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아프리카 원정
“너나 잘하세요!”
진심 어린 조언이었건만 피식 웃으며 그렇게 무시했던 고객들이 꽤 많았다. 혹시 그들 중에 지금의 필상을 알아본 자들이 있다면 얼마나 쑥스러울까?
라이를 읽는 것은 오랜 연습과 정성이 필요하다.
매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복기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자들만이 그린을 정복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최근 골프의 추세가 빠른 플레이를 권장하기 때문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고, 일단 결정하면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이 최선이다.
‘페럼 CC에서 골프를 시작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린이 빠른 편이었던 것이 필상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물론 남자 투어 대회는 그보다 훨씬 그린이 딱딱하지만 그래도 부단한 노력으로 퍼팅 때문에 곤란을 겪은 적은 없다.
남다른 감각이 그린 플레이의 안정감을 더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그러나 PGA나 EPGA는 퍼팅 입스로 인해 골프 인생을 망친 선수들도 있다고 들었다.
더 큰 무대를 원한다면 반드시 그린 플레이에 먼저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에 대한 단단한 대비를 할 요량이었다.
“와아아아!”
급기야 버디를 잡고야 말았다.
이로써 -14, JGTO 18홀 최저타 기록을 갱신했다. 그 뿐인가, 메이저 대회 72홀 최저타인 -30이라는 대기록까지 세웠다.
설마, 설마 했으나 3개 투어 통산 10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까지 달성한 필상은 몰려드는 동료들의 축하 세리모니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축하연의 클라이맥스는 모모코였다.
JLPGA 퀸으로 등극한 그녀와 퍼펙트 콩, 아무리 봐도 정말 멋지게 어울리는 골프 커플이었다. 이제 더는 시기 어린 야유는 없었다.
만인 앞에 공개된 두 프로의 떳떳한 사랑에 박수를 아끼는 팬들은 없었다. 그러나 시상식이 끝난 뒤 이어진 인터뷰는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고야 말았다.
-결혼, 정말 두 분이 올 겨울 결혼식을 올린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함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모모코 양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전 너무 행복해요. 오빠가 제 마음을 받아 줬고 사랑의 결실까지 얻게 되어 마치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 같아요.”
-사랑의 결실이라니요? 혹시?
“네. 예상하신 그대로에요. 전 아이를 가졌어요.”
임신 사실은 천천히 밝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제 오프시즌이 시작되면 어차피 다들 조용해지기 때문이다. 다음 시즌이 시작될 무렵에나 밝혀도 될 것 같은데 모모코는 그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임신 사실이 가져올 여파를 짐작한 기자들은 워낙 놀라서인지 금방 관련 질문을 꺼내지 못했다.
침만 삼키던 가운데 급기야 한 기자가 총대를 멨다.
-아이를 가졌다면 내년 시즌은 투어 참가가 불가한 것 아닙니까?
“그렇죠. 예쁘고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여러분도 축복해 주세요.”
모모코가 팬들이나 일본 골프계가 받은 충격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책망할 수는 없었다.
어찌 보면 굉장히 현명한 대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질문의 화살은 돌연 필상에게로 날아왔다.
-퍼펙트 콩, 너무 이기적인 결정 아닌가요?
“뭐가 이기적이라는 것이죠?”
-남자인 공 프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전성기를 맞이한 모모코 양에게는 너무 혹독한 것 아니냐는 겁니다.
“하하하. 제가 낳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묻고 싶습니다. 저희 가족사에 대해 기자님이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지만 모모코 양의 가파르게 성장한 기량을 감안해 보다 계획적인 출산이 좋지 않았는지, 그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보다 낮은 가치를 지닌 일입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기자는 말문이 닫혔다.
그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지만 사랑의 결실을 보는 것은 세상 그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다. 너무 편협한 사고에 젖어 그걸 간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필상은 그 점을 분명히 했다.
계획하에 아이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태어날 아이가 모모코의 전성기를 가로막았다는 잘못된 생각은 바로 잡아야만 했다.
“모모코를 응원해 주시는 팬들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아이 때문에 기회를 잃었다는 생각은 말아 주십시오. 모모코는 건강한 아이를 낳고 다시 멋진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설 것입니다.”
모모코와 퍼펙트 콩의 결혼 발표는 필상의 대기록 작성보다 더 뜨거운 화제였다.
분명히 밝혔건만 부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았다.
