이 커서 방송에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풍문이라고 치고,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팬들도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10억 엔.
-10억 원이 아니고 10억 엔입니까?
당연히 10억 원은 아니다.
절반 시즌에 불과했던 올해 금액도 그걸 넘었고 계약 이후 나이키는 충분한 효과를 거뒀다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그래도 5억 엔 정도까지 예상했던 임한석 캐스터는 10억 엔이라는 말에 잠시 두서없는 말을 더듬거렸다.
통상 계약 총액은 잘 발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금액이 워낙 클 경우에는 그것도 광고 효과이기 때문에 과장해서 발표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한동안 그 금액에 대한 진위 여부를 언급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필상으로 인해 나이키가 얻은 광고 효과는 10억 엔의 가치를 훌쩍 넘는다는 점이었다.
까앙!
방향성을 담보하기 위해 안전한 스윙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만큼 강력한 티샷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김없이 필상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식된 쓰리쿼터 스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윙의 크기나 체중 이동이 아니다.
얼마나 정확히 스위트 스팟에 맞췄냐는 점인데, 그 점이라면 걱정할 게 없었다.
클럽 헤드가 공을 때리는 순간, 손바닥에서부터 출발한 기분 좋은 타격감은 전신에 소름이 돋게 했다.
캐리는 253야드, 하지만 페어웨이 한가운데를 관통한 타구는 내리막을 타고 정신없이 굴렀다. 금방이라도 멈출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강한 힘을 간직한 공은 마지막 벙커의 경계선을 지나치고도 한참이나 굴러 멈췄다.
-어허! 런이 엄청나네요. 드라이버로 마치 범앤런 샷을 한 것처럼 100야드 정도를 굴린 것 같은데 저게 무슨 원리죠?
-특별한 이론은 없습니다. 탄도가 낮았지만 워낙 강한 힘이 실린 탓에 멈출 수가 없었던 겁니다. 내리막 경사인데다가 잔디가 그린을 향해 누운 방향에 떨어진 것이 행운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역결이 아닌 순결을 타면서 더 미끄러졌다는 말씀인데, 우리 공 프로가 그것까지도 계산한 건 아닐까요?
-음……. 그건 제가 나중에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실전 경기에서 그것까지 감안한 샷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지만 퍼펙트 콩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 말입니다. 하하하.
허 해설은 우승의 턱밑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태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둘러댔다. 하지만 캐스터의 분석은 옳았다.
필상은 순수한 캐리로도 벙커가 놓인 라인을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왔다 갔다 빛깔을 달리한 페어웨이의 두 가지 색을 확인한 순간, 정확성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일단 역결에 걸리더라도 경사로 인해 300야드는 굴러갈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소름이 돋을 만큼 정확했던 타구는 잔디의 결을 타고 무려 341야드 지점에 멈췄다.
90야드 가량을 순전히 굴러서 내려갔던 것이다. 그 결과 남은 거리는 211야드였다. 티오프 위치에서 그린의 연장선상에 정확히 떨어져 거리의 손실이 전혀 없었다.
“아일랜드 홀이라 이거지!”
“뭘 드릴까요?”
“원바운드로 세울 거야. 뭐가 좋을까?”
“5번 아이언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탄도를 높이면 거리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마지막 홀에 와서도 힘이 펄펄 넘치는 필상에게 성호는 5번 아이언을 권했다. 띄우고도 한 클럽 정도의 거리는 커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싱긋 웃은 필상은 성호가 자신의 상태를 알아본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필상의 선택은 더 짧은 클럽이었다.
“6번 줘.”
“우와! 정말 끝내주네요!”
“결과나 보고 말해.”
“살살 다뤄 주세요. 크크크.”
불만은커녕 기대감이 잔뜩 묻어나는 대꾸를 한 성호는 필상이 원한 6번 아이언을 건네줬다. 그리고는 한 발 뒤로 물러나 힘찬 필상의 연습 스윙을 지켜봤다.
설렁설렁 휘두르는 것 같지만 최저점에 이르러 무섭게 돌아가는 아이언 헤드를 보며 211야드, 그 이상도 날아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침 중계진에게도 필상이 잡은 클럽 정보가 들어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