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04화 (104/354)

104. 전화위복

“좋은데!”

한 번의 티샷만 잘하면 설거지만 남는다.

몇 홀을 괴롭히던 답답함에서 해방된 필상은 그린 위 핀 위치부터 확인했다. 정면의 벙커는 더블 그린의 앞쪽 벙커 장애물이라 무관하지만 그린 좌측의 턱이 높은 벙커에 핀을 바짝 붙여 놓아 그린 중앙을 보는 것이 안전했다.

게다가 포대 그린의 앞 핀이라서 직접 깃대를 공략하다 짧으면 튀어 올라갈 확률보다 벙커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결국 그 먼 거리를 원 바운드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유틸리티 우드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4번 아이언.”

“네.”

아까 이시카와의 시간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인지 성호는 얼른 클럽을 들고 달려왔다.

빙긋 웃는 필상을 보며 안심이 되었는지 샷 의도를 물었다.

“직접 보시려고요?”

“응.”

“세우기 힘들 텐데요.”

“그래서 아이언을 잡은 거야.”

“확 그냥 넣어 버리세요.”

“오케이!”

평상시 4번 아이언은 220야드에 맞춰져 있다.

게다가 스핀을 걸어 세우려면 탄도를 높여야 하기 때문에 비거리의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필상의 이번 티샷에는 힘이 넘쳐흘렀다.

“인 더 홀!”

“오빠! 홀인원!”

파3 티샷을 하면 팬들의 응원 구호는 정해져 있다.

희박한 확률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실력을 믿고 들어가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주문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샷을 마친 필상은 아직 고개를 들지 않았음에도 점점 커지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왠지 모를 소름이 돋았다.

임팩트 느낌도 아주 좋았기에 잔뜩 기대감을 품고 이제야 하강하기 시작한 타구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완전히 핀빨! 들어가나요?

-하하하. 정말 올곧은 타구입니다. 어떻게 저 긴 타구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보낼 수 있는지…….

허 해설은 말하자 말고 우뚝 멈췄다.

정확히 깃대 앞에 떨어진 공이 한 번 튀었는데 홀컵에 훅 빨려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떨어진 지점은 홀컵을 10cm가량 지난 지점이었다. 롱 아이언이었으니 한두 번은 더 구를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아쉬움의 탄식을 터트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어!

-홀인원! 홀인원! 이게 정말 현실인가요?

-4번 아이언으로 백스핀을 걸다니, 아무리 탄도가 높았더라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퍼펙트! 퍼펙트 공이잖습니까! 하하하. 이렇게 마지막에 모두를 쓰러지게 만드는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네요.

-공식 대회에서 과연 이 홀의 홀인원이 있었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거리였고 오늘은 핀의 위치도 너무 까다로웠는데, 아! 정말 대단합니다.

확률이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일까?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던 성호는 티 박스 뒤에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독일제 최고급 승용차를 가리키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형! 벤츠에요! 벤츠. 그것도 S클래스 63 AMG!”

“좋네. 하하하.”

부상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지금 사용하는 차도 충분하지만 그 정도 고급 승용차라면 한 번쯤은 타고 싶었다. 세금만 내면 되는데 이곳이 아닌 한국에서 인도할 방법은 없는지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아무래도 아이를 가진 모모코를 위해 보다 안락하고 튼튼한 차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동반자가 티샷을 하는 동안 갤러리들 사이에서 손을 흔들며 한껏 좋아하는 모모코와 마주 보며 웃는데 샷을 마친 이시카와가 다가왔다.

“축하합니다. 공 프로님.”

4시간 넘게 함께 플레이하며 반가움과 얄미움이 교차했던 상대다. 위선이라고 느꼈던 첫 모습과는 달리 진심이 느껴져 필상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창조적인 샷이었습니다. 전 겁이 나 그런 엄두는 감히 내지도 못했는데 부럽습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나오자 함께 걸어가던 필상도 홀가분한 기분에 자신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이카루스의 날개를 아십니까?”

“네? 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 말입니까?”

