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02화 (102/354)

102. 미치도록 강한 만족감

“제가 곁에 있으니까 걱정 말고 가서 쉬세요.”

“형이 저러고 있는데, 그냥 가도 될까요?”

“오빠가 보통 사람은 아니잖아요. 대책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전에는 침실이 여러 개인 숙소를 얻어 함께 지냈다.

하지만 둘이 장래를 약속한 이후로 필상은 성호에게 옆에 붙은 숙소를 구해 주고 모모코와 단둘이서만 방을 사용했다.

남녀의 은밀한 관계는 성호에게도 드러내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상황은 그도 알아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특이하게 비칠 행동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제 숙소로 돌아가는 성호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도라도 닦나?’

설명하지 않았기에 필상의 행동은 좀 괴이해 보였다.

좌정한 채로 눈을 감고 명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연습도 뿌리치고 해야 할 행동인지 납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한결 놓인 이유는 필상이 뭔가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난번처럼 갑자기 쓰러지는 일이 재발하는 상황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그 아픈 기억을 떠올리면 늘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는데 이제야 한숨 돌렸다.

성호는 필상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후 많은 것을 얻었다. 경제적인 안정은 물론 골프에 대한 한층 성숙된 이해와 프로 선수가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한 성찰이 이뤄져 당장 2부 투어에 참가해도 이전보다 훨씬 나은 경기력을 보일 것 같았다.

“물론 선수로 뛸 이유는 없지!”

올 하반기 자신의 수입이 KPGA 상금왕에 버금간다는 사실도 놀랍고 캐디라는 직업에 대한 애착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이 일에 애착을 가지게 된 까닭은 필상이 자신을 신뢰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따져 보자면 꼭 자신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나름 생각도 많이 해 보고 노력하고 있지만 캐디로서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큰 역할을 한 적도 없다.

받은 만큼 기여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인위적인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필상이 경기에 집중하도록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으음……. 쉽지가 않네!’

금방이라도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수축된 기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경기 중에 갑자기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극심한 답답함을 느꼈을 때는 정말 조마조마했었다. 이러다 먼저처럼 갑자기 정신 줄을 놓으면 어쩌나 싶어 최대한 길게 호흡하며 지루하다 싶을 만큼 더디고 안정된 경기를 펼쳤다.

그런데도 압박감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필드 위에서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기가 끝난 뒤, 집중할 필요가 없어지자 크게 염려될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이대로 쉴 수만은 없었다.

내일을 위해서 자신에게 닥친 난관을 어떻게든 풀어내야만 했다. 문제는 이전에 익힌 방식에 따라 호흡을 반복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더러 반쪽 선수가 되란 말이냐!”

지금 같은 상황이 호전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대회 출전은 2주에 1번꼴로 제한할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도 눈부신 성적을 거뒀으니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는 출전 제한을 있는 그래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의지와 노력만 있다면 길은 열릴 것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잠을 자야 할 시간이 지났음을 알면서도 실내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불확실한 가능성이지만 어차피 내일 경기 중에 쓰러진다면 휴식은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이다.

든든하게 입었지만 12월로 접어든 밤의 기온을 온몸으로 느끼며 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오금이 저리고 허리가 쑤셨고 슬슬 오한이 침습해 안락한 침대가 그리웠지만 필상의 굳게 다문 입술은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과 같았다.

“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그냥 까만 밤이 하얗게 무르익어 갈 무렵이라고 느껴지던 어느 한 순간,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견딜 수 없이 불편하던 몸이 편안해진 것이다. 어디가 쑤시거나 아프지 않았다. 또한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고 전신에 따스한 온기가 휘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인도 파악했다.

들이마신 숨이 희미하게 찾아가던 대상을 보다 명확히 인지하고 빠르게 다가가 움츠린 기운을 다독이듯 휘감아 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코를 통해 배출되는 날숨의 경로도 명확해졌다.

‘이건가?’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스스로 반응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이 점차 뜨거워졌으며 수축되었던 기운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스르르 풀린다는 것을 느꼈다.

미치도록 강한 만족감을 느꼈으나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호흡을 반복한 필상은 급기야 답답함을 어느 정도 해소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오빠!”

“…….”

“6시에요.”

“…….”

