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그녀를 위해서
-모모코가 오늘은 확 달라졌어요!
-드디어 컨디션 난조에서 벗어난 것 같습니다.
-카즈히로 해설위원님. 대체 왜 그런 거죠?
일본 골프 전문 방송 중계진은 최종 라운드에 들어선 모모코의 플레이가 살아난 것에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우승 가능성은 낮지만 시청률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캐스터 유우키의 질문에 날카로운 해설을 해야 할 카즈히로는 잠시 머뭇거렸다. 정답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미 중계 화면에 여러 차례 등장한 남자 캐디, 필상이 갑자기 캐디로 나선 사실은 모두를 경악케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퍼펙트 콩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분석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아! 그렇게 보십니까?
-물론 사랑하는 남자가 곁을 지키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모든 프로들이 남편이나 아내를 캐디로 쓰겠죠.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그런데 시즌 7승을 거두고 이미 캐디로서의 능력도 검증된 남편이 퍼펙트 콩 말고 또 있나요?
-그, 그게……. 제가 특별히 퍼펙트 콩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캐디가 바뀌었다고 경기력이 갑자기 쑥 올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혹시 천천히 다른 이유를 찾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유우키와 카즈히로는 합이 잘 맞는 골프 중계를 해 오던 익숙한 중계 조합이다. 하지만 필상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일치하지 않는지 큰 견해 차이를 보였다.
물론 시청자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문가인 해설자보다 캐스터의 말이 더 마음에 와닿았고 반박하는 표현에 고소한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필상을 평범한 연인으로 본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올 시즌 JGTO를 휩쓴 태풍의 핵을 아직도 평가절하 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대세의 흐름에 역행하는 마음이 이미 검증된 캐디로서의 능력까지 묘한 물타기로 넘기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일기예보가 순 엉터리인데!”
“왜요? 일기예보가 어땠는데요?”
“비바람 때문에 오늘 경기가 정상적으로 치러질지 의심스럽다고 했거든.”
“히히히……. 의외의 변수가 설마?”
“아무래도 가능성은 높아지겠지.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네. 오빠!”
한창 좋을 때와 같은 스윙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안전한 공략을 해 나가며 어려운 첫 세 홀을 파로 막아 낸 모모코는 차츰 샷 감각이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4번 홀에서 첫 버디를 만들어 냈다. 320야드의 짧은 파4에 유틸리티로 티샷을 공략한 것이 주효했다.
220야드를 안전하게 보낸 뒤, 103야드를 샌드웨지로 홀컵에 바짝 붙인 완벽한 버디였다.
-드디어 모모코가 환상적인 기량으로 1타를 줄였네요.
-그래도 아직 -4에 불과합니다. 선두와는 8타 차, 우승 가능성은 아직도 미미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승은 못 해도 그녀를 응원하는 팬들은 만족할 것 같아요. 다음 주에 이어질 시즌 최종전에 대한 희망이 생기니까요.
-오늘 좀 좋아졌다고 다음 주에 그 기세가 이어질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아침과 점심때가 다른 게 골프입니다.
본래 카즈히로는 모모코에 대해 악평을 하던 이가 아니다. 하지만 한 번 꼬인 매듭을 풀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중계 책임자에게서 쪽지를 받고는 얼굴이 벌게졌다. 그 내용인 즉, (오늘 따라 왜 이러세요! 댓글이 지금 어떤지 아십니까?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하세요!)
투둑 투둑!
첫 버디를 잡고 기분 좋게 4번 홀로 이동하는 사이, 갑자기 바람과 함께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라던 바였지만 이게 극심한 악천후로 이어질 경우, 4라운드 자체가 무효가 될 수도 있어 기분이 묘했다.
그저 경기는 지속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순위가 요동치는 비바람이 가장 적당한데, 그게 어디 바라는 대로 될지…….
“오빠. 저 바람막이 좀 줘요.”
“추워?”
“네.”
몸이 좋지 않다며 애초 하의는 긴 바지를 입고 나왔다. 그런데도 춥다는 말에 필상의 걱정은 한층 짙어졌다.
보통 사람은 추위를 느낄 기온이지만 늘 야외에서 연습하던 프로들에게 이 정도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추우면 나한테 기대.”
“흐흐흐……. 달콤해요.”
얼른 필상의 가슴에 기댄 모모코의 어깨와 등, 그리고 팔도 주물러 줬다. 갑작스러운 비였지만 일기예보 때문에 미리 우산을 준비한 갤러리들이 어수선한 가운데도 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두 선남선녀의 다정한 모습이 한 장의 그림처럼 멋들어져 보였기에 부러움이 한껏 박힌 눈빛이었다.
