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어처구니없는 상황
“너무 안전하게 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아니야. 묘하게 산만해서 집중이 잘 안 돼.”
“혹시 컨디션이 안 좋은 건 아니죠?”
“응.”
코스의 레이아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각 홀이 주변 조경에 둘러싸여 독립적으로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전혀 없고 사방이 확 트인 벌판에 잔디만 깔아 놓은 것 같아 마치 스크린 골프를 치는 느낌이었다.
행여 실수하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샷을 해야 한다는 불안감은 기이하게도 집중력을 흔들었다. 때문에 오로지 코스만 보고 공략하는데도 자꾸 시선이 흩어졌다.
“그린도 너무 딱딱한 것 같아요.”
“그건 어느 정도 적응이 됐어. 문제는 러프와 벙커, 그리고 저 맨땅이지.”
“들어가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러게.”
성호는 이상하게 맥이 없는 대답을 반복하는 필상이 염려스러웠다.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지 않은가!
차가울 정도로 이성적이며 굉장히 도전적이다.
게다가 이번 아프리카 원정은 굳이 나설 이유가 없는데 본인이 원해서 실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능동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 조심하는 것 같아 의아했다.
“혹시 형수가 곁에 없어서 그래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형이 너무 의기소침한 것 같아서 그러죠.”
“그런가?”
성호가 이제 모모코를 형수라고 칭하는 것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스스로 생각해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최근 자신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새로운 토납법(호흡법)을 터득한 뒤로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는데, 남아공 땅을 밟는 순간부터 기이하게도 불타던 의욕이 수그러들었다.
팬들이나 전문가들도 이젠 더 큰 무대로 가야 한다고 격려하기 때문에 이번 출전은 자신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전혀 다른 환경이 주는 어색함은 의욕마저 잠재우며 잘 쳐야 한다는 집착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퍼펙트 콩.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연습 라운드를 함께 한 슈와첼마저 그런 질문을 던졌다.
일본에서 봤던 당당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너무 소극적인 스윙과 전략이 그가 보기에도 아쉬웠던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그저 씩 웃고 말았다.
당장 내일부터 대회가 개막되는데.
필상이 출전함으로서 알프레드 던힐 챔피언십에 대한 관심은 갑자기 커졌다. 한국과 일본 골프 채널에서 중계가 잡혔고 EPGA에 관심이 많은 몇몇 나라의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의욕이 없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유러피언투어 생중계는 오랜만이죠?
-그렇습니다. 이번 남아공 대회는 전 세계 골프팬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우리 공 프로가 처음으로 탈 아시아권 대회에 출전하기 때문에 현지 골프팬들의 뜨거운 관심은 물론 PGA 전문가들도 들여다보고 있을 겁니다.
-기분 좋은 일이군요.
-물론입니다. 여자 프로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배출해 왔고 우리 선수들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지만, 남자 프로가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이 얼마 만인지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감개무량이요? 하하하.
같은 사실도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
부러운 시선을 보내는 일본은 JGTO를 평정한 필상이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투어의 가치가 떨어질까 우려한다.
제아무리 출중해도 처녀 출전에 어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소위 골프 선진국들은 그저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한국의 분위기는 단연 뜨거웠다.
마치 맨유 시절의 박지성이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에라도 출전한 것처럼 1라운드부터 생중계를 결정했다.
모든 골프팬들이, 아니 전 국민이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따오라는 듯 일방적이며 전폭적인 응원과 관심을 보냈다.
하지만 정작 1라운드를 시작한 필상은 아주 담담한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크게 무리하지 않고 이븐파를 지키는 플레이가 이어지자 중계진은 준비했던 자료들을 열심히 풀어냈다.
-작년도 골프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세계 100대 코스 65위에 오른 명문 코스라고 하던데, 풍광이 좀 특이하군요?
-미국 외 세계 100대 코스니까 사실 대단한 코스는 아닙니다. 하지만 레오퍼드 크리크라는 클럽 명칭은 ‘표범이 찾아오는 시냇물’이라는 뜻입니다. 실제 한밤중에 표범이 내려와 목을 축이고 가는 사진이 게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우! 살벌한 코스로군요.
-실제 코스를 끼고 흐르는 강이 그 유명한 크로커다일 강입니다. 하마와 악어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합니다.
-설마 경기 중에 코스로 올라오지는 않겠지요?
