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95화 (95/354)

095. 미역국

“과부하를 제어해야 해!”

필상은 혼절한 상태를 과부하라고 정의했다.

더는 버틸 수가 없는 한계를 벗어난 대가는 모든 것을 백지로 만들기 때문에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결론도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이건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은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러 생각을 하던 필상은 결국 잠시 쉬기로 했다.

머리가 찌근찌근 아파 온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쉬자 마음이 편해졌다.

아니, 찌근거리던 머리가 깨끗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조용히 눈을 감고 무념무상의 심정으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길게 들이쉬고 아주 천천히 숨을 뱉어냈다.

그런데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이게 정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막연한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본연의 힘만으로는 부족해 더 크고 위대한 힘, 즉 자연이 지닌 무한한 활력을 이용하면 될 것 같았다.

‘무협도 아니고!’

모범적인 학생이었지만 운동을 하면 쉬 피곤해지는 터라 중고교 시절, 짬짬이 봤던 것이 바로 무협 소설이다.

황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리 만족을 느꼈고 대적할 수 없는 적을 물리치거나 극복하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현실의 답답함을 풀곤 했다.

서서히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유아독존의 존재가 되는 과정에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내공이다.

익힌 무공의 고하와 연륜마저도 무색케 하는 신묘한 내력을 지니게 된 주인공은 통상의 궤를 벗어난 능력을 실현하며 더 나아가 자신만의 질서와 새로운 지평을 연다.

‘내게 주어진 기적도 그와 다를 게 없지!’

애당초 논리적인 접근은 불가했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현상을 입에 올리는 것부터가 미친놈 취급당하기에 딱 좋아 깊이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작정하고 고심하자 작은 실마리를 얻었다.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떠오르는 오만 가지 생각을 모두 접고 호흡에 집중하자 어느 한 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희망적인 현상은 그 한 번뿐이었다.

아무리 갖은 수단을 동원해 노력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날부터 시작한 필상의 명상은 끊이질 않았다.

“뭘 그렇게 들여다보는 겁니까?”

“넌 네 할 일이나 해.”

하루 종일 정원에 죽치고 앉아 있다가 가끔 들어와 노트북을 켜면 또다시 스크린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는 필상이 이상해 보였다.

그래서 기웃거렸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대였다.

얼핏 검색하는 내용을 훔쳐봤는데 검색어가 ‘내공, 기공, 심법, 호흡’과 같은 얼토당토않은 것들이었다.

대략 무얼 하는지 감은 잡았지만 그게 골프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결국 신경을 끄기로 했다.

“저 아저씨, 애인이 지금 해매고 있는데 그건 아나?”

모모코가 보기 드물게 샷 난조를 보였다.

나가는 대회마다 승승장구했던 모습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경기력을 보이고 있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통화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나마 전화가 결려와도 형식적인 조언뿐이었다.

순전히 자신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으나 연습도 하지 않고 기이한 짓만 벌이는 것을 생각하면 적잖이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당사자인 필상은 더 답답했다.

자신이 공을 들이고 있는 일련의 행위들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확신이 점점 더 커져 가는데 소득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

닷새가 지나 어느새 토요일이다.

오늘까지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포기하려고 했다. 적어도 최소한의 스윙 점검은 마친 뒤에 고치 현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양이 길게 드리워질 무렵,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모종의 기운을 탐지했다. 배인지 가슴인지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엄연한 기운을 감지한 필상은 그 희미한 흔적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흥미로운 것은 내공이라는 것을 익히기 위해 수없이 많은 것들을 검색하고 시도했는데, 그런 거창한 게 아니었다.

내공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한 댓글에 따라 수단이나 방법을 고심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몸을 차분하게 관조하던 차에 우연히 감지했다.

‘이건 뭐지?’

육신의 일부라고 느껴지지 않지만 엄연히 내 속에 존재하는 흐름, 그 흐름을 따라 정신을 집중하자 갑자기 간지러웠다.

긁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게 불가능한 이유는 겉으로 드러난 신체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겨 내고 그 흔적을 따라가다 놓치기를 수차례, 결국 일정한 리듬을 발견했다. 가려움을 느끼는 지점은 들이킨 숨이 이동하는 경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며칠 동안 계속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 허리도 욱신거리고 다리도 수시로 저렸는데, 그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기억해야 해!’

