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99화 (99/354)

099. 외인 구단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는데 어쩌죠?”

“어쩌긴. 시즌도 끝났는데 그냥 편한 대로 해.”

“오빠랑 같이 하고 싶어서 그러죠.”

그 말은 의미심장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본가에서는 이미 둘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만 모모코의 가족들에게는 아직 알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발표할 수는 없었다.

“일단 아버님께 말씀부터 드려야지.”

“오실 거예요. 내일.”

딸 가진 부모가 일찍 시집가는 것을 원할 리 없다.

게다가 모모코는 일본은 물론 아시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프로 골퍼다. 아직 세계적인 명성은 얻지 못했지만 그녀의 잠재력에 대해서는 다들 인정한다.

곧 미국 진출에 이어 전대미문의 기록을 낳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능력 있는 딸인데 결혼이라니?

하지만 다른 도리는 없을 것이다.

아이를 가졌기에.

그래도 모모코의 부친을 만날 생각을 하자 좀 답답했다. 서로 사랑해서 아이를 가진 것인데, 아버지 입장에서는 무지 괘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미 말씀 드린 건 아니지?”

“그건 오빠가 해야죠.”

“으음……. 그러지. 하지만 인터뷰는 대회 끝나고 하자.”

“좋아요. 언제 하든 밝히기만 하면 되요.”

그 말은 좀 의외였다.

보통 스무 살이면 자기애가 절정일 나이다.

또한 어딜 가나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과 사랑받는 그녀가 뭐가 아쉬워서 서두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익히 아는데, 독점욕까지 보이는 것은 다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필상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속궁합이다. 강한 중독을 느낄 정도로 만족스러웠고 건강까지 보장하는 남자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지 않던가.

필상이 자신의 강점이 무엇이지 간과한 것이다.

“내가 그렇게 좋아?”

“치! 좋아요 그래. 좋아서 매일 살을 부대끼며 같이 있고 싶고 멀어지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모모코.”

막상 대놓고 말하자 당황스럽고 미안했다.

자신이 선택한 여자다. 평생을 같이 하는 것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해 미야에게 장담까지 했었다.

그래서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마음의 문도 걸어 잠갔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 둘은 터진 봇물처럼 뜨거워졌고 그 어떤 선물보다도 고마운 결실까지 얻게 되었다.

내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녀가 좀 더 편안해질 수 있도록 배려할 필요를 느꼈다.

“난 너 이외에 어떤 여자도 마음에 두지 않을 거야.”

“흐흐흐…….”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도저히 참지 못한 기쁨이 야릇한 웃음으로 흘러나왔고 말없이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는 모모코와 같은 여자는 드물다. 특히나 결혼을 염두에 두면 이런 저런 일로 많이 다툰다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JGTO 메이저 대회인 일본시리즈 JT컵 생중계를 시작하겠습니다. 11월 말인데 날씨가 아주 화창하죠?

-초겨울 날씨가 이렇게 따스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회에 참가 선수들의 보다 멋진 플레이가 예상됩니다.

-지난 주말에는 아주 훈훈한 소식이 들려왔죠?

-아, 네. 두 연인이 동반 우승 소식을 알려 와 골프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아주 즐거운 한 주를 보낸 것 같습니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이번 주가 절정을 이루겠지요?

-무서운 기세로 JGTO를 평정하고 있는 공필상 프로, 그가 과연 시즌 10승 달성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반드시 우승하고 귀국했으면 좋겠네요.

“우리 조 편성은 완전히 외인구단이네요!”

“난 아주 좋은데?”

“외국 선수들만 셋을 묶어 둔 이 수작은 뭔가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아요.”

1라운드 티오프 시간에 배려가 없었지만 아직도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라고 인정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조 편성은 다분히 의도가 엿보였다.

투어에서 장타자로 유명한 호주 출신 존스는 이미 한 차례 겪어본 적이 있어 상관없지만 초청 선수로 참가한 남아공의 찰 슈와첼은 격이 다른 선수다.

2011년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그는 당시 세계 랭킹 11위까지 올랐던 실력이 검증된 선수다. 1984년생으로 통산 15승을 거둔 그를 이번 대회에 초청하기 위해 주최 측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라고 봤다.

“예선 이틀 동안 슈와첼과 맞대결을 펼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야.”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가 333야드더라고요. 평균이!”

“알아. 마음 놓고 갈기면 웬만한 파4는 다 1온을 시킬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느낄 테고.”

“그런데도 부담되지 않나요?”

“글쎄……. 부담은 그 양반이 가지게 만들어야지. 적어도 여긴 내 나와바리잖아.”

