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심장이 요동치는 단어
“바람이 미쳤나 봐요!”
“응. 하지만 어쩌겠어. 잘라 가자.”
“네. 별수 없죠.”
속상할 상황이지만 모모코는 의연했다.
다들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홀로 분전하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언제든 모든 것을 믿고 의탁할 수 있는 필상이 곁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에 맞은 공은 하필 우측으로 튀어 헤비 러프에 빠졌다. 잘 보이지도 않게 잠긴 공은 남은 거리 186야드를 보내기는커녕 정확한 임팩트도 어려웠다.
그래도 사람의 심리는 참으로 묘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고의 결과만 떠올리며 더 높은 확률을 지닌 미스 샷을 애써 무시하다가 결국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지 않던가.
-어? 피칭웨지를 잡았나요?
-옳은 선택입니다. 왜 욕심이 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평상시에도 높은 턱 때문에 곤란을 겪는 벙커들이 그린을 철저히 방어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비가 내려 벙커 모래가 젖은 상황에서는 한 번에 올릴 확률이 극히 떨어집니다.
-레이 업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핀에 붙일 가능성이 낮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지금과 같은 경우는 참아야 합니다. 퍼펙트 콩이 그녀를 잘 리드하는 것 같습니다.
적절한 해설이었음에도 시청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미 앞서 언급한 무리한 말들로 인해 신뢰도가 떨어진 듯.
레이 업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 선수의 심정은 참혹하다. 그렇다고 실망에 겨워 대충 샷을 하면 큰일 난다.
어김없이 실수가 찾아오기 때문인데, 모모코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결정이 옳다는 확신하에 일체의 의심도 품지 않고 정확하게 공을 걷어 냈다.
“굿 샷!”
“흐흐……. 재밌어요.”
“나도. 그런데 몸은 언제부터 안 좋았어?”
“음……. 여기 도착한 날부터요.”
“그럼 진즉에 말을 했어야지.”
“치!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군데요!”
그러고 보니 말을 했다.
하지만 자신이 같이 가지 않아 투정을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울컥 솟았다.
“증상은?”
“몸살 같아요.”
“약은 먹었어?”
“아뇨.”
“왜?”
당연히 약을 먹었을 줄 알았다.
진즉에 먹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텐데 왜 약을 먹지 않았냐는 말에 쓴웃음만 지을 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사연이 있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어느새 서드 샷 장소에 도달한 필상은 112야드가 남은 샷부터 살펴야 했다.
그런 필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모코의 얼굴에는 쉽게 파악하기 힘든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라도 핀에 바짝 붙일 수 있다면 절대 나쁜 스코어가 아니다. 비바람이 닥친 이후 이 홀에서 버디를 잡은 선수는 없기 때문이다.
방향은 정확히 읽었지만 공중에 올라가 보지 않는 한 얼마나 바람을 탈지 그 세기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아주 잘 때렸다고 생각했는데도 공은 홀컵 근처에 미치지 못했다.
“우우우우…….”
7m 롱 퍼팅이 홀컵에 쑥 빨려 들어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홀컵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춘 공은 까딱거리다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더도 말고 딱 반 바퀴만 더 구르면 들어갔을 텐데.
참으로 야속타 생각한 팬들은 바람 탓이라고 여겼는지 애꿎은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터트렸다. 역풍이 아니었다면 들어가고도 남을 힘 조절이었던 건 사실이다.
어렵게 줄인 타수를 1타 잃었지만 그건 약이 되었다. 바람이 심한 코스를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필상은 이미 터득했지만 그 노하우를 모모코에게 가르친 적은 없다.
겨울 전지훈련 과제로 미뤄 놨는데, 주문하는 족족 어렵지 않게 구사하는 광경에 필상의 입은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나 정말 깜짝 놀랐어.”
“왜요?”
“저탄도 샷을 특별히 따로 연습하지는 않았잖아?”
“먼저 KJ 초청 대회에서 바람이 아주 심했던 날 기억하죠?”
“응.”
“그때 봤어요. 오빠가 바람 부는 날, 어떻게 치는지 보고 몇 번 따라 해 봤어요.”
“몇 번?”
“저한테는 잘 맞는 것 같아요. 펀치 샷.”
“그렇구나…….”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골프를 해 온 모모코가 낮은 탄도의 샷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필상도 오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완성한 샷이라서 연습하지 않은 모모코에게 주문하지 못했는데, 그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쉽다지 않은가?