필상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더도 말고 한두 시간이면 될 것 같은데, 밤을 꼬박 새우며 필상을 바라보고 있던 모모코의 입장을 생각하니 일단 자세를 풀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신한 그녀에게 편히 쉬라고 미리 당부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불찰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눈을 뜨고 일어섰다.

대략 10시간을 좌정하고 있었음에도 일어서는 데 아무런 불편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일단 거실로 들어왔다.

모모코의 불안한 눈빛을 보자 탓하고 싶었던 일말의 마음조차 깨끗이 사라졌다.

“잠을 안 잔 거야?”

“응. 오빠가 한데서 그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자.”

“나 믿지?”

“응.”

“그럼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자. 확실히 말하는데 나 이제 해법을 찾았어.”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좀 전에 봤잖아. 밤새 앉아 있었는데도 이렇게 멀쩡히 움직이는 거.”

“잠깐만요.”

모모코는 필상의 이마에 손을 댔다.

초겨울 차가운 밤기운에 감기 몸살이라도 걸리지 않았는지 확인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긴 시간을 꾹 참고 기다린 것도 참으로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그녀의 성격이라면 열두 번도 더 나와 참견했어야 한다. 하지만 날이 밝은 뒤에야 기척을 한 것은 인내의 한계를 보여 준 것이고 그 믿음을 다시 묻는 것조차 어리석은 행위라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게다가 필상이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모모코는 필상의 뺨에 뽀뽀를 쪽 하고는 이내 조르르 침실로 들어갔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내 여자!”

그 말을 남긴 필상은 어느새 하얗게 밝은 새벽을 느끼며 다시 테라스의 의자 위에 좌정했다.

그리고 모모코가 부지런히 아침 준비를 마칠 때까지 자신과의 싸움을 마치고 거실로 돌아왔다.

“짠!”

“뭐야?”

“아침 식사요?”

“냄새는 일단 합격인데, 어디 맛 좀 볼까?”

“맛없어도 다 먹어요.”

모모코가 필상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한 것은 처음이다.

자러 들어갔던 그녀는 슬그머니 빠져나가 마트에서 음식 재료들을 사 왔다. 어차피 콘도에는 취식을 위한 가재도구들이 마련되어 있어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열심히 스마트 폰을 검색해 난생 처음 만든 음식이 제 맛을 낼 리는 만무했다. 그것이 아주 간단한 ‘영양죽’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필상은 듬뿍 듬뿍 떠서 아주 맛깔스럽게 먹었다. 맞은편에 앉아 지켜보던 모모코도 용기를 내 수저를 들었다. 분명히 자신이 살짝 떠먹었을 때는 아주 밋밋한 맛이었기 때문이다.

“으!”

“왜?”

“너무 싱거워서 소금을 넣었는데, 너무 많이 넣었나 봐요.”

“아니. 난 맛있는데?”

한 치의 거짓도 없어 보이는 필상의 대답에 고개를 가로 저은 모모코는 다시 한 수저 더 먹어 봤다.

그런데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본인은 먹을 수 없었다. 그새 한 그릇 뚝딱 비운 필상이 샤워하러 가는데 생수를 한 병 들고 들어가는 것을 보며 웃음이 터졌다.

차마 앞에서는 맛있다고 했지만 샤워하러 들어간 필상이 생수 한 병을 다 비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행복했다.

“올 겨울에 엄마한테 배우면 나아지겠지.”

모모코의 예상대로 생수 한 병을 다 마시고 샤워를 하러 들어간 필상의 첫 마디는 그거였다.

그도 모모코가 지금껏 요리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맛있게 먹은 이유는 다시는 음식을 하지 않겠다고 두 손을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도 전문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음식 만들 사람을 고용하면 되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다.

가족들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 일은 그녀는 물론 자신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안녕하십니까? 공 프로님.”

“반갑습니다. 이시카와.”

“오늘 함께 멋진 경기를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좋죠. 우리 서로 즐겁게 칩시다.”

“한 수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하겠습니다.”

“저 또한 그러지요. 하하하.”

1번 홀 티 박스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다가 예의를 차린 선수는 이시카와 료, 1991년생으로 올해 29살이다.

만 17세였던 2008년에 데뷔한 그는 2009년 4승, 2010년 3승을 거두며 일본 골프를 대표하는 강자로 부상했었다.