“하하하. 어련하시려고요!”

필상의 능력을 철석같이 믿는 성호도 슈와첼의 이름이 주는 부담감은 쉬이 간당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은 도리어 기회라고 생각했다. 연말에 참가할 유러피언투어의 전초전을 치른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안녕하십니까?”

“으음……. 오랜만입니다.”

동반자 둘은 미리 1번 홀 근처에 도착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인파를 몰고 다가온 필상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하자 존스는 마지못해 인사했다.

이전에 함께 라운드를 돌며 크게 낭패를 본 기억 때문인지, 최근 상승세가 부담스러운 건지는 몰라도 웃는 낯을 외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딱 벌어진 탄탄한 체구의 슈와첼은 딴전을 부렸다. 마치 ‘네 까짓 게?’ 그런 느낌을 줬는데 픽 웃어 넘겼다.

그도 필상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낸 기록 따위는 존중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우우우!”

필상은 웃어 넘겼지만 그 장면을 목격한 팬들은 반응했다.

그들도 슈와첼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지만 필상에 대한 절대 신뢰가 우선인지라 교만한 태도에 야유를 보낸 것이다.

특히나 예의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시선에는 그의 야멸찬 태도는 실력의 고하를 부정당하기 십상이었다.

문제는 그런 반응을 예상 못한 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아주 좋은 대우를 받고 왔을 테니, 일본 팬들이 자신을 환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야유가 터지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하필 아너라는 것이 그에게는 불운이었다.

장내 아나운서의 쩌렁쩌렁 울리는 화려한 소개가 있었는데 멀리 있는 팬들은 박수를 쳤지만 티 박스 근처는 시큰둥했다.

“흔들리겠어!”

“에이……. 설마요.”

“두고 봐.”

1번 홀은 396야드 파4 홀이다.

티 그라운드에 서면 그린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가까워 보이지만, 좌우를 감싼 나무숲은 한국이나 일본 특유의 좁은 페어웨이의 전형이다.

자칫 삐끗하기만 해도 용서가 없는데, 장타자인 그는 통상적인 티샷 랜딩 에어리어를 넘겨 폭이 넓은 페어웨이를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물론 그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다. 하지만 힘차게 휘두른 드라이버 샷은 아주 심하게 감기고 말았다. 뒤에 서 있던 그의 캐디와 진행 요원들이 ‘볼!’을 외치는 가관이 펼쳐지고 말았다.

-어우! 저 정도면 풀 훅 샷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누가 다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1번 홀은 가볍게 출발해야 하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너무 자만한 것 같습니다.

-벌 받은 겁니다!

-네?

-중계 화면에 비치지 않았지만 현지 리포트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 공 프로의 인사를 외면했다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게 사실이라면 안타깝지만 그래도 투어 18년차 프로를 존중하며 중계하는 것이 옳습니다.

-저도 그러려고 했지요. 하지만 생각할수록 괘심하잖아요. 세계 랭킹도 우리 공 프로보다 한참 밑입니다. 겨우 97위에요!

사실이다.

아직 아시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데뷔 5개월 만에 9승을 거둔 필상의 랭킹은 31위였다.

비록 최고의 무대 기록은 없지만 한국이나 일본, 아시안 투어도 랭킹 포인트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상위에 서른 명밖에 없다는 점은 필상 스스로 생각해 봐도 좀 낯간지러운 기록이다.

그래도 슈와첼은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어차피 프로 골퍼의 활동 영역은 겹칠 수밖에 없고 곧 PGA 진출할 게 분명한 선수라면 선배로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합당했다.

“존스는 잘 참네요.”

“경험은 소중한 법이거든! 하하하.”

필상과 맞붙어 낭패를 봤지만 그 역시 올해 1승을 거뒀고 성적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필상을 다시 만난 그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경기 운영을 보였다.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 296야드지만 몸의 힘을 뺀 그는 285야드만 정확히 공략해 타구를 페어웨이에 안착시켰다.

공이 떨어진 지점을 확인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 것을 보며 그나마 오늘 신경 써야 할 선수는 슈와첼이 아니라 그라는 생각을 했다.

-JGTO 6승, KPGA 2승, 아시안 투어 1승! 5개월 동안 무려 9승에 빛나는 퍼펙트 콩을 소개해 드립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퍼펙! 퍼펙!”

“오빠!”

영어 발음이 엉망인 일본 팬들은 필상의 퍼펙트 콩이라는 닉네임도 길다고 생각하는지 ‘퍼펙!’이라고 외쳐 댔다.