-그렇다고 합니다만 덥다고 함부로 물에 뛰어들 수 없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어! 드디어 공 프로가 칼을 빼나요?
평균 타수 4.7이 나온 파5, 2번 홀에서 잘라 가고도 핀에 붙이지 못하는 순간, 채널을 돌린 시청자들이 많았다.
장마다 꼴뚜기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아쉬움을 뒤로한 것이다. 그러나 336야드의 짧은 파4 홀에서 필상이 그린을 바로 공략한 것이다.
6번째 홀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그린 앞까지 직선으로 301야드밖에 되지 않아 파보다 버디가 더 많이 나오는 홀이다.
딱히 세게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특유의 스트레이트 구질이 향한 곳은 분명 핀 방향이었기에 중계진은 물론 시청자들의 눈도 동그래졌다.
숲을 건너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린 좌우의 벙커 위치가 절묘해 그린을 향해 열린 공간의 폭이 10야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라가나요?
-우측은 위험합니다. 경사 때문에 벙커로 들어갈 수도…….
타구의 랜딩 지점이 약간 우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핀의 위치나 그린의 경사를 생각하면 그 방향으로 칠 수밖에 없다. 물론 일단 그린에 올려 롱퍼팅을 시도해도 좋지만 그럴 거면 차라리 잘라 가서 웨지로 붙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필상은 판단했다.
벙커로 빠질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구는 일단 힘차게 굴렀다. 다들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봤지만 정작 필상은 느긋하게 티 박스를 내려왔다.
마치 결과를 아는 사람처럼.
“그린에 올라갔어요!”
“알아.”
“보지 않고도 알아요?”
“왜 안 봐? 이미 연습 라운드 때 확인했잖아.”
“저기로 구르면 올라간다는 걸 알았다고요?”
“응.”
성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실 걱정이 많았다. 연습 라운드도 시원찮았고 오늘 5개 홀을 지나며 필상이 원하는 샷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는 담담했는데 평소라면 충분히 타수를 줄일 수 있을 홀인 것 같은데, 파를 하고도 만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티샷을 통해 깨달았다.
‘형은 지금 천천히 즐기고 있는 거야!’
‘흉악한 인간 같으니라고!’
‘역전 우승을 바라는 건가?’
성호는 표정을 감춘 필상의 심중을 파악하려고 노려봤다.
아무리 그래도 일부러 느슨한 플레이를 한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한국이나 일본도 아닌 남아공이다.
이전까지 함께 경쟁하던 선수들과는 격이 다르다고 평가받는 쟁쟁한 선수들이 즐비한 그야말로 정글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더 힘을 얻었다.
결국 참지 못한 성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체 속셈이 뭡니까?”
“무슨 속셈?”
“왜 저는 형이 느슨한 플레이를 한다는 느낌이 들죠?”
“그런가?”
“에이 진짜! 그러지 말고 왜 이러는지 말 좀 해 줘요.”
빙긋이 웃는 필상의 표정을 보며 뭔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기던 필상은 그린에 다다라서야 겨우 한 마디 던졌다.
“뭘 좀 시험해 보느라고.”
“시험이라고요? 시합 중에?”
필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그린의 라이를 살폈다.
성호의 궁금증은 그만하면 풀어 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 필상은 이곳에 도착한 이후, 놀라운 변화를 느꼈다.
자연의 웅대한 기운을 처음 만났을 때, 스스로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풍관을 보면 감탄을 터트리는 것이 보통의 인간인데, 필상은 오히려 위축이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격려하기 위해 오밤중에 밖으로 나와 토납법을 실행해 봤다. 굳이 내력에 문제도 없는데 스스로 위축되는 현상을 더는 방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시도 자체가 버겁더니 서너 시간을 투자하자 놀라운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토납의 원리가 보다 확연하게 인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자연지기가 풍부한 곳에서의 토납이 얼마나 자신에게 유익한지도 알게 되었다.
‘라이가 보다 정확하게 보여!’
다시 느끼는 바지만 정말 신기했다.
균형 감각마저 좋아져 굳이 사방을 둘러보지 않아도 어디가 얼마나 높은지, 그래서 퍼팅한 공이 어떻게 구를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스윙이 어떤지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똑같은 스윙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비틀어도 크나큰 결과의 차이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그걸 지금 시합에서 시험해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몇 번의 극적인 시도는 경미한 차이로 다른 결과를 낫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이글 퍼팅은 어김없이 정확하게 굴러 홀컵 속으로 사라졌다.