시원한 장타와 잘생긴 외모로 발군의 스타성을 갖춘 덕분에 일본을 넘어 세계 골프계를 평정할 스타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너무 일찍 스타가 된 게 오히려 악영향을 미쳤을 거야!’

‘스마일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가 2011년 이후 9년간 기록한 승수는 5승에 불과했다. 필상이 지난 5개월 여 동안 JGTO에서 거둔 승수와 동일하다.

일본 팬들의 열렬한 기대를 등에 업고 세계무대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며 ‘우물 안 개구리’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지나친 기대가 오히려 짐이 되었는지, 2016년 8월 우승 이후 2년 반 동안 우승이 없어 이젠 언론의 주목도 뜸했다.

아직 한창인 나이인데 마치 쇠락한 스타처럼 전락했다. 그런데 이번 최종전에서 괄목할 기량을 과시하며 필상의 파트너가 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뜨거워졌다.

“듣던 것과는 달리 제법 싸가지가 있는 녀석이네요.”

“너보다 한 살 위 아냐?”

“맞아요. 사람 완전히 기를 죽였던 엉아죠. 그런데 지금 보니까 좀 안돼 보이기는 하네요.”

“상대 선수를 너무 감정적으로 보는 건 좋지 않아. 같은 프로로서 실력과 매너만 평가하면 되지. 굳이 사람 됨됨이까지 따질 건 없잖아.”

“그렇기는 하네요. 하지만 태도가 상당히 좋아진 건 사실인 것 같아요. 저 엉아 건방지기로 유명했거든요!”

“실패는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법이지.”

“한때는 정말 잘나갔는데! 하기야 천하의 우즈도 그렇고 한 번 무너지니까 황제라는 별명이 무색하긴 하더라고요.”

-오늘 챔프 조의 매치 업이 상당히 흥미롭죠?

-그렇습니다. 우리 공 프로는 첫날부터 안정된 경기력을 보였지만 이시카와 료가 이렇게 치고 올라올 것이라고 예상한 전문가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고 만방에 알리듯 무섭게 치고 올라왔습니다.

-첫날 -3, 둘째 날 -6, 스코어만 본다면 허 해설님의 평가가 맞는 것 같습니다만 경기 내용은 어땠나요?

-이시카와 하면 떠오르는 것이 뭡니까?

-출중한 외모를 말씀하시는 건 아닐 테고, 호쾌한 장타 아닌가요?

-맞습니다. 골프팬이라면 거의 모두가 그의 장타 비결에 대한 분석 기사나 동영상을 봤을 겁니다. 그런 이시카와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장타를 버리면서 비로소 타수를 줄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예선전 36홀 집계를 보면 페어웨이 안착률과 그린 적중률이 상당히 높았다. 특히나 과거 그의 티샷 정확도는 투어 하위권인데, 이번에는 전성기에 버금가는 기량을 과시했다.

허 해설의 말처럼 스윙이 일관성이 좋아졌는데, 그게 다 필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대체 연승 가도를 달린 비결이 뭔지, 필상의 모든 경기를 면밀히 분석했기 때문에 처음 만났는데도 마치 친했던 사람처럼 인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의 맞대결의 양상도 팬들의 예상과는 달리 팽팽했다. 오히려 티샷 비거리가 필상보다도 짧았으며 먼저 그린에 올리면서 은근한 압박감을 주기도 했다.

“오호! 왕년의 기량이 나오는 건가요? 료!”

“스윙이 아주 탄탄하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이야.”

“거기엔 동의해요. 하지만 저는 왜 쟤가 형을 따라 한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요? 원래 컨트롤 샷보다는 풀스윙을 좋아하던 스타일이잖아요.”

“풀스윙이 멋지긴 하지. 하지만 스스로 한계를 느꼈다면 누구든 경기 스타일을 바꿀 수는 있지. 그게 더 좋은 성적을 낸다면 더더욱 그럴 거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제 버릇 어디 남 줄 수 있나요. 좀 더 두고 보세요.”

프런트나인의 세팅이 제법 까다로웠으나 그는 필상과 똑같이 -4로 선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코어 카드를 따로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홀의 기록이 일치했다.

그것은 곧 둘이 3타 차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데,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는 스코어를 그대로 용납할 수는 없었다.

본인은 언제 갑자기 컨디션 난조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성호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본 필상은 한 타임 빠른 승부수를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핸디캡 1번인 10번 홀에 들어섰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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