8번 홀, 150야드 파3 홀에서 가볍게 온 그린에 성공한 모모코는 다시 1타를 줄여 -5까지 올라섰다. 그게 대단한 것이 상위권 선수들이 우수수 추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이 따라 줄 것 같던 그 상황에 갑자기 싸이렌이 울렸다. 주최 측에서 경기 중단을 알리는 신호였다.
“왜죠?”
“뇌우 경보가 울렸나 봐.”
“에이…….”
모모코는 상당히 아쉬워했다.
지금 추세라면 우승 경쟁에 뛰어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새 선두와는 5타 차, 뒤따라오는 선수들은 타수를 잃을 확률이 더 높아 틀리지 않은 판단이다.
하지만 자연의 조화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아쉽게 클럽하우스로 돌아와 기다렸지만 1시간이 지난 뒤, 주최 측의 결정이 통보되었다. 오늘 남은 경기는 내일로 미뤄진다고.
“어떡해요?”
“괜찮아. 내일까지 같이 있을게.”
“그래도 되요? 내일 연습 라운드도 잡혀 있다면서요?”
“화요일로 미뤄 달라고 해야지.”
“오빠…….”
좀 꼬이기는 했다.
대회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모모코와 헤어졌는데, 다른 이유로 닷새를 허비해서 하루라도 일찍 고치로 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경기 중인 모모코를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내일 밤에 넘어가면 여유는 이틀뿐, 그래도 편치 않은 마음으로 가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했다.
“병원에 가 보자.”
“병원이요?”
“그래. 일단 의사 진단부터 받아 보자고.”
너무도 당연한 건데, 모모코는 왠지 꾸물거렸다.
마치 주사 맞기 싫어 병원이라면 질색하는 어린애처럼 질질 끌었다. 그러나 재촉하는 필상의 손에 이끌려 급기야 병원에 들어섰다.
“오빠. 밖에서 기다리면 안 돼?”
“왜?”
“그냥 그럴 일이 있어서. 난 여자잖아.”
“그래…….”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는 모모코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필상은 진료실 밖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진료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감기 몸살이라면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진료실로 들어가려던 필상은 문틈으로 언뜻 새어나온 하나의 낱말을 들었다.
‘임신?’
심장이 요동치는 단어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았던 일련의 상황과 기이했던 느낌이 일목요연하게 꿰어졌다. 둘 다 피임을 하지 않았다.
필상도 그녀가 출산으로 인해 원지 않는 공백기를 갖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 그녀보다 자신이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막상 그 말을 듣자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문을 열고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오, 오빠!”
“이 문제는 너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니잖아.”
당황한 그녀에게 다가간 필상은 일단 따스하게 안아줬다.
여의사의 흐뭇한 표정은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필상이 아이 아빠라는 사실은 이미 언론에 공개된 내용이라 부정적인 생각은 지우고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고마워. 모모코.”
“오……빠…….”
“왜 말하지 않았어. 혹시 두려웠어?”
“아뇨. 오빠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어떻게 생각하긴! 난 축복이라고 생각해. 너무 고맙고 또 사랑해.”
임신은 전성기를 맞이한 그녀에게 치명적인 상황이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혹시 나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너무도 고마웠고 어떻게든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더욱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모코는 이미 테스트를 해 본 것 같았다.
다만 대회 중이라서 병원을 들르지는 못했는데, 필상이 잡아끌자 결국 임신 사실을 같이 확인하게 된 셈이다.
문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것은 혹시 임신이 아닐까 걱정스러워서 그런 것이지, 감추거나 나쁜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지금 모모코의 건강 상태가 어떻습니까? 경기에 나서도 되는 건가요?”
당장은 그게 중요했다.
임신한 줄 알았다면 오늘 비바람을 맞으며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무조건 말렸을 것이다. 또한 내일 경기도 포기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다만 당사자가 어떨지 몰라 전문가의 의견을 구했다. 자신의 뜻보다는 의사의 조언이 더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한 건데, 대답은 의외였다.
“모모코 양이 워낙 젊고 건강해서 큰 문제는 없어요. 다만 지금은 컨디션이 많이 떨어져서 염려스럽기는 하죠.”
‘거 봐 안 된다고 하잖아!’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을 빤히 올라다 보고 있는 모모코의 눈빛을 보고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오빠가 도와주면 전 내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괜찮을까?”
“절대 무리하지는 않을게요.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제가 스스로 포기하면 되잖아요.”
의사도 긍정적인 말을 보태는 바람에 더는 말리지 못했다.
골프가 격렬한 운동은 아니지만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 운동이라서 대회를 하나 치르고 나면 체중이 5kg 이상 빠지는 선수들도 흔하다.
