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03화 (103/354)

103. 40초 룰

쉬익! 쉬이이익!

연습 스윙부터 평소와는 달랐다.

바람을 쌩쌩 가르는 소리를 들었던 팬들은 필상의 힘찬 티샷 타구가 창공을 무섭게 꿰뚫는 걸 보며 비명을 터트렸다.

골프를 한 번이라도 쳐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샷에서 느끼는 수많은 느낌이 존재하지만 오로지 티샷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격한 감동, 불확실한 결과 때문에 더욱 강렬한 듯.

더욱이 필상이 때린 이번 티샷은 강력한 드로우가 걸린 상태여서 얼마나 극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지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좋아!”

평균 타수가 무려 4.45인 파4 홀이다.

바나나처럼 좌측으로 계속 휘어지는 도그렉 홀이며 432야드의 긴 전장에 오르막이라서 투어프로들도 일단 거리에 대한 부담이 상당하다.

게다가 좌측 벼랑은 OB 지역이고 우측으로 밀리면 그린을 공략할 수 없는 울창한 숲이라서 레이 업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위험한 홀에서 이런 공격적인 샷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아끼고 아꼈던 필상의 강력한 드로우 샷은 환상적인 곡선을 그리며 홀의 모양을 따라 휘었다.

가히 예술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정말 모처럼 보여 준 시원한 샷이네요!

-결과는 아주 좋습니다만 3타 차 선두인데 왜 저런 모험적인 샷을 한 걸까요?

-자신감의 표현 아닐까요?

-평소 공 프로의 홀 공략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차곡차곡 진행해도 딱히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데 말입니다.

-그보다 지금 샷에 대해 분석을 좀 해 주시죠?

-아, 네. 마침 스윙 장면이 나오네요. 일본 중계진도 이번 드로우 샷에 대한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제가 볼 때, 크게 강한 스윙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요?

-그건 공 프로의 스윙이 풀 스윙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평소와 다른 부분이 있죠. 바로 체중 이동인데, 헤드가 백스윙 탑에 이름과 동시에 왼쪽 무릎부터 허리가 움직이며 그 빈 공간을 무섭게 파고드는 다운 스윙, 힘을 싣기 위한 완벽한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에서 아웃으로 파고드는 건 똑똑히 보이네요.

딱히 스탠스를 바꾸지도 않았다.

평상시 방향성을 중시하는 필상의 티샷은 체중 이동이 거의 없다시피 팔로만 치는 느낌을 준다. 그래도 보내고자 하는 비거리는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세게 때리기 위해 체중이 빨리 이동하면 클럽헤드가 늦게 따라 나와 푸시가 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지만 필상은 그런 문제를 빠른 헤드 스피드로 극복했다. 몸이 빨리 이동하는 만큼 다운 블로우를 강하게 잡아채는데, 중요한 것은 피니시가 1시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밀어 쳐야 한다는 것이다.

미는 것이 공을 우측으로 보낼 것 같지만 강하게 걸린 회전은 힘이 빠지는 순간부터 드로우 구질을 만드는 것이다.

“얼마나 나갔을까요?”

“네가 한 번 측정해 봐.”

“330야드?”

“눈은 왜 달고 다니냐!”

“그럼 얼마인데요?”

“저기 좌측 크로스 벙커 끝이 얼마냐?”

“298야드요. 아하! 그럼 320야드 정도 되겠네요. 생각보다 훨씬 덜 나갔네요?”

“오르막이라서 런이 없었잖아.”

평지였다면 340야드는 가볍게 넘겼을 샷이었다.

드로우가 먹은 공은 더 많이 구르기 때문에 그 이상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상은 사실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다.

대략 85% 정도의 힘을 썼는데, 행여 무리하면 문제가 생길까 우려했기에 마지막에 조금 힘을 조절한 결과였다.

그러나 무리수를 뒀던 대가는 확실하게 받았다.

“우우우우!”

이시카와가 필상이 보여 준 드로우 구질의 장타를 그대로 따라 하다가 악성 훅이 나 버렸기 때문이다.

공은 좌측 벼랑으로 넘어갔는데 거긴 OB구역이었다.

하는 수없이 잠정구를 치는 그의 눈빛이 필상을 스쳐 갔는데, 한 손을 들어 파이팅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한 의도였건만 보기에 따라 약을 올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는지,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고 말았다.

문제는 지금이라도 안전한 공략을 하는 것이 좋은데, 빈 스윙을 하는 걸 보니 실패했던 드로우 샷을 다시 시도하는 것 같았다.

“어허! 스스로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데요?”

“두고 보자.”

