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커플 동반우승!
“모모코는 경기 끝났어?”
“잠깐만요. 나도 형이랑 같이 라운드 했잖아요.”
스코어 카드를 제출하고 나온 필상은 모모코의 상황부터 물었다. 하지만 성호도 라운드를 마친 뒷정리를 하느라 이제 막 스마트폰을 켰다.
“모모코도 방금 끝났네요. 4언더 공동 15위…….”
끝난 것만 확인한 필상은 얼른 외진 곳으로 향하며 성호에게 맡겨 놨던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본인은 물론 모모코의 성적도 상관이 없는 듯.
“대체 뭐지?”
아무리 봐도 성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이 보기에 필상은 절대 다정다감한 스타일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팬을 가진 모모코의 마음을 홀로 받는다면 매일 업고 다녀도 시원찮은데, 은근히 보수적이며 무덤덤했다.
그런데 갑자기 모모코를 보러 에히메 현으로 갔던 그날 저녁부터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둘이 계속 소곤거리질 않나, 전화가 와도 잘 받지 않던 필상이 하루에 몇 번씩 먼저 통화를 시도했다. 받지 않으면 문자 폭탄을 보내는 것도 같았다.
“형. 배고파요. 얼른 씻고 밥 먹으러 가야죠!”
마지못해 걸어오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클럽하우스 로비에서 이보영 대표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샤워하면서도 통화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이 대표를 보자 재빨리 통화를 마치고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사람 외톨이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펐지만 돌아온 필상에게 화를 내지는 못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이러깁니까?”
“왜?”
“이 대표님에게 저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고요.”
“아! 모모코에게 가 달라고 부탁했어. 몸이 안 좋잖아.”
“그래도 같이 밥이라도 먹고 보내시지.”
모모코의 컨디션을 걱정하는 것까지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말 못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필상이 경우가 없는 사람도 아니고 일단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나 저녁 식사를 하며 경기 내용에 대해서는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형. 오늘 몇 타 친지 아세요?”
“2언더.”
“순위는요?”
“몇 위지?”
“으으으……. 올림픽 정신은 아니죠?”
“뭔 소리야?”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는 거냐고요. 형의 멋진 플레이를 기대하는 팬들도 한 번쯤은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필상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성호는 괜한 말을 꺼내 매를 번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당황한 빛이 역력했던 필상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래. 내가 좀 심했구나.”
“뭐 그렇게 반성하시라고 꺼낸 말은 아니에요.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실 거라고 믿지만 실수하시는 모습이 전혀 익숙하지 않아서요.”
순위는 공동 28위였다.
1타 차로 다닥다닥 붙어 있어 선두와는 5타 차였지만 28이라는 숫자가 주는 낯설음에 팬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남겼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연습하며 필상은 그제야 모모코의 임신과 관련해 객관적인 상황을 인지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긴 공백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네.’
단순히 아이를 낳는 기간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일단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도 신경 써야 하고 육아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모코에게만 맡길 사안도 아니며 종합적인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자신의 핏줄을 얻는다는 것에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더 꼼꼼한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을 반성했다.
차분하게 현실적인 문제들을 짚어 보던 그날 밤,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저에요.”
‘축하한다. 우리 아들.’
“이제 겨우 1라운드를 치렀는데요?”
축하 인사가 보통 우승에 대한 것이라서 엄마가 착각하시는 줄 알고 그리 대답했다. 그런데 말을 하고난 뒤 깨달았다.
엄마의 음성이 상당히 격앙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사실이 확인되었다.
‘며늘아기가 연락해 왔더구나. 아이 가졌다고. 넌 그런 큰 경사가 생겼으면 엄마에게 가장 먼저 알려야지!’
무척 기뻐하시면서도 더 일찍 이실직고하지 않은 것을 나무라기도 하셨다.
“저도 너무 갑작스러웠어요. 안 그래도 내일 연락드리려고 했고요. 그런데 모모코가 뭐라던가요?”
이보영 대표를 만나자마자 모모코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가 통역을 해 줬기에 의사 전달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나 모모코가 어떤 의사를 밝혔는지 일단 알아야 했다.
‘뭐라긴. 애는 내가 키워 주겠다고 했지.’
“받아들이던가요?”
