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01화 (101/354)

101. 변함없는 진리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일본인은 드물다.

슈와첼은 필상이 일본인이 아닌 한국 선수라는 것도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귀에도 또렷이 들리는 필상의 말을 듣고는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일생일대의 최고 장면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같은 그 웨지 샷은 포털에 본인을 검색하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명장면이지만 자신이 무시했던 선수의 입에서 나오자 미안하고 또 고마웠던 것이다.

“퍼펙트 콩, 그걸 봤습니까?”

“물론이죠. 세계 랭킹 9위까지 올랐던 당신과 함께 플레이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열심히 찾아봤습니다.”

“아! 그랬군요. 괜히 미안해지네요. 하하하.”

“일본은 처음이시죠?”

“아뇨. 처음은 아닙니다.”

“저도 어차피 이곳이 타국입니다. 저는 한국 선수거든요.”

“아! 코리아! KJ CHOI와 YE YANG과 같은 나라 선수였군요. 그 두 선수는 정말 집념이 대단한 선수들인데, 그리고 보니 제가 너무 건방을 떤 것 같아 쑥스럽네요.”

“아닙니다. 부디 좋은 경기를 펼쳐서 제가 한 수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한 수 잘 배우겠습니다. 하하하.”

자신의 실수가 부끄러웠는지 연신 웃음으로 때웠지만 그 대화로 인해 경기 분위기는 한결 편해졌다.

한두 홀은 상관없지만 무려 4시간 이상을 함께 경기에 임해야 하는데 기왕이면 불편하지 않은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한 번 마음을 터놓으니 그는 오히려 성가실 정도로 말이 많았다. 언뜻 보면 대회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친구와 즐기는 라운드 같았는데 그 또한 나름의 경기 운영 방식인 것 같았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선수들은 경기에 몰입하면 동반자들과 대화도 꺼리는 편이다. 집중력이 흩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인데 보다 큰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기에 적당히 어울렸다.

“너무 수다스러운 거 아닌가요?”

“내 샷을 할 때는 집중해야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스윙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두고 보자고.”

검증되지 않은 것을 장담할 수는 없었는데 다행히 필상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3오버로 부진하던 슈와첼이 6, 7, 8번 홀에서 연속 버디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사이 필상도 한 걸음 더 나갔다.

둘의 버디 쇼에 오히려 맥이 빠진 사람은 존스였다.

말이 통했던 슈와첼이 자신은 팽개치고 필상을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에 심적 타격을 입은 듯 보였다.

-인코스의 플레이가 좀 아쉽네요.

-실제로 타 선수들의 성적도 공 프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반에 5타를 줄인 공 프로가 난해한 후반에 안전한 공략을 한 것은 다분히 전략적인 공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공동 선두지만 추격당할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그래 봐야 한두 타 차일 겁니다. 언제나 꾸준한 공 프로의 기량을 생각하면 -5도 괜찮은 스코어입니다.

후반에는 버디와 보기를 1개씩 맞바꿔 최종 스코어 -5, 작년 우승 스코어가 -5에 불과한 걸 감안하면 괜찮은 성적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날씨가 춥고 바람도 강해 대다수의 선수들이 타수를 줄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나 날씨가 따스한 일정이라면 그보다는 훨씬 나은 성적이 예상되기에 다들 아쉬워했다.

“안녕하십니까?”

“공 프로, 오늘도 수고 많았네. 어서 샤워하고 나오게. 오늘은 내가 거하게 밥을 사고 싶으니.”

“아, 네.”

경기를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온 필상은 경기 내용을 복귀할 겨를이 없었다. 자신을 기다리던 모모코의 부친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미야는 상당히 반갑게 맞이했지만 필상의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걸 보며 싱긋 웃는 모모코가 얄미웠지만 샤워하는 내내 어떻게 말을 풀어야 할지 고심을 거듭했다.

“캐디들도 데려와도 되는데…….”

“아닙니다. 오늘 저희 둘이 아버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당장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 아니라면 놀랄 일도 없으니 편하게 말해 보게.”

‘헉!’

선수를 친 것일까?

당황한 필상이 말문을 열지 못하자 모모코가 입을 뗐다.

“아빠. 저희 결혼하려고요.”

“저, 정말이냐?”