문득 꺼낸 단어를 모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는 알고 있었다. 보통 이카루스의 날개는 인간의 덧없는 욕망을 지칭할 때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필상이 말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자신의 기량을 정확히 안다면 늘 변화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늘 그대로인 상태로는 무모한 도전이 반복될 테니까요. 제가 볼 때, 당신의 기량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다만, 너무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아!”

“뭐가 부족하죠? 파워도, 기술도 부족한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가진 기량을 보다 창조적으로 활용하려면 평상시에 보다 다양한 연습과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자기 자랑 같고 흔한 말 같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시카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샷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운이 따르지 않고 자신감을 잃어 샷의 일관성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에 공감했다.

필상의 샷을 보고 시인했듯이 그는 너무 단편적인 연습과 틀에 박힌 편견의 틀을 깨지 못한 스윙과 공략을 고집해 왔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두려워했으며 우승하지 못하는 것이 오로지 시기가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졌다면 스스로를 돌아봐야 마땅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변하려고 발버둥을 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기회가 되면 레슨을 한 번 받고 싶습니다.”

어허!

이건 정말 뜻하지 않은 제안이었다.

제 아무리 필상이 모모코의 코치를 하고 있더라도 같은 선수로서 자존심이 상할 말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최근 크게 인기가 꺾였지만 그래도 그는 일본 투어를 대표하는 선수인데, 그런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필상도 긍정적인 대답을 줬다.

“레슨은 좀 과한 표현이고 언제 저희 집에 한 번 놀러 오시죠. 같이 연습하다 보면 서로 도움이 될 겁니다.”

“정말 그래도 됩니까?”

“가와사키에 집을 마련했습니다. 연락처는 경기 끝나고 알려 드리죠.”

“감사합니다. 공 프로님. 정말 감사합니다.”

일본인들의 예의는 정말 깍듯하다.

손을 붙잡고 고개를 연신 꾸뻑거리며 인사하는 이시카와의 모습은 보는 시각에 따라 좀 애틋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JGTO의 이름난 선수가 필상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하기야 이미 그러고도 남을 깊은 족적을 남겼다.

통산 승수는 아직 까마득하지만 6월 말에 데뷔해 시즌 10승 달성을 눈앞에 둔 선수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힘들다.

때문에 필상의 앞에서 건방을 떨 현역 선수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적어도 풋내기라고 깔 볼 상대는 아닌 것이다.

“오빠!”

“왜 이래?”

“치! 뭐 어때요!”

모모코가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 필상에게 달려와 확 안겼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장면도 아니건만 이번에도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아니, 부러움과 시기가 뒤엉켜 야유처럼 들렸다.

하지만 얼굴을 붉히던 필상도 이번에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몇 걸음을 떼다 내려놨다.

뒤 이은 모모코의 말이 너무도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우리 아기가 아빠 품에 안기고 싶데요!”

“하하하. 너 닮은 딸 낳으면 좋겠다.”

“전 아들 낳을 거예요. 제 자리 뺏기기 싫거든요.”

딸 바보가 될 가능성을 봤기 때문인지, 모모코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샘을 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깜찍한지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까지 나란히 함께 걷는데 그게 너무 행복하고 뿌듯했다. 이런 소중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과거의 아픔이 있었나 싶어 오히려 배신한 성희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곁을 지켰더라면 과연 지금의 자신이 있었을까 생각하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저녁 식사를 하러 클럽 밖으로 나가던 필상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주변에 자연지기가 풍부한 장소 없을까?”

“자연지기요?”

낯선 표현이었는지 모모코는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성호는 얼른 주변 지도를 검색했고 아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근처에는 없어요. 그나마 요미우리 골프클럽이 인근에서 가장 자연림이 우거진 장소로 확인됩니다.”

“음……. 그것도 나쁘지는 않네. 밤에는 출입을 통제할 테니까 밥 먹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봐야겠어.”

“3번 홀 그린 옆에 있는 호수가 좋을 것 같아요. 벤치도 있었던 것 같고.”

“아! 거기.”

필상이 특별한 장소를 물색한 이유는 머물고 있는 콘도가 내력 회복을 위한 장소로는 적당치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아무래도 인위적인 공간은 인간 본연의 기운과는 맞지가 않다. 자연친화적인 건축물이라도 인공이 가미된 까닭에.