‘걔가 나이는 어려도 착한 거 같아. 속도 깊고.’
“엄마가 키워 주신다는 걸 좋아해요?”
‘올 겨울에 아예 우리 집으로 들어오겠단다. 아이 낳고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한국에 머물겠다고. 얼마나 예쁜지 난 눈물이 나서…….’
모모코는 늘 상상 이상의 태도를 보였다.
어리고 깜찍한 여자와 살면 그만한 대가는 치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띠 동갑이라 세대 차이가 날 수도 있고 어릴 때는 더욱 이기적일 가능성이 높아 결국 많은 것을 양보하며 살아야겠다고 진즉에 생각했다.
그런데 과거의 누구와 비교해 봐도 모모코가 훨씬 자신을 많이 배려했다. 쓰라린 경험이 낳은 산물은 아니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아이까지 가졌고 요즘 여자들은 질색하는 본가로 들어가겠다는 말에 행복했다.
약혼이 아니라 결혼을 서두르는 것이 당연했다.
“일단 경기에 집중하자!”
과하게 흥분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어진 필상은 일단 대회에 전력투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불꽃 쇼를 펼치기 시작했다.
2라운드에 7타를 줄여 -9, 공동 3위에 올라서더니 3라운드는 8타를 줄여 급기야 단독 선두에 나섰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절대 강자임을 만방에 드러낸 필상은 결국 최종 라운드는 코스 레코드까지 갱신하며 당당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8, 2위와 10타 차 카시오 월드오픈 우승!]
[시즌 5승, 통산 8승, 압도적인 실력, 퍼펙트 콩의 전성시대.]
필상의 우승 소식도 다뤄졌지만 헤드라인을 장식한 주인공은 필상이 아닌 모모코였다.
그녀 또한 우월한 경기력을 유지한 나머지 3타 차의 비교적 여유 있는 우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시즌 9승, 미야 모모코, 그녀를 위한 그녀의 한 해였다.]
[일본 무대가 좁다! 그녀를 보내야 하는가?]
미국 진출을 기정사실화한 기사까지 실렸다.
과거 인터뷰에서 본인이 밝힌 바가 있기 때문인데, 일본 팬들을 위해서 남아야 한다는 보수적인 의견도 없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변화된 상황을 전혀 모르고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그런 기대 때문에 피치 못할 공백이 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필상을 흐뭇하게 만든 기사는 다른 것이었다.
[커플 동반 우승!]
둘 다 많은 우승 트로피를 모았지만 함께 우승한 것은 처음이다. 묘하게 엇갈리더니, 결국 메이저 대회이자 시즌 최종전에서 우승한 모모코에게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췄지만 아무렴 어떠랴, 자신의 여자인데.
시상식을 마치고 공항에 이동해서야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필상은 성호에게도 모모코가 아이를 가졌음을 털어놨다.
“아! 어쩐지!”
“어제 엄마랑 통화했거든. 집에도 알리지 않고 말하는 게 좀 그래서.”
“그야 당연하죠. 형님, 정말 축하합니다.”
“다 네가 잘 도와줘서 그런 거지 뭐. 하하하.”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잠시, 성호도 현실을 떠올렸는지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모모코의 공백을 과연 일본 팬들이 용납할 것이냐는 것인데, 그만큼 그녀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필상이 깨닫고 대답한 말은 간단했다.
“인륜보다 앞선 가치는 없어.”
“아!”
“다음 주 대회 마치면 바로 한국으로 들어갈 거야. 모모코랑 같이.”
“우와! 난리가 나겠네요. 곧 결혼식도 해야 하잖아요!”
“그래야겠지.”
모든 과정이 급속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태어날 아이에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부부가 될 두 사람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했다.
이미 서로가 좋아하고 결혼을 약속했다면 나이나 국적, 또한 제반 조건은 맞추면 된다. 굳이 결혼을 미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운동에 전념하기 위해서도 연애보다는 안정된 가정이 필수라고들 하지 않던가. 걱정은 오로지 모모코의 마음이었는데, 태어날 아이가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준 셈이다.
가와사키 집에 도착한 시간은 깜깜한 밤이었다.
비행기 시간 때문에 모모코가 먼저 도착한 상태였다.
“오빠!”
“하하하. 보는 사람도 많은데…….”