물론 ‘오빠’를 연호한 갤러리들은 필상의 열렬 팬들이었다. 티 박스에 올라선 필상은 자신을 연호하는 팬들에게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했다.

낯선 풍경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열렬히 응원하는 팬들에게 그렇게라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 3번 우드인가요?

-아닙니다. 22도 유틸리티로 보입니다.

-396야드나 되는 파4인데 그래도 되나요?

-하하하. 물론입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그의 5번 유틸리티 비거리는 245야드입니다. 게다가 티에 올려놓고 칠 경우에는 비거리가 조금 더 나갑니다.

-아! 250야드만 보내도 피칭 거리가 남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이언을 웨지처럼 정확하게 보낼 수 있는 공 프로에게 비거리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죠. 1온 할 거리가 아니라면 무리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지켜보는 팬들을 편안하게 해 줄 안정된 샷을 구사할 것 같습니다.

깡!

확실한 방향성을 보장받기 위해 필상은 탄도가 낮은 샷을 구사했다. 저렇게 낮게 깔리면 과연 원하는 비거리를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200야드를 조금 넘긴 지점에 떨어진 공은 하염없이 굴러 248야드 지점에 멈췄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좌우의 밸런스가 정확하게 맞은 페어웨이 정중앙이었다는 것이다.

세컨샷을 위해 이동하는 와중에 슈와첼의 공이 갤러리를 맞춰 의료진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투어프로가 그런 황당한 타구를 날린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 것은 분명했다.

“개 창피!”

“갤러리들 중에 한국 분들도 있을 거야. 말을 가려서 해.”

“아! 그러네요. 하지만 저게 무슨 망신입니까!”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한 대가지. 누구라도 건방을 떨면 저럴 수 있는 거야. 넌 저런 적 없냐?”

“저요?”

바로 부정하지 못하고 되묻는 성호의 음성을 들은 필상은 고개를 돌렸다. 시인이나 다름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거리 체크해 봐.”

“148야드요.”

“피칭.”

한 홀에 굿 샷이 한 번만 나와도 타수를 잃지는 않는다.

무리수를 반복하기 때문에 많은 아마추어들이 더블보기 이상을 기록하는 것이고, 그건 프로들도 다르지 않다.

파4에서는 세컨샷이 좋을 경우, 버디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가장 집중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이미지가 정확히 맺힌 그대로 컨트롤 샷을 구사한 결과는 이날 ‘샷 오브 데이’가 될 만큼 소름 끼치는 결과를 낳았다.

핀 바로 앞에 떨어진 공이 깃대를 맞췄기 때문이다.

“으아! 굿 샷!”

“오빠아아!”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전 개인적으로 공 프로가 하루 빨리 PGA 데뷔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체 뭐가 부족해서 한 해 더 준비를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비거리 때문 아닌가요?

-비거리요? 물론 장타자가 즐비한 투어니까 걱정은 됩니다. 하지만 턱없이 비거리가 짧은 것도 아닙니다. 가끔 보여 줬던 장타가 정확했고 그걸 커버하고도 남을 저런 귀신같은 아이언 샷이 있는데 뭐가 부족하다는 겁니까!

-제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는 데요?

분위기를 맞춰 주기 위한 임 캐스터의 농담이다.

그는 물론 골프에 관심 많은 열성 팬이라면 모르지 않는다. 필상 스스로 밝힌 이유가 그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해되지 않았다.

필상의 실력은 설사 비거리가 부족하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걸 극복하고도 남을 넉넉한 기량을 갖췄음이 분명했다.

그 뒤로 필상이 제 속내를 드러낸 바 없어서 미국 진출에 대한 여론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합리적인 일본 전문가들의 입에서도 똑같은 조언이 흘러나오고 있는 걸 보면 객관적인 평가도 다르지 않다.

그 와중에 존스가 제주도 온에 성공했으나 슈와첼은 레이 업을 해야만 했다. 그의 공이 놓인 지점에서는 그린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어라?”

성호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반응이 나온 이유는 슈와첼의 레이 업 샷이 지나치게 강해 공이 반대편 러프까지 기어들어 갔기 때문이다.

매듭이 한 번 꼬였더라도 안정된 레이 업을 하면 남은 거리는 60야드 안팎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서드 샷을 핀에 붙여 파라도 잡으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련해야 할 그가 스스로 무덤으로 기어들어 가는 상황을 만들었다. 러프에서 핀에 붙이려는 노력은 가상했지만 스핀이 걸리지 않은 공은 그린을 훌쩍 오버하고야 말았다.

이쯤 되면 멘탈이 탈탈 털리지 않을지 오히려 염려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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