일단 일본에서 준비를 마치고 바로 남아공으로 날아갈 계획이었으나 필상은 이틀 후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모모코와 함께 돌아온 한국에서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개선장군이 따로 없었다.
빛나는 성적도 축하했지만 모모코와의 결혼이 마치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많은 골프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마치 일본에서 받은 푸대접을 상쇄해 주려는 듯,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으나 아무튼 뿌듯하고 행복했다.
그 바람에 인터뷰 도중 다소 오버한 발언을 남겼다.
“정말 KPGA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건가요?”
“네. 계획한 것보다 좀 더 배려해 최소한 메이저 대회는 모두 참가할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해 주세요.”
이보영 대표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회 규모가 너무 비교될 만큼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던지고 마무리를 하던 중에 필상은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판단했다.
프로가 더 큰 상금을 쫓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신의 국내 대회 출전이 많아지면 그만큼 KPGA 활성화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전부터 논의되던 새로운 대회 유치에 대한 것을 확인했다.
“나이키의 반응은 없었습니까?”
“아뇨.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말은 있었죠.”
“그런데 미적거린다는 거군요. 한국 골프 시장이 세계 3위라는 것을 너무 간과하는 것 아닌가요?”
“3위 아니에요. 중국이 엄청난 속도로 따라붙어서 4위로 밀렸거든요.”
“그렇다면 대회 개최는 중국에서 하면 되잖아요. 주최는 KPGA, 흥행은 중국 대도시.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그거 묘수네요. 다시 한 번 설득해 볼게요.”
“10억 엔을 쏟아부을 선수의 제안이라는 것도 자꾸 강조하세요. 제가 살아야 그들도 본전을 뽑을 테니까요. 하하하.”
동네 어귀에 도착하자 사방에 플래카드가 붙었다.
무슨 선거철도 아닌데 왜 그러나 싶었는데 그게 다 필상의 금의환향을 반기는 고향 분들의 소박한 마음이었다.
“잔치라도 거하게 해야겠네.”
“결혼식에 초대하면 되잖아요.”
“동네 사람들을 다?”
“호텔 이런 데서 하지 말고 집에서 하는 건 어때요?”
“미어터질 걸?”
“집을 넓히면 되죠!”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차피 필상의 집 주변은 과수원 터다.
지금은 남의 땅이 되었지만 그 땅은 몇 대째 가업으로 이어 오던 과수원 자리였다. 부친이 흥청망청 날려 버린 가산 중에 하나인데, 지금은 그 땅을 사들인 먼 친척이 버려 뒀다.
과수원을 할 여력도 없으며 도로 상황이 좋지 못해 다른 용도로 활용할 방법도 없어 장기간 방치해 야지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모모코의 말을 듣자 그것도 다시 사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는 무척 좋아하실 것 같아 관련된 얘기를 했더니 자기가 사고 싶단다.
“네가 그걸 사서 뭐하려고?”
“과수원 하면 되죠.”
“누가?”
“어머님하고 제가요.”
“어림도 없는 소리.”
“치. 두고 보세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과수원은 아무나 하나?
하지만 모모코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다.
수익성을 따질 사업이 아니고 정원에 과실수를 심듯이 가꾸고 싶다는 의미였다. 남은 공간에 잔디를 깔아 숏 게임 연습장도 만들고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이면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모모코!”
“어머니!”
필상은 어이가 없었다.
집에 도착해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는데, 당연히 엄마의 첫 마디가 자신일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엄마는 필상에게 시선도 두지 않고 바로 모모코에게 달려가 얼싸안으셨다. 모모코도 전쟁에서 헤어진 모친이라도 다시 만나듯 얼싸안고 뜨거운 해후를 나눴다.
엄마는 손자를 가진 모모코가 최우선 순위였던 것이다.
이제 자신의 시대는 끝났음을 느꼈다. 지금은 며늘아기가 첫 번째지만 곧 바뀔 게 분명했다.
손자든 손녀든 태어날 아이가 부러울 뿐이었다.
***
“어딜 간다고?”
“남아공이요.”
“그래. 남아공이라는 데가 어딘데 네 아이를 가진 아가도 떼어 놓고 간다는 게냐고.”
대회는 12월 19일부터 개최된다.