성호와 미사키, 그리고 이 대표까지 다 모여 있었다.
필상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입술까지 맞췄다. 야유가 난무했지만 임신 사실을 모두 아는 사이에 더는 격식을 따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승 축하해!”
“저도요. 꿈만 같아요.”
“꿈이면 안 되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여자를 내가 어떻게 또 만날 수 있겠어.”
“그 말 평생 해 줄 거죠?”
“그건……. 두고 봐야지. 하하하.”
“에이 진짜 나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정겨운 이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필상은 시즌 최종전이 남았지만 모모코는 의미 있는 한 해를 마무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와인까지 곁들여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올해 얼마나 많은 기적이 이뤄졌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골프가 좋다.
골프를 시작한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고 소중한 여인도 얻지 않았던가!
더 바랄 것이 없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았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자신의 품에서 곤히 잠든 모모코를 안아 준 필상은 모두가 잠든 밤, 홀로 정원으로 나섰다.
남은 숙제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실마리를 잡았으니까 해결될 거야.”
벼락 맞은 날의 기적 이후 필상은 자신의 몸을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좋아졌다. 골프 선수는 자신이 어떤 스윙을 하는지 느낄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늘 거울을 보며 연습하거나 녹화 영상을 확인한다. 그런데 필상은 자신의 스윙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매번 일관성 있는 샷을 구사할 수 있는 근본 이유였다.
그런데 그런 신비로운 능력이 자신의 컨디션까지 점검하는 단계에 이르는 단초를 얻었다고 확신했다.
그동안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꾸준히 호흡에 집중한 결과 일정한 패턴을 찾아냈다. 그리고 대회를 치르며 하루가 다르게 자신의 내력이 고갈되는 것을 느꼈다.
“막힌 듯 좁아진 공간을 넓혀야 해.”
정확히 지목할 수 없는 상상 속의 공간일지도 모르지만 호흡을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한 지점의 크기를 필상은 내력이 함축된 바로미터라고 판단했다.
힘과 집중력을 비롯해 굿 샷을 날릴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내력(內力)이라고 칭했다.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무도를 추구하는 이들의 표현을 자주 접하다 보니 그게 가장 적절했다.
문제는 과연 호흡을 통해 좁아진 공간을 확장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다행이라면 시간이 지나며 노력한 결과 호흡을 통해 그 공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으음……. 좋아!’
아주 미세한 확장이 느껴졌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적인 치유일지도 모르지만 실제 컨디션이 좋아지고 있음을 느꼈기에 필상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달렸다.
다행히 예측이 확신으로 변할 즈음, 갑자기 따스한 기운이 등에 닿아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포근해졌다.
닿은 느낌, 자극적인 체향, 누군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 안 자고 나왔어?”
“자다가 깼는데 오빠가 없어서요.”
“나 이제 좋아질 것 같아.”
“다시는 갑자기 쓰러지지 않을 거라는 거죠?”
“응.”
“그럼 전 먼저 들어갈게요.”
같이 가자고 보채지 않는 그녀, 표정 가득 아쉬움이 뚝뚝 흘러내리지만 방해가 되는 것을 아는 것이다.
현명하고 또 사랑스러웠다.
그런 배려를 받은 필상은 결국 그날 밤, 자신의 인생을 좌우할 중요한 경험을 터득하고야 말았다.
쇠뿔이 단김에 빠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확신은 생겼다. 또다시 갑자기 정신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날 오후 넷이 함께 도쿄 요미우리 골프클럽을 향해 출발했다. 미사키에게는 이제 장기 휴가가 시작되었지만 그녀도 필상의 최종전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보다는 넷이 함께 공을 치는 것을 더 좋았겠지만.
“굳이 이곳에 숙소를 잡을 필요가 있을까?”
“길이 막히면 2시간이 걸릴 수도 있어요.”
“그런가?”
막상 이동해 보니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대략 50km를 조금 넘는 거리였지만 도쿄 인근의 교통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 결국 예약한 콘도로 들어섰다.
최상의 경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1분 1초도 아껴야 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월요일인데도 골프장은 붐볐다.
Golf Nippon Series JT Cup은 상금 규모는 작지만 JGTO 메이저 대회이고 시즌을 마무리하는 아쉬움 때문에 언제나 최고의 흥행을 이룬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