“아빠가 그러셨잖아요. 엄마 닮은 제가 아빠 닮은 아들 하나 낳아 주면 좋겠다고.”

“그, 그런 말을 내가 언제 했지?”

미야도 당황한 게 분명했다.

세상 살 만큼 산 경험이 있어도 하나뿐인 딸의 결혼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더는 비겁하게 물러설 수 없어 필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모코의 부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저희 결혼하겠습니다.”

“이, 이보게. 어서 일어나 앉게. 왜 이러나?”

“제가 미숙해서 덜컥 아이가 생겼습니다.”

“아이? 모모코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인가?”

“네. 송구합니다.”

“허어…….”

반대하고 말고 할 여지가 없다.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었다는데 어쩌겠는가!

당장 애를 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잠시 입을 열지 못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필상을 일으켜 세웠다.

“자네. 참 무서운 친구로세.”

“송구합니다. 하지만 저희 둘, 아버님이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예쁘게 잘 살겠습니다.”

“딸 가진 나야 언젠가는 겪을 일이지. 하지만 시기가 너무 일러 당황스럽군. 그 마음은 자네도 이해해 줘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모모코를 이렇게 잘 키워 주셨는데, 그 보답은 평생토록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하하하. 그런 마음이라면 내 서운했던 마음은 한결 가시는군.”

무슨 말인가 했더니 결혼을 승낙한 미야는 다소 엉뚱한 제안을 했다. 모모코가 기겁했지만 제지시킨 필상은 그의 말을 다 들은 후에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좋습니다. 저희들도 아버님의 사업에 적극 동참하겠습니다. 다만, 투자한 만큼 지분을 보유하고 행사할 것이니 그 점은 아버님도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하하하.”

미야는 모모코의 일에서 손을 떼며 골프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골프장 부킹과 관련된 소규모 사업을 했는데, 그는 아예 골프장을 운영하고 싶은 의지를 밝혔다.

일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골프장이 있는데, 운영상의 어려움 때문에 도산하는 회사가 부지기수다. 특히나 회원제 명문 골프장일수록 경영 악화가 심각해 그런 골프장을 위탁경영하는 전문 회사가 크게 빛을 보는 시기였다.

“오빠. 아빠의 제안을 그냥 무시하세요.”

기껏 허락을 받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모모코는 부친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퍽이나 성에 차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은 그녀의 품에 다독이며 속내를 밝혔다.

“괜찮아. 나도 골프장 운영과 관련된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해.”

“한두 푼이 드는 일도 아니고 아빠가 그런 일을 잘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아버님? 그분은 그냥 대표이사 자리만 지키시면 돼. 일은 어차피 젊고 능력 있는 전문가들이 하는 거니까.”

“어? 뭔가 준비한 게 있나 보군요.”

“응. 일본에서 먼저 시작할 줄은 몰랐는데 이 대표와는 전부터 골프장 운영에 대한 의논을 가끔 했었어.”

사실이다.

아직 구체적인 사업 구상은 나오지 않았지만 필상은 자신 소유의 골프장을 가지는 게 꿈이었다.

처음 캐디 일을 시작할 때부터 친환경적인 골프장 주변에 자신의 집을 짓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그게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대표에게 언뜻 뜻을 밝혔고 그동안 적잖은 대화도 나눠 가용한 계획들을 잡는 중이었다.

이미 자신의 계좌에는 평생 쓰지 못할 거액이 쌓였고 앞으로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익이 보장되기에 헛된 꿈이 아니었다.

한국보다 일본이 더 좋은 환경이라는 점도 알고 있어서 미야의 제안을 듣는 순간, 한 번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흐흐흐. 우리 골프장이 생기는 건가요?”

“응. 노후를 생각하면 매일 우리 골프장에서 라운드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지 않아?”

“우리 애들도 같이 공을 치면 좋겠네요. 어머, 그때는 내가 아줌마가 되는 건가요?”

“하하하.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거야, 당신은.”

“그래도 싫어요. 전 절대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고 싶지 않다고요.”

“그래. 난 아저씨가 되고 또 할아버지가 될 텐데, 언제까지고 젊은 아내와 같이 살면 더 좋겠지.”

“그럼 저도 아줌마가 될 수밖에 없는 건가요?”