그러나 정작 필상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몸이 좋지 않은 모모코가 과연 이대로 경기를 지속하는 것이 옳은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모코의 생각인데, 경기를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여 말도 꺼내지 못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485야드 파5야.”
“공격적으로 가도 되죠?”
“물론이지. 빗줄기가 더 강해지기 전에 타수를 줄인다면 두고두고 든든해질 거야.”
“드로우 샷 갈게요.”
“좋아.”
티샷 랜딩 에어리어가 살짝 좌측 도그렉이라서 강한 티샷을 할 경우 드로우를 거는 것이 적절한 공략이다.
하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고 비바람까지 부는 상황이라서 무리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녀의 의욕을 꺾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 티 그라운드에 올라가자 바람의 방향은 순풍이었다.
“방향 좋고!”
모모코의 에이밍을 확인한 필상은 뒤로 물러서며 그녀의 스윙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다행인 것은 자신의 안마가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심한 난조를 보이던 스윙이 눈에 띄게 안정되었고 표정도 밝아졌다.
드로우를 걸기 위한 모든 조건이 완벽히 들어맞았다. 오른발이 조금 뒤로 빠졌고 평소보다 다소 플랫한 백스윙이 이륙하는 비행가처럼 서서히 힘을 비축했다.
그리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과감한 다운스윙이 정확한 임팩트를 만들어 냈다. 스위트 스폿(Sweet spot-볼을 맞추어야 할 클럽페이스의 중심점)에 맞은 공은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솟구쳤다.
“좋아!”
쾌감을 느꼈다. 타인의 스윙을 보고 이렇게 강한 만족감을 느껴 본 적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감각이 아우성쳤다.
이 중독성 강한 기분 때문에 골프의 매력에 빠져드는 게 아닌지, 가슴 벅찬 감동을 지니고 날아가는 타구를 바라봤다.
“와아아아! 대박!”
“온 그린!”
파5 홀에 온 그린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소망이지만 팬들은 정말 그런 황당한 바람을 품고 모모코의 티샷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놈의 공이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점을 찍고 휘어져야 할 타이밍이 지났는데, 그냥 홀 우측의 숲으로 쑥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놈의 바람이 정말 미쳤네!”
평지에서 느껴지는 것보다 훨씬 강한 바람이 공중을 장악하고 있는 듯, 미처 회전을 먹을 틈도 없이 무한정 날아가는 타구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인상이 구겨질 무렵, 급기야 공이 휘돌기 시작했다.
의도한 만큼 충분한 드로우가 먹지 못한 타구는 페어웨이 우측의 퍼스트 컷에 떨어졌다. 세컨샷을 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는 지점이라는 것을 확인한 필상은 그제야 안도했다.
그런데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야만 했다. 이번 티샷의 비거리가 자신이 예상한 범주를 훌쩍 벗어났기 때문이다.
“오빠! 얼마나 나간 거죠?”
“321야드.”
“정말이에요?”
“응. 내리막도 아닌데 순전히 바람을 타고 저렇게 까마득하게 날아갈 수도 있구나!”
“흐흐흐. 이번 시즌 최장타 기록도 이제 내가 먹었어요!”
놀란 사람은 그 둘만이 아니다.
팬들은 물론 중계진도 감탄사만 터트릴 뿐, 잠시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활한 중계방송을 위한 자료가 아직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상 경기 보조원들이 측정한 기록을 바탕으로 해설해야 하는데, 타구가 너무 멀리 떨어져 허둥지둥 뛰어가는 중이었다.
-와아! 이거 믿을 만한 기록인가요?
-맞습니다. 우측 벙커 끝이 298야드인데 그걸 훌쩍 지났습니다. 아무리 바람을 탔다고 해도 이건 정말 놀랍습니다.
-미셸 위나 소렌스탐처럼 모모코도 앞으로 남자 투어의 초청을 받을 수도 있겠네요.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가 여자 투어 선수들보다 짧은 선수들도 여럿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건 좀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습니다. 모모코의 샷이 아무리 길고 좋아도 이 정도 거리는 남자 투어에서 파4로 설정되기도 합니다.
-하기야 역대로 남자 투어에 참가한 여자 프로들이 순위에 든 적이 한 번도 없기는 하죠. 하지만 퍼펙트 콩이 캐디를 한다면 컷 탈락은 당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 또한 아주 희박한 확률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이고. 그러세요?
속으로 해야 할 말이 무의식중에 툭 튀어나왔다.