하지만 유러피언투어는 처음인 필상은 미리 도착해 적응하고 싶었다. 일본이나 한국 코스는 익숙하지만 전혀 다른 환경에서의 시합은 준비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모모코를 데려갈 생각이었으나 자제하기로 했다. 아이가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장거리 비행은 좋지 않으며 의외로 가족들과 잘 어울리는 모모코를 남겨 두는 것이 가족들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엄마. 아프리카 남쪽에 있는 나라에요.”
“아프리카?”
“네. 필상이한테는 아주 중요한 대회에요. 너무 멀어서 모모코를 데려가는 것이 좀 걱정되나 봐요.”
큰 누나가 거들었다.
모모코가 한국어를 잘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마음은 있어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필상은 뒷전이지만 그녀 말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실 것 같은 편애의 나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나의 도움말에 멀리 떠나는 필상을 위해 성대한 밥상을 차려 내셨다. 아프리카 애들도 골프를 치냐는 말에 다들 크게 웃은 다음 날 아침, 필상은 성호와 함께 이역만리로 출발했다.
“엄청 덥네요!”
“아프리카잖아!”
“가이드는 왜 안 오는 거죠?”
이 대표가 직접 오겠다는 걸 만류했다.
어차피 앞으로 수많은 나라들을 다닐 텐데 그때마다 따라다닐 거냐며 가이드만 붙여 주면 된다고 했던 말이 후회막심이었다.
짐도 적지 않은데,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가이드는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필상은 급기야 이 땅에 살고 있는 유일한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30분 만에 그를 만났다.
다름 아닌 찰 슈와첼이었다.
“퍼펙트 콩!”
“하하하. 구세주가 나타나셨네요.”
“구세주?”
“가이드가 나타나질 않아서 난감했습니다.”
“그럼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고.”
“호텔 예약해 놨는데요.”
“호텔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어차피 요하네스버그에 오래 머물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슈와첼은 거의 막무가내였다.
믿을 사람은 그뿐이라 달리 도리가 없어 끌려갔다.
하지만 그렇게 고집을 부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집은 그냥 집이 아니라 대저택이었다.
“와아. 집 죽이네요!”
“그러게.”
“유럽에서는 프로 골퍼가 대단한 직업인가 봐요.”
“세계적인 선수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이룬 성적은 금방 따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2라운드를 함께 시합해 봤기에 절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아공에서는 경제력만 있다면 귀족 같은 삶이 가능했다. 슈와첼은 본체와 동떨어진 독채를 안내했는데 정말 호텔은 저리 가라 할 만큼 넓고 안락했다.
“레오퍼드 크릭 골프 클럽은 다음 주에 같이 가자고.”
“일찍 가서 코스 적응을 하고 싶은데…….”
“근처에 골프 코스가 그곳뿐이라 차라리 요하네스버그에서 기후부터 적응하고 천천히 가도 될 거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가 보면 알 거고. 하하하.”
“그럼 그럴까요.”
워낙 확신에 찬 제안이라 일단 상황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잘한 선택이었다.
나중에 확인했지만 코스 적응은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황량한 벌판에 만들어진 골프 코스는 요하네스버그나 말레라인이나 다를 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시골인 말레라인보다 대도시에 머물면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주변 골프장들을 다닌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5성급 호텔 맞나?”
“그러니까요. 완전히 깡촌이네요.”
“하기야 여긴 아프리카잖아.”
호텔부터 시작해 주변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앞으로 다양한 도시를 다니며 여러 골프 코스를 만나겠지만 첫 원정부터 아주 호된 경험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일단 대회가 열리는 레오퍼드 크릭 CC에 도착한 필상은 오로지 코스 적응에 심혈을 기울였다.
둥글게 타고 흐르는 강가에 조성된 코스는 잔디가 깔리지 않은 곳은 사막처럼 모래투성이 밭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행여 흙바닥에서도 샷을 해야 할지도 몰라 정말 엄한 땅에서 스윙을 하는 이상한 연습도 해 봤다.
“퍼펙트 콩! 반갑습니다.”
슈와첼 덕분에 많은 선수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도 필상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슈와첼이 그랬던 것처럼 기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과도한 자신감은 낯선 환경에 처한 필상이 아무리 출중한 기량을 지녔어도 경험이 전무해 좋은 성적을 내기는 힘들다는 편견에서부터 비롯된 것 같았다.
때문에 필상과 성호는 독을 쓰고 준비했다.
그런데도 좀처럼 좋은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습 라운드 성적은 겨우 이븐파를 치기에도 버거웠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