모모코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일도 날씨가 좋지 않기를 바라야 하나?’
난감했다.
잔여 경기를 치르면 우승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궂은 날씨에 무리하다가 더 큰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염려가 앞섰다.
그래서 숙소로 돌아온 필상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마사지도 해 주고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상황이 아주 고약하게 되고 말았다. 필상이 눈을 떴을 때, 모모코는 벌써 일어나 씻은 뒤였다.
“왜 울상이야? 어디 불편해?”
“아뇨. 몸은 날아갈 듯 상쾌해요. 그런데 날씨가…….”
모모코는 완전히 쌩쌩하게 살아났다.
그런데 창밖을 내다보니 비는 어제보다 더 굵어졌고 바람도 잦아들지 않았다. 문제는 뇌우 경보인데, 이미 알아봤는지 모모코의 얼굴이 시무룩했다.
“아직 시간이 있잖아. 나 씻고 나올 게. 같이 운동 가자.”
모모코의 컨디션이 올라온 것은 너무도 반가웠지만 결국 대회는 잔여 경기를 치를 수 없어 3라운드로 끝이 났다.
기껏 고생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 실망했을 모모코를 위해 때아닌 눈치를 봐야 했지만 그런 행동 자체가 싫지 않았다.
아기를 가진 그녀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느껴졌고 또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까워하는 것도 잠시, 모모코는 이내 마음을 정리하고는 웃어 보였다.
“할 수 없죠 뭐. 오빠 빨리 비행기 시간부터 바꾸세요.”
“나? 급하지 않아.”
“늦었잖아요. 어서 가서 연습해야죠.”
“나 이번 대회 포기할까?”
“안 돼요! 오빠가 불편할 것 같으면 제가 포기할게요.”
그럴 수는 없다. 이번 주에 모모코가 출전하는 대회는 시즌 최종전이자 메이저 대회인 JLPGA 투어챔피언십이다.
그녀가 빠지면 개인적인 아쉬움도 클뿐더러 대회 흥행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게 자명했다. 물론 임신 사실을 알리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그래서 차라리 자신이 대회를 포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설득했지만 모모코는 요지부동이었다. 각자 대회에 참가하는 게 계획이었고 건강에 문제가 없는데 대회 출전까지 포기하게 만들면 볼 면목이 없을 거라는 말에 결국 헤어져야만 했다.
필상이 가야 할 고치 현은 에히메 현에서 가깝지만 그녀는 미야지키로 가야 해서 먼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뭐죠?”
“왜?”
“왜 형 눈빛이 촉촉하냐고요!”
“눈곱이나 떼!”
“아! 진짜!”
아직 미사키와 성호는 모모코의 임신을 알지 못했다.
아마도 이동 중에 모모코가 미사키에게는 얘기할 것 같았다. 곁에서 도와줄 사람이 마침 여자인 미사키라서 다행이다.
그러나 필상은 구태여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직 엄마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번 주 대회를 마치고 도쿄에서 만나면 그때 의논해서 결정한 생각이었다.
고치 쿠로시오 골프 클럽에 도착한 필상은 주최 측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늦게 오는 바람에 혹시 대회 출전을 포기한 건 아닌지 걱정한 것 같았다.
‘일단 대회에 집중하자!’
각자 최선을 다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지만 쉽지 않았다.
연습할 때도, 심지어 연습 라운드를 나가서도 수시로 스마트폰에 시선이 갔다. 늘 모모코가 먼저 연락을 했는데 자꾸 필상이 전화를 해대자 깔깔대며 좋아했다.
전화를 너무 자주해 귀찮다나?
그 말의 저의를 모르지 않는다. 자기에게 신경 쓰지 말고 경기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는 말인데, 그게 무척 어려웠다.
임신한 후에 자신의 태도가 너무 달라진 것을 느꼈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뛰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공 프로가 오늘 왜 저러죠?
-어딘가 들떠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선수인데, 나사가 하나 풀린 사람처럼 실실 웃고 다닙니다.
-밝은 표정이 나쁜 건 아닌데, 평소와 너무 많이 다른 건 분명해 보이네요. 대체 뭐가 그를 흔들어 놓은 걸까요?
버디와 보기를 번갈아 기록한 필상은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일부러 안 좋은 기억들을 소환해도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그 결과 필상은 18홀 라운드를 돌며 보기를 4개나 기록했다. 이글 하나에 버디 4개를 기록했기 망정이지, 코스가 어렵다고 샷 정확도 1위인 필상이 그렇게 롤러코스터를 탈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