어떻게 얻은 성과인가?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놓칠 수는 없어 반복적으로 리듬을 타며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켰다.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도중에 성호가 몇 번이나 왔다 갔는지 모른다. 배고프지 않느냐고, 이제 그만 자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필상은 그 말이 아예 들리지 않았다.

무아의 지경에 든 사람처럼 자기만의 명상에 푹 빠졌다고 생각한 성호는 담요를 가져다 필상에게 덮어 줬다.

그런데 그것도 몰랐다.

“으음…….”

절대 잊지 않는다는 확신이 선 필상이 급기야 눈을 떴다.

그런데 사위가 깜깜한 밤이었다.

분명 노을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는데 어느 한순간, 시간의 흐름마저도 놓칠 만큼 집중했음을 깨달았다.

흐른 시간이 아깝지는 않지만 쌀쌀한 날씨에도 들어가 자지 않고 자신의 곁을 지킨 성호가 맞은편 벤치에 쭈그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걸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성호야!”

“어? 깨어났어요?”

“졸다 깬 건 너지. 근데 지금 몇 시지?”

“으으……. 새벽 3시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성호도 이렇게 시간이 흐른 게 어이없는지 필상을 쳐다보는 눈길에 ‘한심하다’는 빛깔이 묻어났다.

오늘 낮이었다면 바로 응징이 들어갔을 것이나 필상은 조용히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출출했기 때문이다.

“뭐하려고요?”

“미역국 끓이려고.”

“오밤중에 무슨……. 저리 비켜요. 제가 할게요.”

“됐어. 넌 소파에 누워 눈 좀 붙여. 다 되면 깨울게.”

“정말이죠?”

고개를 끄덕인 필상은 미역을 꺼내 물에 불리고는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 볶기 시작했다. 딱히 음식을 가리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며칠 전부터 미역국이 먹고 싶었다.

물론 평소 좋아하기 때문에 잘 끓인다. 성호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밑반찬을 꺼내 밥상을 차리던 필상은 미역국이 끓는 사이, TV를 켰다.

마침 오늘 낮에 있었던 엘리에르 레이디스 오픈 3라운드가 재방송 중이었다. 중계 화면의 절반은 역시 모모코가 차지했다.

그런데 화면을 통해 본 모모코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단지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쳐서만은 아니다.

모든 스윙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결과 또한 실망스러웠다.

“걱정되죠?”

TV 소리에 깼는지 성호가 말을 보탰다.

“오늘 결과는?”

“종합 3언더요. 순위는 공동 35위까지 내려갔어요.”

“선두와의 타수 차는?”

“9타요.”

첫날부터 부진한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어제는 3타를 줄여 -4, 공동 16위까지 올라서 결선에서의 대역전을 기대한 팬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타수를 줄이기는커녕 오버파를 친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흔하다. 4라운드로 펼쳐지는 대회는 내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모모코라면 얘기가 다르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아.”

“그렇죠? 제가 봐도 스윙이 정상은 아니었어요.”

“아침 일찍 에히메로 가는 비행기 있는지 확인해 봐.”

“네!”

시코쿠 지역은 비행기가 없다면 감히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먼 지역이다. 하지만 다행히 새벽 비행기가 있었다.

미역국에 김치를 곁들여 허기진 배를 채운 필상은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저 컨디션 난조라면 상관이 없지만 뭔가 께름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에 급급해 사랑하는 이의 고통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내일 다음 대회가 열리는 고치로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그보다 더 절실했다.

“연습장으로 가자.”

“네.”

6시 비행기를 탄 필상과 성호가 엘리에르 골프 클럽에 도착한 시간은 8시 반이다. 필상을 알아본 팬들이 따라붙었지만 평소와 달리 매너를 지킬 여유가 없었다.

이동하는 내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상당히 불편했었다. 힘들어했을 모모코의 전화를 받은 자신은 어서 끊기를 바랐었기 때문이다.

“없는데요?”

“미사키에게 연락해 봐.”

온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불필요한 부담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곧 출발할 선수가 아직 숙소에 있다는 말에 얼른 달려갔다.

“모모코!”

“오빠.”