-이글!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8야드 롱 퍼팅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힘 조절과 라이를 정확히 읽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가는 것 보십시오.
-급기야 -2, 드디어 공 프로가 시동을 거는 것 같네요.
-이 기세를 타고 남은 홀들, 확실하게 보여 줬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진가를!
하지만 필상의 담담한 플레이는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도 출중하던 아이언 샷이 좌우로 날렸고 티샷도 거리와 방향이 들쭉날쭉했다. 그러면서도 용케 타수를 잃지 않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 모든 어정쩡한 운영은 필상이 경기 중에 다른 시도를 병행하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기도 했다.
‘보행 중에도 토납을 할 수만 있다면 나의 고질적인 단점도 극복할 수 있을 거야!’
과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같은 추세라면 축복의 그늘에 가려졌던 문제점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절히 원해도 풀스윙을 하지 못하는 것, 또한 연속 출전하면 급속히 떨어지는 컨디션도 극복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평상시에도 토납을 할 수 있는지를 실험 중이었다.
효과는 경미하지만 가능성을 확인했기에 그 흥미로운 행위에 푹 빠져 대회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맞이했다.
565야드 파5, 13번 홀에서였다.
-어우! 공 프로가 저런 실수도 하나요?
-사람이라면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밖에도 좋은 샷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차고 넘치니까요!
-그래도 티샷은 언제나 일관성이 있는데, 이번 샷은 완전히 악성 슬라이스가 났어요. 굳이 페이드 샷을 구사할 이유도 없는 홀이잖습니까!
-중요한 것은 공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겁니다. 얼마든지 파 세이브를 할 수 있으니 조금 더 지켜보시죠.
-이번 홀도 또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허 위원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아무리 필상이라도 너무 위험천만한 벼랑길을 가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리커버리도 한두 번이지 너무 반복적이었다.
게다가 이번 홀의 티샷은 너무 심하게 밀려 카트 도로를 넘어 14번 홀까지 굴러가 레이 업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레이 업을 하시죠.”
“22도.”
“유틸리티요?”
“그래. 저 나뭇가지 뚫을 수 있을 것 같아.”
“형!”
성호는 필상이 지금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레이 업을 하더라도 그린 주변이 너무 지저분해 남겨진 250야드를 바로 공략하기 어려운 답답한 상황은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통과하기 힘든, 빽빽한 나뭇가지를 뚫는 시도는 무리수였다. 말리고 싶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필상에게 하는 수 없이 22도 유틸리티를 건넸다.
그 대신 주변에 있는 갤러리들에게 위험을 알렸다. 자칫 굵은 나뭇가지라도 맞춘다면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나 필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연습 스윙을 시작했고 급기야 엄청난 속도의 과감한 샷을 터트렸다.
쉬이이익!
적당히 강한 정도가 아니었다.
성호가 보건데 여태까지 필상과 함께 수없이 많은 경기를 치르며 이렇게 강한 스윙을 본 적이 없을 만큼 강력했다.
맞는 순간 이미 엄청난 가속이 붙은 공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파악!
나뭇가지에 맞기는 했다.
그러나 타구는 꺾이지 않고 부숴 버렸다. 잔가지와 나뭇잎들이 사방으로 분산되는 가운데 점점 더 치솟는 공이 향한 방향은 놀랍게도 그린 방향이었다.
조금만 감기면 워터해저드이고 밀리면 지옥의 입구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깊은 벙커다. 평소 245야드에 맞춰 둔 22도 유틸리티가 나뭇가지의 저항을 뚫고 270야드를 나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유난히 강했던 타구였기 때문일까?
“온! 온 그린!”
성호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희망 어린 말에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그린 앞에 떨어진 타구가 정말로 그린에 굴러 올라가는 공을 보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파리 들어갈라!”
“형! 올라갔어요.”
“알아. 올리려고 친 건데 뭘 그렇게 감탄하고 그래. 하하.”
“진짜 미치겠네! 나뭇가지를 어떻게 뚫은 겁니까?”
“야자수잖아. 저건 맥사리가 없더라고.”
“맥사리요?”
“아! 힘이 없다는 이북 사투리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