“격려가 별로 탐탁지 않았나?”

이번에도 미스 샷이 나고 말았다.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은 가상한데 마지막 순간 그를 휘어감은 불안감은 헤드 스피드를 붙잡았다.

몸은 이미 나갔건만 헤드가 쫓아오지 못한 결과는 악성 슬라이스로 귀결되고 말았다. 좌타에 이어 우타가 나면서 공은 징글징글한 숲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뽀올!”

캐디의 경고성 외침에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뭐죠? 저 태도는?”

연거푸 실수를 저지른 이시카와는 앞서 걷던 필상과 성호를 쌩하니 지나치더니 손을 흔드는 팬들까지 밀쳐 내며 제 갈 길만 서둘렀다.

적어도 자신을 응원하는 팬들에게 인사를 못할망정 급하게 걸을 이유도 없는데, 모든 것이 짜증스러운 것 같았다.

“놔둬라. 화딱지 나겠지.”

“그럼 이제 슬슬 타수가 벌어지겠네요.”

성호의 예상은 적중했다.

OB에 이어 숲에 들어간 공을 겨우 쳐 낸 이시카와는 5번째 샷으로도 온 그린에 실패했다. 오르막을 감안해도 150야드 남짓한 거리를 공략하지 못하는 순간, 그는 경쟁에서 멀어졌다.

-트리플 보기. 지켜보는 제가 다 안타깝습니다.

-졸지에 5위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이제야 공 프로가 왜 갑자기 장타를 날렸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이시카와가 성가실 정도로 따라붙는 게 신경 쓰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란 듯이 장타를 때렸고 준비되지 않았던 이시카와는 걸려들고 만 것이죠.

-에이……. 뭐 그렇게까지 했으려고요. 하하하.

허 해설은 더 이상 사족을 달지는 않았다.

확인된 사실이 아닌 추측이기 때문이고 사실이더라도 굳이 필상에게 좋지 못한 이미지를 씌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투어를 뛰어 본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후 이시카와가 갑자기 줄을 타고 내려올 리 없지 않겠나.

“진짜 아깝네요!”

“후반은 안전하게 가자.”

“네.”

아주 멋진 티샷을 했고 세컨샷도 잘 붙였다.

하지만 2m 버디 퍼팅이 빗나가는 순간, 필상은 조심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막연한 불안감이 아니었다.

실제 자신이 봤던 것보다 라이가 반 컵이나 더 먹는 것을 보며 자신의 감각이 정상이 아니라는 깨달았다.

딱히 가슴이 답답하지는 않았으나 감각이 살아 있지 못하다면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홀들의 세팅은 최악이었다. 핀을 좌우측 위험지역에 바짝 붙여 놨을 뿐더러 경사에 꽂아 놔 까딱하다가는 쓰리 퍼팅도 할 것 같았다.

-16언더에서 더 이상 줄이는 것은 무리일까요?

-인코스에서 앞선 선수들이 대부분 타수를 잃었습니다. 경기 중인 선수가 그걸 파악하지는 못했을 텐데, 조심스러운 경기를 펼치는 공 프로의 실전 감각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두 타 정도 더 줄였으면 좋겠는데, 좀 아쉽네요.

-과욕입니다. 이미 2위와 5타가 차이 나는데, 괜한 욕심을 부리다 추격의 빌미를 제공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허 해설의 강경한 대꾸에 임한석 캐스터는 찔끔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경기 중인 선수가 시청자나 중계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무리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플레이를 꿋꿋하게 이어 가는 모습을 보며 골프의 진가를 느껴야지 마치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에게 홈런을 바라듯 한 방을 요구하는 것은 골프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8번 줘.”

“네.”

6개 홀을 연속해서 파로 막은 필상은 16번 홀에 와 있었다. 티샷 비거리는 282야드, 비교적 짧았지만 남은 거리는 151야드로 평소에 피칭웨지면 충분하다.

컨트롤을 하더라도 9번 아이언을 들면 되는데, 8번을 요구하는 필상에게 일단 군소리 없이 클럽을 건네줬다.

하지만 루틴을 밟아 가는 필상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성호의 표정에는 전에 없던 초조함이 묻어났다.

조금씩 이상한 기미가 느껴지더니 급기야 지난 홀부터는 시시때때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인터벌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퍽!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프로라고 뒤땅을 때리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 주인공이 정확한 샷의 대명사인 필상이었기에 다들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얼른 다가간 성호는 클럽을 받아 들며 필상의 눈치를 살폈다. 언제나 담담한 표정이라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성호는 느낄 수 있었다.

굳은 표정 안에 숨어 있는 난감한 기색을.