필상을 보자 눈물부터 글썽거리는 그녀를 먼저 안아 줬다. 왜 부진하냐고 물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힘든 사람은 그녀였고 그걸 애써 외면한 자신의 안이함을 생각하면 무슨 말을 해도 할 말이 없다.

등을 토닥거리는 필상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던 모모코가 갑자기 필상을 잡아끌더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미사키나 성호에게 밝히기 힘든 말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는 두 팔을 목에 두르고 입술을 찾았다.

‘으음……. 모모코…….’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용기와 격려였다.

그걸 한꺼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말이 세상에 없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그 행위는 그 이상의 평안을 선사했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입술을 탐했는지 모르겠으나 밖에서 소리친 성호의 음성은 똑똑히 들렸다.

“형. 이제 그만 나가야 해요. 티오프 30분 전이라고요.”

정말 아쉬움을 가득 안은 채 그녀를 내려놨다.

어느새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모든 것을 밀착시킨 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의도한 면도 없지 않다.

힘들고 지친 그녀에게 자신의 몸이 보약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모코의 안색부터 확인했다.

“저 괜찮아졌어요.”

“정말이야?”

“네. 오빠가 이렇게 달려와 줬는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저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일단 나가자.”

밖으로 나온 둘의 눈치를 살피는 성호와 미사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둘의 입술 색깔이 똑같아진 이유를 상상하는가?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오랜만에 만나 약간의 애정을 드러낸 것이 뭐 그리 이상하다고.

바로 입을 연 사람은 필상이었다.

“미사키. 미안하지만 오늘 하루만 내가 캐디를 봐도 될까?”

“그럼요. 캐디계의 전설이 직접 나선다는데 제가 감히 어떻게 거부하겠어요.”

앞으로 모모코의 골프백을 맬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던 사람이 바로 필상이다. 때문에 그녀의 고유 영역을 범하는 것은 양해가 필요했다.

때론 기분 나쁠 수도 있을 것 같았으나 미사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녀도 지금 모모코에게 뭐가 필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은 필상의 행동에 모모코의 표정은 만개한 국화처럼 피었고 이내 단단한 각오를 밝혔다.

“이제 싹 죽었어!”

서둘러 이동했다.

그새 필상은 미사키로부터 야디지북과 함께 코스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는데 의외로 크게 집중하지는 않았다.

과한 자신감이 아니라 지금 모모코에게 필요한 것은 그보다 중요한 마음의 안정과 자신의 스윙이 가능한지 여부였다.

갑작스럽게 컨디션이 나빠진 원인도 따져야 했지만 경기 시간이 다가온 상황이라서 미처 챙길 수가 없는 게 아쉬웠다.

필상이 예고도 없이 이곳에 나타난 소식은 이미 발 빠른 기자들의 레이더에 포착되었기에 모모코와 같이 1번 홀로 이동하는 사이 엄청난 취재진들이 몰려들었다.

안타깝지만 그들을 응대할 겨를이 없어 진행 요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길을 텄고 힘들게 1번 홀 티 박스에 도착했다.

“모모코. 이리와.”

“왜요?”

“마사지해 줄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괜찮아요? 흐흐흐…….”

기대하지 않았던 필상의 연이은 배려에 그녀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왜 그런 쑥스러운 행동을 자처하는지 모르지 않기에 기꺼이 필상의 앞에 등을 허락했다.

필상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는 순간,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사실 처음도 아니다. 이미 필상이 그녀의 등과 팔을 주무르는 사진은 쉽게 포털에 검색이 된다.

하지만 상상한 장면이 눈앞에서 현실화되는 것이 너무 야했던 것일까? 자연스럽게 그 포즈를 취하자 부러움을 넘어선 시기와 질투의 외침이 홀 주변을 완전히 도배해 버렸다.

“어때?”

“좋아요.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아요.”

“감각이 무뎌졌었구나.”

“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되지 않아 헷갈렸어요.”

“고마워.”

“뭐가요?”

“경기를 포기하지 않아서.”

모모코가 필상을 향해 돌아섰다. 때마침 자신의 티샷 순서이기도 했으나 필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촉촉했다.

그녀는 정말 경기를 포기할 의사가 있었다.

필상이 이렇게 달려오지 않았다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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