식사를 마친 필상은 성호와 함께 어둑어둑해지는 골프 코스로 향했다. 빈손이었기에 그저 바람을 쐬러 가는 줄 알고 직원들도 제지하지는 않았다.

모모코가 굳이 따라온다는 걸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낮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던 장소지만 밤이 되자 골프 코스는 자연의 한 조각으로 돌아간 듯 위대한 모습을 간직한 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호가 추천한 자리에 도착하자 아직 운기(運氣)를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짓눌렸던 가슴이 시원하게 열리는 것 같았다.

“내가 운기에 몰입하면 넌 들어가서 쉬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은 편안하게 하고 싶은 걸 하세요.”

“내일 백을 들려면 최상의 컨디션 유지해야 해.”

“알았다니까요.”

일단 호흡에 집중하면 주변 상황에 대한 인지가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필상은 적당한 시기에 들어가 쉬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러겠노라 대답했던 성호는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이내 돌아왔다. 완전무장이라도 한 듯 옷을 든든히 입었고 필상을 덮어 줄 담요까지 챙겨 왔다.

하지만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은 필상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행여 괜한 자극을 줘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겨울 밤의 차가운 기온을 어찌 버티나 걱정하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뒤를 지켰다. 어제도 테라스에서 밤을 보내고 멀쩡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뭐지?’

기다림에 지쳐 졸음이 가득했던 성호의 눈에 빛이 났다. 시선의 끝에 머물던 필상의 몸에서 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봤기 때문이다.

착시인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지만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추운 날씨에 몸이 오그라들어도 시원찮을 것 같은데, 용케도 한 자세를 꿋꿋하게 유지한 필상의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아 신기하던 차였다.

후광처럼 빛을 발하는 이 광경을 누가 볼세라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기에 기우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한 성호의 표정은 흐뭇함에 젖었다.

필상이 묘수를 찾아냈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전화위복?’

‘이전보다 더 좋아질 수도 있겠어!’

같은 시각, 필상은 또다시 한 단계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체험했다. 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자연의 기운을 듬뿍 담은 공기를 몸에 담자 어제보다 확연한 효과가 나타났다.

거한 만족감에 정신없이 집중하다 보니 전에 느낄 수 없었던 완벽한 몸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도 자각할 수 있었다.

이런 추세라면 자신이 가진 핸디캡마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몰입이 깨졌다.

아쉬웠지만 다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미 동녘 하늘이 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와 같은 불안감 따위는 없었다.

자신을 지키겠다고 잔뜩 웅크린 채 벤치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성호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

-해도 진짜 너무하네요!

-하하하. 진기묘기를 보는 느낌입니다. 전반에만 7타를 줄여 어느새 -23, 2위와의 격차가 10타 차까지 벌어졌습니다.

-어제 홀인원을 잡아 벤츠를 타더니, 그 무시무시한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고 오히려 상승 모드로 올라선 것 같아요.

-그렇다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오늘 코스 세팅이 결코 쉬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공 프로는 마치 프로가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한 것처럼 너무 손쉽게 버디를 잡네요.

-단독 2위인 이케다가 아예 질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 좀 보세요. 하하하.

-이번 대회가 시즌 최종전인 것이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필상은 원하는 지점에 공을 딱딱 떨어뜨릴 수 있었다.

아이언이나 웨지는 물론 드라이브 티샷마저도 원하는 지점의 반경 3m 안에 쏙쏙 들어가는 것을 보며 전율이 돋았다.

이런 최상의 컨디션이라면 매홀 버디를 잡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만큼 완벽한 스윙을 구사했다. 사실 이번 대회는 2주 연속 출전이라서 우승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시즌 최고의 성적을 거둔 자신이 빠지면 흥행은 물론 갖가지 구설에 휘말릴 것 같아 나섰지만, 도중에 더는 버틸 수 없다면 포기하는 것도 염두에 뒀다.

이전에는 아무 이상 없이 일어났지만 또 한 번 극한상황에 직면하면 미련 없이 포기하고 가방을 싸려고 했다. 창피한 일이지만 자신의 아이를 가진 모모코에게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은 절대 다시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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