모모코는 나이 먹은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기야 스무 살인 그녀가 먼 미래를 연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필상이 늙어 간다는 생각을 하자 자신도 언제까지 마냥 젊은 게 좋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아이를 가졌지만 엄마가 된다는 생각도 아직은 익숙하지 못한 그녀가 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여하튼 큰 산을 넘었다.

모모코의 부친도 일본 골프팬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했다. 과연 전성기를 맞이한 모모코가 결혼과 출산을 위해 한 시즌을 접는 것을 어찌 생각할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굿 샷!”

“고맙습니다.”

“어제 보니까 장타도 가능하던데 왜 그걸 아끼죠?”

“정확성 때문입니다. 실험 결과 비거리를 늘리면 페어웨이 안착률이 급격히 떨어지더군요.”

2라운드도 필상은 슈와첼과 함께 경기를 펼쳤다.

주최 측이 이틀 동안 같은 조로 편성한 이유를 생각하면 상당히 괘심했지만 어차피 결선은 성적의 역순이라서 그와 함께 경기하는 것을 즐기기로 했다.

그나마 어제 친해진 뒤로 그는 오히려 필상의 샷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을 묻곤 했다.

어제 346야드를 날렸던 3번 홀에서 오늘은 290야드만 공략하자 그의 입에서 장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필상은 마치 그가 들으라는 듯, 장타가 가진 단점에 대해 언급했다. 하지만 그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물론 정확성의 결여는 인정하지만 그래도 자꾸 시도를 해야 좋아지지 않을까요?”

“시합은 시험을 위한 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없는 샷은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거죠. 프로라면 당연히 최상의 결과가 보장되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성적으로 말을 해야 한다는 거군요.”

최근 PGA와 EUR은 급격한 비거리 향상을 거듭해 왔다.

장타자들이 정확성까지 갖추면서 그들의 성적이 상위권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추세를 쫓아가다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선수들도 많다는 게 필상의 분석이다.

특히나 골프를 직업으로 가진 프로 선수라면 당연히 결과로 말을 해야 옳다. 거리를 줄여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면 고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슈와첼이 오늘은 아주 안정된 기량을 보여 주네요.

-마치 우리 공 프로를 따라 하는 것 같습니다만 저런 모습이 바로 그의 진면목이라고 봐야 합니다.

-절대 세게 치지 않네요. 그런데도 성적은 어제보다 훨씬 좋아졌고요. 역시 골프는 거리가 아니라 일관성이라는 게 증명이 되는 건가요?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악착같이 더 보내는 경쟁은 무의미하죠. 120야드 세컨샷이 90야드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거리 욕심을 부리다 불필요한 타수를 잃느니 차라리 아이언 샷을 가다듬는 게 훨씬 유익하죠.

-두 선수가 무섭게 치고 나가며 마치 매치 플레이를 하는 것 같은지 갤러리들이 더 몰려드는 것 같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다고 하네요.

필상과 슈와첼은 2라운드에서 나란히 7타를 줄였다. 필상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에 그는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12로 단독 선두로 올라선 필상과 슈와첼 사이에는 -9를 기록해 모처럼 언론의 주목을 받은 이시카와 료만 있을 뿐이다.

결선부터는 2인 플레이로 진행되기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하는 슈와첼에게 필상은 남아공에서 펼쳐지는 던힐 챔피언십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랬더니 크게 반색하며 호텔에 머물지 말고 자신의 집에 초대하겠다고 하는 통에 일단 그러겠노라 답을 줬다.

그런데 저녁을 먹은 필상은 연습장이 아닌 숙소로 돌아왔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연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란다에 편한 의자를 내놓고 좌정한 필상이 거실로 들어올 생각을 않자 지켜보던 성호는 모모코에게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이 대체 왜 저러죠?”

“몸이 안 좋은가 봐요.”

“어쩐지 16번 홀에서부터 클럽을 짧게 잡고 안전하게 치던데, 그게 혹시…….”

가장 가까이에서 필상을 보필하던 성호도 찜찜한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떠올리고 싶은 않은 기억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부정을 탈까 저어해 애써 말을 아꼈다.

모모코를 제외하면 그동안 필상의 남다른 능력에 대해서 그만큼 잘 아는 이가 없다. 기적 같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치는 각별한 능력은 범상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경기 중에 갑자기 쓰러진 것도, 다음 날 멀쩡하게 일어난 것도 절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도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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