“3온 1퍼팅하면 되죠.”

“으음……. 물 좀 줄래?”

“네. 여기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필상이 그린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럴 때는 갤러리가 많아 붐비는 것이 다행이었다.

진행 요원들이 길을 터느라 빨리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이용해 필상은 보행 중에도 수축된 기운을 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지난 밤 그 고생을 하고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나름 그 점을 고려해 최대한 편안한 마음으로 라운드에 임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뒤땅을 때렸지만 잘도 굴러간 공은 25야드 지점에 멈춰 있었다. 60도 웨지를 들고 로브 샷을 하려던 필상은 피칭웨지로 바꿨다.

아무래도 실수를 감안하면 안정적인 칩 앤 런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맺히지 않는 이미지를 그리며 빈 스윙을 몇 차례 하던 필상에게 엉뚱한 소리가 들렸다.

“40초 지났습니다.”

이시카와였다.

샷 지점에 도착한 선수는 자신의 차례가 오면 40초 이내에 샷을 하는 게 규정이다. 하지만 시계가 걸려 있는 것도 아니라서 조금 더 빨리, 또는 약간 늦는 경우는 흔하다.

물론 EPGA의 경우 진행 요원이 샷 클락을 재서 규정에 따라 적용하지만 아직 일본 투어는 그 정도로 까다롭지는 않다.

게다가 그린 주변에서 첫 플레이어로 인정되기 때문에 10초의 여유가 더 주어진다는 것을 아는데도 그는 40초를 언급했다.

‘저 새끼가!’

흥분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놈의 의도를 알면서도 은근히 부아가 치민 필상은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봐야 1차는 경고에 불과하지만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핀에 붙이지 못한 필상은 보기를 적고 말았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도발한 이시카와보다 그걸 감내하지 못한 자신에게 더 큰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럴 때 발끈할 것 같은 성호가 꾹 참고 필상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드 잡을까?”

“아니요. 형의 드라이브 안전 모드는 아이언보다 방향성이 더 좋잖아요. 그냥 정확히 대기만 하세요.”

“좋아!”

17번 홀은 535야드 파5 홀이다.

또 다른 인코스 파5 홀인 11번을 파4로 변경한 탓에 이 홀도 파4로 변경하지 못했을 뿐, 평균 타수 4.10은 오히려 웬만한 파4 홀보다도 타수가 낮게 나온 셈이다.

전체적으로 내리막이라서 장타자들은 2온도 가능한 홀로, 필상도 이틀 내내 버디를 잡았던 홀이다. 하지만 필상은 3온 2퍼팅을 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티 그라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성호가 말한 대로 정확히 맞춰 페어웨이를 지키는데 전력했다. 결과 또한 나쁘지 않았다.

“거봐! 마음을 곱게 써야지!”

필상이 보기를 기록하자 이시카와의 표정이 밝아졌다. 첫 대면했을 때의 예의 바른 모습은 오간데 없고 남의 실수가 자신의 행복인 양 의기양양했다.

그래서인지 티샷의 비거리가 무려 328야드나 찍었다. 페어웨이도 잘 지켜 2온에 이글도 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이 세컨샷을 잘라 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너무 신바람을 냈는지 210야드를 아이언으로 공략했는데, 그린을 휙 넘어 그린 뒤 벙커로 굴러들고 가고 만 것이다.

참지 못한 성호가 한 마디 툭 던지자 필상도 보탰다.

“그놈 참 힘 좋네!”

“크크크……. 이글을 해도 시원찮은 판에, 파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

이번 어프로치는 짧았다.

정확한 탄도와 공이 떨어질 지점을 확인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힘 조절이 되지 않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이시카와가 벙커에서 철퍼덕대더니 4온한 지점도 필상의 버디 퍼팅 거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필상은 버디에 실패했다.

라이는 물론 홀컵에 이르지도 못한 소심한 퍼팅 스트로크를 했다는 것이 못내 씁쓸했다. 하지만 파로 만족했다.

40초룰 운운하던 동반자는 타수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24도 유틸!”

“오케이.”

마지막 홀이 파3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선수 간의 타수가 잘 바뀌지 않아 반전의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인데, 그런데도 주최 측이 홀의 순서를 바꾸지 않은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227야드의 포대 그린이고 평균 타수가 3.39가 나올 정도로 까다로운 홀이기 때문이다. 보통 파4나 파5 홀에서는 그린을 노릴 거리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난해했다.

하지만 모두 끝났다는 느낌 때문인지, 티 그라운드에 올라서는 필상은 인코스 들어 처음으로 이미지가 정확히 맺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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