아니, 어쩌면 의도한 발언인지도 모른다. 오늘 캐스터 유우키는 분위기를 자꾸 역행하는 해설자 때문에 은근히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얼른 죄송하다는 말로 실언을 사과했지만 그것도 짜 놓은 각본이라고 생각하는 시청자들이 꽤 많은지, 길게 늘어진 실시간 댓글의 내용을 살피던 카즈히로의 표정이 구겨졌다.
세컨샷 지점에 도착한 모모코는 충분한 안마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동반자들이 먼저 세컨샷을 하는데, 바람을 의식해서인지 지나치게 신중한 스윙을 했기 때문이다.
남은 거리는 169야드에 불과했지만 필상이 체크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슬라이스 뒷바람이야.”
“바람을 많이 타던데 얼마나 봐야 할까요?”
“155야드.”
“그럼 7번 잡고 컨트롤할까요?”
“아니. 8번으로 풀스윙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좋아요.”
컨트롤 샷은 컨디션과 무관치 않아 차라리 풀스윙을 권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이 부는 가운데 무사히 그린에 올려 아주 소중한 이글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따라다니던 팬들도 난리가 났다.
이제야 출발하고 있는 최상위권 선수들은 더욱 어려운 경기가 예상되어 타수를 잃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모모코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우승 경쟁에 뛰어들었다고 판단했다.
“우측으로 3컵은 봐야 할 것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바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까요?”
“강한 스트로크를 할 거니까 그건 무시하자.”
퍼팅 루틴을 밟아 어드레스를 취했던 모모코가 자세를 풀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중심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미세한 변화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퍼팅이라서 그걸 지켜보는 필상도 마음이 편치는 못했다. 그래도 차분하게 다시 루틴을 밟은 모모코가 의도한 과감한 스트로크를 감행했다.
필상은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확인한 만큼 라이를 먹지 않고 밀린 공은 홀컵을 외면하고 2.5m을 지나서야 겨우 멈췄다. 바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으아! 진짜 아깝네요.
-왜 저렇게 강하게 때렸을까요? 뒷바람이 부는데.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은 맞죠. 이제라도 버디 퍼팅을 성공하면 되죠. 하하하.
-그게 과연 쉬울까요?
아예 초를 쳤다.
투어프로 출신인 그의 경험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바뀌는 바람까지 의식하기에는 너무 긴 퍼팅이었다.
물론 충분히 감안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불찰이라서 필상은 모모코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불편했다.
그래도 씩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으으으……. 제가 너무 세게 밀었나 봐요.”
“아니야. 나의 오판이었어. 바람이 그린 위의 공을 그렇게 세게 밀 줄은 미처 몰랐거든.”
“걱정 마세요. 저건 꼭 넣을 테니까!”
모모코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너무 과하면 오히려 긴장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아예 그녀에게 통용되지 않았다. 바람까지 고려했는지 쭉 밀었다.
그 순간 덜컥 걱정이 되었으나 홀컵 뒷벽을 때리는 소리에 십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것 같은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를 위해서 필상도 목청 높여 소리쳤다.
“나이스 버디!”
“모모코! 모모코!”
연속 버디를 잡았다.
가장 쉬운 핸디캡 18번 홀이지만 그건 정상적인 날씨일 때나 통용될 말, 동반자들은 파와 보기를 적어 냈으니 모모코의 버디는 가치가 더 돋보였다.
게다가 이제 막 1번 홀을 마친 선두권이 우르르 무너지고 있다는 사인이 성호로부터 들어왔다. 어려운 첫 세 홀이 비바람이라는 변수가 더해지면서 마법을 부릴 것 같았다.
하지만 -5로 분위기를 탄 모모코에게 굳이 알리지는 않았다. 남들이 어떻든지 자신의 플레이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6, 7번 홀은 지키고 상황 봐서 8, 9번 홀은 공격적으로.”
“좋아요.”
마냥 좋다는 모모코가 너무도 사랑스럽고 안쓰러워 확 안아 주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녀는 묵묵히 최선의 샷을 했지만 7번 홀에서 뜻하지 않은 위기가 찾아왔다.
우측이 높은 지형은 통상적으로 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바람도 분다. 또한 티 박스 근처에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놈의 바람이 미쳤는지 잘 때린 티샷이 뻗어 나가지 않고 뚝 떨어졌다. 드로우가 아닌 슬라이스 바람을 타면서.
그 결과 페어웨이 우측에 심어 놓은 나뭇가지에 맞고 말았다. 평소 프로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200야드 지점에 심어 놓은 나무인데 말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